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고기 탕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요,…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을 이유가,…대령숙수(궁에서 잔치때 왕이 먹을 음식을 만들던 남자 요리사)가 임금께 올린 것은 단순한 소고기 탕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 상심한 임금에게 대령숙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조선의 정신을 아뢰었던 겁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식객’(원작 허영만)의 한 대사다. 소고기와 토란대 같은 식품이 조선인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말은 음식이 곧 민족과 연관이 깊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음식이 사람의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류는 지구촌 구석구석 널리 퍼져 살면서 지역색을 반영한 독특한 전통 음식을 개발했다. 북부지방에는 추운 기후에 알맞은 음식이, 적도지방에는 더운 기후에 어울리는 음식이 발달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후손의 식습관에 영향을 미쳤고 북극에서 자란 사람과 적도지방에서 자란 사람의 게놈에 차이를 두기에 이르렀다.
영화 ‘식객’에서 조선의 모든 것이 소고기 탕에 들어있다고 말하듯, 후손의 게놈에 선조의 식습관이 반영됐다면 무리일까.
한국인‘밥 힘’ 원천은 아밀라아제 유전자 개수
흰쌀밥, 콩밥, 현미밥, 흑미밥, 잡곡밥…. 밥의 종류를 잠깐 세어봤을 뿐인데 벌써 다섯 손가락이 부족하다. ‘밥이 보약’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인은 밥 즉, 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아시아인은 쌀을 주식으로 먹는다. 높은 기온과 풍부한 강수량이 벼를 재배하기 알맞다.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 지역은 수확을 1년에 2~3번 할 정도다.
탄수화물은 침에 섞인 아밀라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된다. 탄수화물을 주식으로 한다면 아밀라아제가 풍부해야 소화에 유리하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쌀, 파스타, 감자 같은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양에 따라 인류의 유전체가 다양하게 발전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대 나다니엘 도미니 교수팀은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인 쌀을 주식으로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아밀라아제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인 아밀라아제1 (AMY1)의 개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네이처 지네틱스’ 10월호에 발표했다. 탄수화물 위주로 식사한 사람이 저탄수화물 위주로 식사를 한 사람보다 AMY1 유전자가 더 많았다.
도미니 교수는 “밥 같은 탄수화물 식단이 주인 일본인은 AMY1 유전자를 6개 이상 가졌다”며 “이는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북극의 야쿠트족 AMY1 유전자 개수의 두 배”라고 설명했다. 일본인은 식사시간마다 몰려드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기 위해 AMY1을 게놈 이곳저곳에 분포시켜 놓은 셈이다. 반대로 북극에서 사냥과 수렵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은 주로 단백질을 섭취하므로 아밀라아제 유전자가 많이 필요치 않았다.
우유가 주식인 유목민은 젖산분해효소 풍부해
“콜라 싫어~싫어 홍차 싫어~싫어, 새까만 커피 Oh No, 핫초코 싫어~싫어 사이다 싫어~싫어, 새하얀 우유 Oh yes, 맛좋고 색깔 좋고 영양도 최고, 깔끔한 내 입맛에 우유가 딱이야, 단백질 칼슘도 왕 비타민 가득, 건강한 내 입맛엔 우유가 딱이야, 우유 좋아 우유 좋아 우유 주세요(다 주세요).”
항간에 유행했던 노래 ‘우유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유가 영양가가 높으니 우유를 마시자는 내용이 주다.
단백질, 칼슘, 비타민이 풍부한 우유가 어린이의 영양식으로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유를 마셨다 하면 설사를 하는 이에게 우유는 기피 음식일 뿐이다. 실제로 우유는 아시아계 사람에게는 소화하기 어려운 식품이다. 우유에 포함된 젖산이라는 물질이 장에서 설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유목생활을 하던 유럽계 민족은 일찍이 목축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제품을 주식으로 했다. 이들의 게놈에는 젖산분해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어른이 돼도 활성화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동양인같이 일찌감치 정착생활을 한 민족의 후손이나 인도인같이 유럽인의 후손이지만 유제품을 먹지 않는 민족은 어른이 되면서 젖산분해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기능을 잃는다. 핀란드 헬싱키대 나빌 데나타 교수팀은 젖산분해효소 유전자의 활성도를 세계지도에 표시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지역과 몽골지역민이 우유를 잘 소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몽골이 좋은 예다. 몽골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수태차’라는 차를 만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수태차는 우유와 약초, 따뜻한 물을 섞어 만드는 차다. 우유를 차로 마실 정도니 몽골인의 생활에 우유가 얼마나 깊숙이 관련됐는지 알 만하다.
