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거리
때는 조선 중기. 천령(박진희 분)은 궁궐 여자들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녀로
죽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도 겸하고 있다. 어느 날 후궁인 희빈의 시중을 들던
궁녀 월령(서영희 분)이 서까래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당시 궁궐에서는 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 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고,
희빈 쪽에서는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러나 죽은 월령을 검시하던 천령은 월령이 임신했었다는 사실과
그의 죽음이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수사를 벌인다.
궁녀란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왕과 왕족의 시중을 들던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궁녀를 뽑는 제도가 확립되면서 그 수가 약 500명에 이르렀다. 궁녀는 어린 시절부터 ‘못 본 척 눈감고’ ‘못 들은 척 귀 막고’ ‘모르는 척 입 다물라’는 세 개의 철칙을 몸에 익혀야 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쥐부리글려’라는 행사를 벌여 궁녀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쥐부리글려’는 궁에 들어온 어린 궁녀들의 입에 밀떡을 물리고 길게 줄을 세운 뒤, 횃불로 이들의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쥐부리글려, 쥐부리지져”라고 위협하는 내시의 목소리에 어린 궁녀는 겁에 질려 발을 동동 구르고 울부짖는다. 여기에는 함부로 말을 했다간 혼쭐이 난다는 경고의 의미와 함께 잡귀를 쫓아내려는 주술적 의미가 숨어있다.
목을 맨 현장이 지나치게 깨끗하다?
“자살이 아닙니다. 용의주도하고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영화 ‘궁녀’의 주인공인 천령은 마치 ‘CSI과학수사대’처럼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시체를 검시한다. 그는 궁녀 월령의 사건을 수사하며 서까래에 감겨있던 밧줄 주변의 먼지가 전혀 흩어지지 않았고, 배설물도 없었다면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단정짓는다. 과연 그의 추론은 맞을까.
부검(Autopsy)이란 죽은 사람의 신체를 해부해 사인을 밝히는 일을 뜻한다. 예로부터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부검을 망자를 두번 죽이는 일로 인식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죽은 자의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다.
법의학에서는 목을 끈에 매달아 스스로의 체중에 의해 목이 압박돼 사망하는 경우를 ‘의사’(Hanging)라고 한다. 끈을 고정시킨 지점을 현수점이라고 부르는데, 대개 현수점은 머리 뒤편 정중앙의 연장선 위에 위치한다. 만약 월령이 자살을 하기 위해 목을 맸다면 밧줄에 매달린 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몸을 움직이게 된다. 이때 밧줄 주변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월령이 목을 맨 현장은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에 누군가 이미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매달았다는 천령의 첫 번째 추론은 타당하다.
목을 매면 일반적으로 목의 혈관이 압박되면서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이 차단된다. 이때 뇌는 급격한 저산소증에 빠지는데, 2~3분 안에 의식을 잃고 호흡중추가 마비되면서 죽음에 이른다. 오줌이나 대변, 정액을 배설하기도 하므로 현장에 이런 배설물이 있다면 자살일 확률이 높다.
임신의 증거, 출산의 증거
영화에서 천령이 죽은 월령의 시체를 검시하면서 그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도대체 천령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임신이란 좁은 의미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현상이다. 임신을 하면 일단 생리가 중단되고, 4주에서 길게는 12주 동안 속이 메스껍고 자주 토하는 입덧 증상이 나타난다. 대개 임신 초기에는 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을 압박하므로 소변을 자주 보고, 16~20주 사이에는 태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임신했을 때 나타나는 이러한 증상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이미 죽은 월령의 경우 임신의 증거가 아닌 출산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은 뒤 4주가 지나면 자궁의 크기가 임신 전의 크기로 돌아간다. 만약 천령이 월령의 시체에서 출산의 증거를 찾아냈다면 아마 죽은 월령의 자궁이 여전히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고 내린 결론일 것이다. 또한 출산 때 여성의 질이 찢어지며 아기가 쉽게 나오도록 돕는데, 아마 월령의 질에도 아이를 낳다 생긴 상처가 있었을지 모른다. 임산부 배의 피부에 생기는 튼살도 출산 여부를 추측하는데 도움이 된다.
천령의 과학수사 덕분에 범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날 때쯤 월령의 시체가 갑자기 화장된다. 설상가상으로 월령의 출산 사실을 알고 있던 궁녀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월령의 죽음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그러나 월령의 월경 날짜가 적힌 진료 기록을 찾아낸 천령은 왕자를 낳은 여자가 희빈이 아닌 월령이었다는 비밀을 알아낸다.
왕의 간택을 받은 여자는 임신하기 좋은 날짜를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월경주기를 기록했다. 여성 대부분은 24~32일의 월경주기를 갖고, 배란은 12~18일 사이의 기간에 일어난다. 난자는 배란된지 24시간 안에 수정되지 않으면 사멸한다. 이때 두꺼워진 자궁내막이 떨어져나가며 혈액과 함께 질로 배출되는 현상이 월경이다. 배란일은 대개 생리가 시작되기 14일 전쯤인데, 이때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 임신할 확률이 높아진다. 배란일을 정확히 찾기 위해 한달간 매일 아침 구강 체온을 측정해 기초체온표를 만들기도 한다. 보통 배란이 일어난 다음날부터 체온이 1℃ 정도 상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귀신이 보이면 정신분열병?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 천령은 과학수사로 사건의 전말을 모두 밝히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죽은 월령의 귀신이 등장해 왕자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인물을 잔인하게 제거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지만 젖 한번 물려보지 못하고 살해당한 월령의 한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까. 결국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천령조차 월령의 귀신을 못 본 척 눈감고, 못 들은 척 귀 막고,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살기로 결심한다.
귀신을 본다는 것은 여러모로 정신분열병에서 나타나는 환각 증상과 비슷하다. 정신분석학에서 환각이란 세상을 왜곡해서 지각하는 현상을 뜻하는데, 환청이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환청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 귀에 들리는 경우부터 뚜렷한 의미가 있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경우까지 그 증상이 다양하다. 같은 소리가 반복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소리가 혼합돼 들리기도 한다.
정신분열병 환자가 듣는 환청은 대개 환자가 갖는 망상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욕하는 내용의 환청은 피해망상과 연결되는 식으로 말이다. 정신분열병의 개념을 확립했던 독일의 심리학자 슈나이더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 자기의 행동에 간섭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면 정신분열병 1급 증상이라고 분류했다.
환시는 단순한 물체나 빛이 보이는 증상에서부터 영화 화면처럼 복잡한 장면이 보이는 증상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보통 정신분열병 환자보다는 코카인이나 필로폰에 중독됐거나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심각한 경우 작은 짐승이나 벌레, 무서운 괴물이 눈에 보이며 공포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대개 환각은 환자의 마음이 외부로 투사되면서 생기는데, 죄책감이나 욕망, 증오심, 사랑, 명예욕 같은 모든 감정적 콤플렉스가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수사하던 천령은 월령의 귀신과 마주치며 모든 것을 덮어두기로 한다. 구중궁궐의 그늘 속에서 감정과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가야 했던 조선시대 궁녀의 삶은 과학수사로도 풀기 힘들 만큼 한으로 응어리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월령이 낳은 세자가 왕으로 책봉되며 끝나지만 궁녀에 얽힌 끝없는 미스터리는 그 궁금증을 진하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