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원하는 대로 확장시킬 수 있는 리드 리차드, 투명인간으로 변신하며 강풍을 일으키는 수 스톰, 활활 타오르면서 쏜살같이 날아다니는 쟈니 스톰, 그리고 암석같이 단단한 근육을 가진 벤 그림.
몇해 전 개봉한 SF영화 ‘판타스틱 4’ 주인공들의 면면이다. 이들이 이런 ‘판타스틱한’ 능력을 갖게된 원인은 바로 우주방사선이다.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이들 4명은 태양으로부터 온 방사선 폭풍을 맞고 돌연변이 인간으로 변했다.
우주방사선을 맞으면 정말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 세계의 우주개발 선진국들은 혹독한 우주환경이 인체에 미칠 영향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에 일으킬 유전적 변화를 탐구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우주방사선에 노출된 식중독균 독성 강해져
우주방사선을 맞고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는 설정은 영화적 상상이지만, 지구 환경에서 수억 년 동안 적응하며 진화해 온 생명체는 우주방사선과 미소중력, 진공이나 약한 지구자기장 같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노출될 경우 유전자가 변할 수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셰릴 니커슨 교수는 지난 10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우주선에 실려 외계에 나갔다 돌아온 식중독의 병원균인 살모넬라균의 독성이 한층 더 강해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니커슨 교수는 지난해 9월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에 실려 우주에 12일 동안 머물다 돌아온 살모넬라균을 생쥐에 투여한 뒤 지구의 평범한 살모넬라균을 투여한 생쥐와 비교했다.
실험결과 지구의 살모넬라균을 투여한 쥐의 40%가 살아남은 반면 우주에서 살다온 살모넬라균을 투여한 쥐는 10%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게다가 우주살모넬라균에 감염된 쥐는 사망에 이르는 속도가 3배나 빨랐다.
이 현상의 원인으로 니커슨 교수는 유전자의 변화를 꼽았다. 우주살모넬라균의 DNA를 조사한 결과 유전자 167개와 단백질 73개에 중대한 변화가 발견된 것이다.
그는 “환경변화에 대한 생명체의 반응을 보여주는 실험결과”라면서 “이 병균들은 환경이 변화하면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으며 달라진 환경을 감지하는 순간 살기 위해 유전적 장치를 변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우주에 갔다가 살모넬라균에 감염돼 식중독에 걸렸던 우주인은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70년 아폴로 13 우주선을 타고 달탐사를 떠났던 미국 우주인 프레드 헤세는 갑작스런 우주선 고장으로 산소와 물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헤세는 전립선이 녹농균에 감염되는 병에 걸렸다.
지구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는 놀랄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닌 녹농균 때문에 몇 주 동안 고생했다. 대부분 과학자들은 극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헤세의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병이 심각했다고 주장했지만 우주환경에서 녹농균의 독성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과학자도 있었다.
이런 사례를 ISS에 머물고 있는 우주인이 반가워할 리 없다. 따라서 ISS는 우주인이 왕복하면서 옮겨놓은 각종 미생물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청결관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우주인이 감기에만 걸려도 예비우주인으로 교체하거나 우주에 반입하는 모든 물질을 엄격하게 조사하고 제한하는 일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중국 ‘우주육종’에 큰 관심 보여
우주환경이 생명체의 유전자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우주여행시대를 대비해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우주에서 어떤 유전자변이를 일으키는지 연구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주환경에서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려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씨앗을 우주환경에 노출시킨 뒤 회수해 지상에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방법을 ‘우주육종’(space breeding)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방사선을 씨앗에 쪼여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것처럼 씨앗을 우주방사선이나 진공, 미소중력 같은 우주환경에 노출시켜 유전자변이를 일으킨다.
우주육종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10억이 넘는 인구의 식량문제를 우주육종으로 풀어가려는 심산이다. 1987년 우주육종 실험에 뛰어든 중국은 직접 개발한 로켓과 인공위성으로 2주일 정도 종자와 식물체를 우주에 노출시킨 뒤 회수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해왔다.
그동안 단백질 함량을 8~12% 높인 벼나 비타민C 함량이 15~20% 증가한 고추 종자를 개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둔 중국은 2006년 9월에는 세계 최초의 우주육종전용위성 쉬찌안(實踐) 8호를 발사했다.
약 2000여 종에 이르는 식물 종자와 균류 200kg을 로켓에 실어 2주 동안 궤도를 돌게 한 뒤 회수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7가지 씨앗(벼, 콩, 들깨, 유채, 애기장대, 무, 난) 200g도 실려 있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우주에 다녀온 씨앗을 2006년 11월 돌려받아 우주환경이 이들 씨앗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 방사선생명공학연구센터 강시용 박사는 “씨앗을 지난 봄 파종해 기른 결과 콩과 애기장대가 생육초기에 발육이 저하됐으며 난에서는 줄무늬가 나타나는 변이가 있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돌연변이는 대를 거듭할수록 많이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주 씨앗의 2세가 탄생하는 2008년에 더 많은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집에서 우주 씨앗 길러볼까
2008년 4월 8일 ISS를 방문하는 한국 최초 우주인도 우주육종 실험을 할 예정이다. 먼저 중국의 쉬찌안 8호에 씨앗을 실어 우주환경에 노출시켰던 때처럼 씨앗을 가져간다. 이번에 우주여행을 할 씨앗은 모두 9종 300g으로 지난번 7종에 담배와 인삼이 추가됐다.
이들 씨앗은 2008년 1월 러시아의 화물우주선 프로그래스에 실려 미리 ISS에 도착할 예정이다. 3개월 동안 우주환경에 노출시킨 다음, 4월 16일 우리 우주인이 ISS에서 모든 임무를 마친 뒤 갖고 돌아오면 바로 파종해 씨앗의 생장과 변이를 관찰한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실험도 있다. 가져간 씨앗 가운데 초기 생장이 빠른 콩과 무를 ISS에서 직접 싹을 틔운다. 특수 제작된 ‘우주새싹배양기’에서 씨앗의 싹을 틔워 뿌리와 줄기가 자라는 모습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여줄 계획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우주인개발단 최기혁 단장은 “중력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식물의 뿌리와 줄기가 자라는 방향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도 되지만 앞으로 무와 콩을 우주에서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는 식품으로서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최 단장은 “우주인이 학생들에게 나눠줄 선물도 있다”고 귀띔하며 “무궁화, 코스모스, 고추, 민들레 씨앗 300g을 우주에 가져갈 예정인데, 돌아온 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4월, ISS에서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한국 최초 우주인의 손에 어떤 ‘판타스틱 씨앗’이 들려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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