약 100년 전 최초의 합성플라스틱인 베이클라이트가 탄생하면서 인류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었다. 일명 ‘호모플라스티쿠스’(Homo plasticus)로 플라스틱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플라스틱을 소비하며 사는 인간을 뜻한다. 지난 2005년을 기준으로 전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억 3000만 톤을 돌파했고 오는 2010년에는 3억 400만 톤에 이를 전망이다.
세계 4위의 플라스틱 생산국인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발생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400만 톤이 넘는다. 이 가운데 재활용하는 비율은 3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소각하거나 땅에 묻는다.
폐플라스틱을 소각장에서 태우면 1kg당 최고 1만 1000kcal의 열이 발생한다. 이를 이용하면 난방을 하거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지만 연소과정에서 다이옥신 같은 유해물질이 발생해 문제가 된다.
‘애물단지’ PVC를 걸러내라!
플라스틱을 매립한다 해도 수백 년간 썩지 않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비닐봉지가 썩는 데는 10년, 플라스틱 용기는 50~80년, 나일론 칫솔은 100년, 스티로폼은 500년 이상 걸린다. 또 무게에 비해 부피가 커 운반비도 많이 든다.
2003년 정부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을 통해 플라스틱을 포함한 쓰레기를 소각하거나 매립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어떻게 골라내 재활용할 수 있을까.
고철과 캔, 플라스틱, 종이를 종류에 따라 구분해 버리는 까닭은 재활용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을 적절히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분리수거를 제대로 해야 한다.
원유로 만든 플라스틱은 첨가하는 재료나 방법에 따라 100여 종류로 나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플라스틱은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스티렌(PS), 페트(PET), 에이비에스(ABS)로 모두 가열하면 녹는 열가소성플라스틱이다. 최근 여러 종류가 섞여있는 혼합플라스틱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육안으로 플라스틱의 종류를 구분하기 어렵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류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PVC는 가열하면 염화수소와 다이옥신을 배출하고 재활용된 다른 플라스틱의 품질을 떨어뜨리므로 반드시 걸러내야 할 ‘애물단지’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폐플라스틱을 자동으로 분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다. 그 결과 플라스틱을 종류별로 골라내는 ‘3단계 방어라인’을 구축했다.
“잠시 근적외선 검문이 있겠습니다~”
퇴근 길 현관문을 열면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는 것은 적외선 센서 덕분이다. 조명의 센서는 끊임없이 적외선을 내보내는데, 적외선이 사람의 몸과 부딪혀 되돌아오는 시간과 파형의 변화를 감지해 불을 켠다. 자동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플라스틱의 ‘헤쳐모여’ 기술에도 적외선이 활용된다.
근적외선은 파장이 0.8~2.5μm인 빛으로 적외선 가운데 파장이 가장 짧다. 그런데 근적외선을 플라스틱에 쪼이면 플라스틱마다 다른 모양의 스펙트럼이 나타난다. 이 데이터를 이용하면 컨베이어벨트를 지나가는 페트병과 플라스틱 그릇, 장난감에 근적외선을 쏜 뒤 나온 스펙트럼을 분석해 어떤 종류의 플라스틱인지 알 수 있다.
독일의 재활용기업인 듀얼시스템 도이칠란트(DSD)는 초속 2m로 지나가는 플라스틱을 근적외선 분광기로 분류하는 공정을 적용 중이다. 국내에서는 자원재활용업체인 이오니아E&T가 근적외선 분광법을 개발해 경남 밀양에 플라스틱 자동선별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10톤 정도의 PE, PP, PS, PVC를 처리하고 분류할 수 있다. 근적외선 분광법은 병과 용기처럼 부피가 큰 플라스틱을 분리하는 데 유리하다.
기름이 물에 뜨듯 플라스틱마다 비중이 다른 점을 이용할 수도 있다. PE와 PP의 비중은 약 0.9로 가벼운 플라스틱에 속하고 PS와 PET, PVC는 비중이 1을 넘는 무거운 플라스틱이다. 이 차이를 이용하면 잘게 부순 플라스틱 조각을 쉽게 분류할 수 있다. 바람의 세기를 조절해 플라스틱을 구별하는 풍력선별법과 물이나 소금물, 알코올에 플라스틱 조각을 띄워 분리하는 습식선별법이 있다. 최근 독일의 TLT재활용회사는 비중 차이가 0.2 정도밖에 나지 않는 PP와 PE를 분리할 수 있는 용액을 제조해 현장에 적용 중이다.