러시아인 보드카 마시는 이유는 ADLH에 있어
세상에서 알코올 도수가 가장 높은 술은 ‘스피리터스’란 이름의 폴란드산 보드카로 알코올 도수가 무려 96도다. 러시아인들도 도수가 50~70도에 이르는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 포도주가 보통 13도 정도고 맥주가 5도 정도라는 사실에 비춰보면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북쪽 지방에 사는 사람은 아주 독한 술을 마시는 셈이다.
폴란드와 러시아 같이 북방민족들이 독한 술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부지방은 겨울에 영하 40℃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다. 여름도 서늘하다. 인간은 한랭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독한 술을 마셔 몸에 열을 냈다.
술을 마시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져 감각이 무뎌지고 두통이 심해진다. 술이 체내에서 완전히 분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술을 마시면 알코올 탈수소효소(ADH)가 알코올을 분해해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든다. 그리고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ALDH)가 아세트알데히드를 물로 분해한다. 그런데 ALDH가 제대로 기능을 못 하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물질이 혈액 속에 고스란히 남아 숙취를 일으킨다.
술에 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약한 사람도 있는 것은 ALDH 활성 유전자 유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세트알데하이드 탈수소효소1(ALDH1)은 아세드알데히드가 고농도일 경우 활성화된다. 반면 아세트알데히드2 (ALDH2)는 알코올이 조금이라도 흡수되면 활성화돼 물로 분해한다.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일본인의 30%는 게놈의 ALDH2가 잘 활성화되지 않는다”며 “그 결과 아세트알데히드를 빨리 분해하지 못해 술을 조금만 먹어도 금방 취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서양인의 40% 이상은 ALDH1이 잘 활성화된다.
러시아인들은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보드카 같은 독한 술을 마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 교수는 “러시아인이 독한 술을 마시는 식습관으로 보아 러시아인의 ALDH1 유전자가 잘 활성될 것”으로 추측했다. 선조의 술 습관이 후대의 게놈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카레 속 커큐민 암세포 성장 유전자 제어
인도인들은 먼 길을 떠날 때 상비약으로 ‘강황’을 챙긴다. 인도인들은 강황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 순금보다 비싼 값을 매긴다. 더위가 심한 인도에서는 발한작용으로 인한 상쾌함을 얻기 위해 매운 맛의 향신료를 흔히 쓴다. 강황 뿌리에는 커큐민이라는 파이토케이칼 성분(식물활성영양소)이 들어 있다. 빛깔과 매콤한 향이 조화를 이룬 카레에도 커큐민이 다량 포함돼있다.
커큐민은 항암작용과 알츠하이머병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 참살이 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커큐민은 암세포의 성장을 돕는 NF-kappaB 유전자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결국 식도암과 관련된 주요한 단백질이 차단된다. 또한 피부암 등 다른 여러 종류의 암에서도 종양세포를 죽여 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또 뇌에 아밀로이드-베타(β) 단백질이 쌓이는 것을 막아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한다.
실제로 카레를 많이 먹는 인도인이 세계에서 치매 발생률이 가장 낮고, 암 발병률도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국립암연구소가 200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미국인은 약 640명이 암에 걸리는데 비해, 암에 걸린 인도인은 200명도 안 됐다.
인도인이 암 발생률이 낮은 것은 카레 성분 중 커큐민을 선조때부터 꾸준히 먹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몇 천 년 동안 인도인의 건강을 지켜준 카레, 인도의 전통음식이 될 자격이 있다.
We Are What We Eat!
조상이 먹던 음식을 후손이 대대로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지역의 기후조건이 어떤 작물의 재배에 알맞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음식이 민족에게 유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민족은 그 음식에 적응하며 자신의 게놈을 변화시킨다.
최근 부모의 식습관이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런던 킹스칼리지대의 팀 스펙터 교수팀은 쌍둥이 3000명의 식습관을 분석한 결과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식습관이 비슷할 확률이 높고 일란성 쌍둥이는 부모의 식습관과 비슷한 경우가 48% 이상이라는 연구결과를 ‘쌍둥이 연구와 인체유전학저널’ 10월호에 발표했다. 스펙터 교수는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의 식습관이 비슷하다는 것은 식습관이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말했다.
발걸음을 6만 번 떼야 마라톤 완주가 가능하듯, 유전이 한 대씩 꾸준히 이어져야 인류의 게놈도 진화할 수 있다. 대를 이어 음식이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바꾼 것도 어찌 보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묘책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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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음식이 바꾼 인류 유전자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