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산업디자이너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집트 출신의 카림 라시드는 플라스틱 예찬론자다. 자신의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는 ‘유연성’(plasticity)있는 소재로 플라스틱만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집을 전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 국내 한 업체의 의뢰로 깜찍한 플라스틱 책꽂이를 디자인해 ‘책꽂이=나무격자’라는 통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라시드 정도는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이미 플라스틱에 깊이 중독돼 있다. 플라스틱 튜브에 들어있는 치약을 짜서 플라스틱 칫솔로 양치질을 하고 플라스틱 빗으로 머리를 빗는다. 플라스틱테(일명 뿔테)에 렌즈까지 플라스틱 안경을 쓰고 플라스틱(페트)병에 든 물을 마신다.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50년 사이 사용량 200배 늘어
플라스틱이란 말은 ‘성형하기 알맞다’는 뜻의 그리스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에서 유래했다. 열이나 압력을 가했을 때 성형이 가능한 물질을 통칭하는데 합성 또는 반(半)합성 고분자로 이뤄졌다.
“본격적인 플라스틱이 선보인지 이제 꼭 100년이 됩니다. 이런 짧은 기간 동안 이토록 사람들을 사로잡은 소재는 없었죠.” 서강대 화학생물공학과 이재욱 교수의 말이다. 1907년 벨기에 출신 이민자 레오 헨드락 베이클랜드가 미국에서 발명한 ‘베이클라이트’는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를 합성해 만든 최초의 합성 플라스틱이다. 당구공의 재료로 쓰던 상아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 대체품으로 선보였던 것. 온도, 습도 변화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 베이클라이트는 전선피복, 전화기, 커피 메이커 등의 소재로 급속히 보급됐다.
그 뒤 스타킹을 대중화시킨 나일론, 유리보다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스티로폼’이라는 상표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발포폴리스티렌 등이 등장하면서 ‘플라스틱 패밀리’는 위력을 더해갔다. 세계의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1950년 100만 톤에서 현재 2억 3천만 톤으로 늘었다. 이런 양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은 나무나 유리, 비단 같은 천연재료의 질감을 흉내 내기에 급급한 싸구려 대체품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미래에는 자연에 있는 어떤 재료로도 구현할 수 없는 고유한 물성을 띠는 플라스틱이 인류의 삶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독일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 신비지니스창조센터 엑카르트 폴틴 소장의 설명이다.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가 개발하고 있는 빛을 내는 플라스틱 ‘라이트론’이 대표적인 예. 전도성 플라스틱 필름 사이에 안료 결정이 채워져 있는 라이트론은 전류가 흐르면 결정에서 은은한 빛이 나온다. 필름의 두께가 아주 얇기 때문에 종이처럼 말 수 있고 적당한 모양으로 잘라도 된다. 안료 결정의 종류에 따라 여러 색을 연출할 수도 있다. “핸드백 안쪽 면에 라이트론 필름 조각을 붙여놓으면 내용물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바이엘코리아 김기정 이사는 라이트론의 응용범위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대용량 저장매체도 등장했다. 미국의 인페이스테크놀로지스사는 저장 용량이 300기가바이트로 DVD 50장에 해당하는 플라스틱 홀로그래픽 데이터 저장장치를 개발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수mm두께의 플라스틱에 레이저 펄스를 쏴 화학 반응을 일으켜 3차원 홀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저장한다. 수명이 50년으로 20년이 안 되는 CD나 DVD보다 월등하다.
자전거 전문업체인 미국의 TAG 휠스사는 플라스틱 바퀴살인 FRX5를 사용한 자전거를 출시했다. 다국적 화학회사 듀폰이 개발한 나일론수지와 유리섬유를 블렌딩한 플라스틱 ‘자이텔 나일론’으로 만든 FRX5는 일체형이라 충격에 강하고 튜닝이 필요없다. FRX5를 장착한 자전거를 타본 프로선수 다마 폰데인은 “바위에 부딪쳐 타이어가 터졌는데도 바퀴살은 멀쩡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뿌리는 플라스틱으로 소음 해결
건축이나 토목 분야에서도 플라스틱의 활약이 눈부시다. 기차가 지나는 철길 옆에 사는 사람들은 소음으로 늘 신경이 피로하다. 조용하고 쾌적한 곳에서 한잠 푹 자는 게 소원이다. 민원이 폭주하다보니 방음벽을 설치한 구간이 늘어난다. 그 결과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기차여행의 낭만도 색이 바랜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전망이다.
철도 건설업체인 독일 프렌첼-바우 그룹은 혁신적인 철로 시스템인 ‘더플렉스’를 개발했다. 더플렉스는 뿌리는 플라스틱을 써서 철로 밑에 깔려있는 자갈 사이를 메우는 기법으로 소음을 대폭 줄였다. 자갈 사이에 액체 폴리우레탄 조성물을 스프레이로 뿌리면 순식간에 발포성 폴리우레탄으로 굳는다. 그 결과 기차가 지나갈 때 진동으로 자갈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소음을 방지할 수 있을뿐더러 레일이 받는 충격을 흡수해 철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지난 여름 독일 윌첸 지역에 300m 길이로 시범 설치돼 현재 타당성을 시험하고 있다.