1. 서로 다른 플라스틱 A와 B를 마찰시키면 일함수가 큰 A쪽으로 전자가 이동하며 음전하를 띤다.
2. 하전된 플라스틱 조각을 3만 볼트(V)의 고전압이 흐르는 전기장 사이로 통과시키면 각각 반대 극을 향해 끌려가며 분리된다.
3. 두 플라스틱이 섞여 있는 경우(A+B) 이 과정을 반복해 분리 정확도를 높인다.
플라스틱 쭈뼛 세우는 정전선별법
책받침을 스웨터에 문지른 뒤 머리카락에 대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바로 정전기 때문인데, 건조한 날 물체가 서로 마찰하면 매우 짧은 순간 수만 볼트 전압의 전기가 만들어진다. 정전기를 이용해 만드는 대표적인 기계가 바로 복사기와 프린터다. 전류가 흐르면 토너 입자들이 음전하를 띠고, 양전하를 띤 종이에 달라붙는다. 따라서 종이 뒤에서 양전하를 쪼이는 부분을 변화시키면 원하는 모양을 인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을 서로 마찰시키거나 헝겊에 문지르면 플라스틱의 *일함수 값에 따라 전자가 이동하며 전기를 띠게 된다. 이렇게 서로 반대 극성을 띤 혼합 플라스틱 조각들을 높은 전압이 흐르는 전기장 속에 통과시킨다. 그러면 양전하를 띤 플라스틱 조각은 (-)극으로, 음전하를 띤 조각은 (+)극으로 이동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이 방법으로 해초 건조용 플라스틱(PP), 자동차 미등(ABS), 전선피복(PVC)과 맥주병(PET) 등을 99.5%의 정확도로 걸러내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시간에 300kg의 플라스틱을 선별할 수 있는데, 혼합 플라스틱 속에 섞여있는 PVC 함량도 1% 이하로 감소시켰다. 복사기를 만든 정전기의 원리가 플라스틱의 재활용에서도 맹활약하는 셈이다.
현재 플라스틱 재활용공정에서는 근적외선 분광법과 비중 선별법, 정전선별법을 함께 활용한다. 분리수거된 플라스틱 쓰레기 가운데 병이나 용기는 근적외선으로 분류한 뒤 나머지 플라스틱을 잘게 쪼개 비중 선별법과 정전선별법을 차례로 사용한다. 이렇게 분류한 플라스틱은 종류별로 녹여 다시 재활용하거나 고형연료, 석유로 만들 수 있다.
세계 1위의 플라스틱 생산국인 미국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대부분 매립한다. 하지만 미국처럼 넓은 매립지를 확보할 수 없는 국가들은 철저한 플라스틱 재활용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는 버려진 페트병으로 다시 페트병을 만드는 ‘병에서 병으로’(bottle to bottle) 정책을 오래 전부터 시작했고, 일본은 기업 주도로 슈퍼마켓마다 플라스틱 수거함을 설치해 재활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HP는 헌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2억 개가 넘는 정품 잉크젯 카트리지를 생산했다. 지난 1월 말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은 중소기업중앙회와 공동으로 발표한 ‘국내 폐기물관리 정책의 현황과 대안 제시’보고서에서 “플라스틱의 재활용률이 32.8%에 이르고 매년 20%P씩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의 전망이 매우 밝다”고 강조했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할 때 드는 비용은 1톤당 25만 6000원으로 소각(25만 3000원)이나 매립(18만 8000원)할 때 드는 비용보다 아직은 비싸다. 그러나 배럴당 100달러 대의 고유가 행진이 지속되면서 플라스틱 재활용은 자원과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플라스틱을 발명한 인류가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법에도 익숙해진다면 ‘플라스틱 아일랜드’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일함수*
물질 속에 있는 전자 하나를 밖으로 끌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의 일 또는 에너지. 단위는 전자볼트(eV)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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