독일 푸렌사가 선보인 보마테름 태양 지붕은 위쪽이 폴리카보네이트, 아래쪽이 폴리우레탄 재질이고 그 사이가 비어있다.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를 통과한 빛은 내부 공간에 있는 공기를 덥히지만 단열재인 폴리우레탄 때문에 열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태양열로 덥혀진 공기는 지붕의 높은 쪽으로 이동해 열교환기를 거쳐 유용한 에너지로 바뀐다. 보마테름 태양 지붕은 기와를 얹은 지붕에 비해 무게가 절반밖에 나가지 않아 시공하기도 편하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열릴 37개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선양 올림픽 스타디움은 새가 내려앉으며 날개를 접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관중석을 덮은 지붕이 양 날개에 해당하는데 넓이가 2만㎡로 축구장면적의 2배가 넘는다. 유리처럼 투명한 이 지붕은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가 개발한 폴리카보네이트 ‘마크로론’이다. 마크로론은 충격강도가 유리의 250배나 되므로 25mm 두께로도 태풍이나 폭설 같은 악천후를 견딜 수 있다.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디자인이었던 셈이다.
플라스틱 전시회, 화두는 에너지와 환경
“Was ist das?”(이게 뭐야?)
전시장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엔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자동차 앞에 모여든다. 차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니 실제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다.
지난 10월 24일부터 31일까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세계최대 규모의 플라스틱·고무 전시회 K2007에는 59개 나라 3130개 업체가 참가했다. K2007의 ‘히어로’는 단연 속 비치는 스포츠카 ‘엑사시스’(eXasis)였다. 스위스 자동차업체인 린스피드와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가 공동 개발한 엑사시스는 철판 대신 ‘마크로론’이라는 폴리카보네이트 플라스틱으로 차체를 만들었다.
투명한 마크로론은 철과 유리의 장점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무게는 유리의 절반이다. 그 결과 엑사시스는 무게가 750kg로 기존 차량의 3분의 2 수준이다. 따라서 같은 스피드를 내는데 출력이 작은 엔진으로도 충분하다. 엑사시스는 150마력의 에탄올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최고속도 시속 210km,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로 가속하는 데 4.8초밖에 안 걸리는 스포츠카다.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의 혁신 책임자인 이안 패터슨 부회장은 “차무게가 1% 가벼워지면 연료가 0.7% 덜 든다”며 “자동차 부품에서 플라스틱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화학회사 바스프에서 만든 플라스틱 ‘테르블렌드’로 멋을 낸 오토바이도 눈길을 끌었다. ABS(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스티렌)와 폴리아미드를 섞어 만든 테르블렌드는 영하의 온도에서도 충격을 견딜 수 있고 유기용매 같은 반응성이 큰 액체가 묻어도 변형되지 않는다. 성형하기 쉽고 풍부한 색표현이 가능한데다 표면이 매끌매끌해 촉감이 좋다. 따라서 가벼우면서도 멋진 디자인의 오토바이를 구현할 수 있다.
‘생뚱맞게 웬 옥수수?’
첨단 플라스틱이 즐비한 미국 듀폰사 전시장을 둘러보다 미니 옥수수 밭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있는 플라스틱은 옥수수에서 얻은 원료가 25~50% 정도 섞여있습니다. 성능은 석유 원료로만 제조한 플라스틱과 비슷하거나 더 낫습니다.” 듀폰사의 유럽홍보담당 호르스트 라이머씨의 설명이다. PLA(폴리락트산)처럼 식물 원료로 만든 바이오플라스틱도 최근 주목받고 있지만 자동차 부품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견딜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면 기존 플라스틱과 블렌딩이 불가피하다. 라이머씨는 “듀폰은 17년 전부터 플라스틱 원료를 석유에서 식물로 대체하는 연구를 해왔다”며 “재생가능 원료 덕분에 2015년에는 8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이 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첨단 플라스틱의 특성을 이용한 아이디어 제품도 눈길을 끌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신개념 과속방지턱 ‘잠자는 교통경찰’은 운전자가 방지턱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과속방지턱에 쓰인 플라스틱은 폴리우레탄으로 손가락으로 눌러보면 쑥 들어간다. 그런데 차가 지나갈 때 눌린다면 과속방지턱으로 쓸모가 없지 않을까.
“이 재질은 독특한 탄성을 보여 규정 속도 밑으로 주행하는 차가 지나갈 때는 눌려 들어가지만 그보다 빨리 달리다 부딪칠 경우에는 그대로 있습니다.” 독일 바이엘머티리얼사이언스사 신비지니스창조센터 엑카르트 폴틴 소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속도를 줄이지 않다가는 시멘트 방지턱과 마찬가지로 차체에 큰 충격을 준다. 엑카르트 폴틴 소장은 “앞으로 플라스틱 내구성을 개선하는 등 재질을 보완하면 실제 도로에 쓰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플라스틱, 지구를 성형하다
PART1 플라스틱, 21세기를 입힌다
PART2 막강 플라스틱 패밀리
우주 갔다 돌아올 '판타스틱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