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가을들판 三色이야기

고개숙인 벼, 원조포도, 곰의 작품 사과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 돌아오면 독일 시인 릴케의 시 ‘가을날’이 떠오른다. 열대야로 심신을 지치게 했던 8월의 무더위도, 햇살이 여전히 따가웠던 9월의 한낮도 모두 결실을 위한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거둬들인 곡식과 과일은 그러나 순전히 자연이 보살펴준 결과만은 아니다. 이들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인류는 오랜 기간 수고했으며 때로는 다른 생명체의 덕을 보기도 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결과 속속 밝혀지고 있다.
 

가을들판 三色이야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대화 도중에 좀 아는 체하다보면 듣는 말이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좀 겸손하면 안 되겠니?”

낟알이 촘촘한 이삭이 달려 있는 수확기의 벼를 보노라면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 조상들의 정서에 딱 들어맞는 비유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벼의 입장에서는 난감할 것 같기도 하다. 낟알이 다 성숙했는데도 떨어지지 않으니 자손을 퍼뜨릴 수가 없지 않은가. 결국 사람이 벼를 거둬들여 낟알을 수습해줄 때가지 벼는 초조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동남아와 인도에서 자생하는 야생 벼는 그다지 겸손하지 않다.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척 하다가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낟알을 흩뿌려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가 재배하는 벼는 야생 벼에서 나타난 돌연변이체가 선별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낟알이 익자마자 바람이 불거나 뭔가가 스치기만 해도 이삭에서 떨어져 흩어져버리는, 즉 탈립성이 큰 야생종에 비해 끝까지 붙어있는 돌연변이체의 발견이 없었다면 오늘날 농촌풍경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난해 미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은 벼 낟알의 탈립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미국 미시건주립대 타오 상 교수팀은 야생 벼와 재배 벼의 유전체를 비교한 결과 SH4라는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낟알의 탈립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편 일본 농생물과학연구소 마사히로 야노 박사팀은 탈립성이 작은 일본 품종 ‘니폰베어’와 탈립성이 여전한 인도 품종 ‘카살라스’의 유전체를 비교해 qSH1이라는 유전자가 관여함을 밝혔다. 니폰베어의 경우 이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부분에 돌연변이가 생겨 qSH1 단백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 이 발견에 대해 미국 위스콘신대 존 도에블리 교수는 “SH4와 qSH1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벼를 잡초에서 최고의 농작물로 거듭나게 했다”며 “이밖에 낟알이 커지고 겨가 잘 벗겨지는 돌연변이체도 1만 년 전 농부들의 선택을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쌀알의 색깔도 인류가 선발한 특징이라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미국 코넬대 수전 매코치 교수와 충북대 조용구 교수, 농촌진흥청 농업생명공학연구원 박용진 박사 등 한·미 연구팀은 흰쌀이 붉은색을 만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결과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우리가 현재 재배하고 있는 흰쌀인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 L.)의 조상종인 야생 벼 오리자 루피포건(Oryza rufipogon L.)의 종피, 즉 쌀알의 껍질이 붉은색이라는 데서 연구의 실마리를 찾았다.

재배종은 붉은 색소를 만드는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결과라고 가정하고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마침내 Rc 유전자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즉 DNA 염기서열 일부가 잘려나가 뒤쪽이 없는 짧은 단백질이 만들어져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서 색소가 없는 흰쌀이 나왔던 것. 그렇다면 인류는 왜 흰쌀 돌연변이체를 선발해 재배했을까?

조용구 교수는 “흰쌀은 붉은쌀에 비해 벌레를 잡아내거나 병충해로 망가진 낟알을 골라내기가 훨씬 쉬었을 것”이라며 “또 붉은쌀은 흰쌀보다 껍질이 단단해 요리하기가 더 힘든 것도 외면 받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01 이삭을 한 번 쭉 훑으면 왼쪽의 탈립성이 작은 품종인 니폰베어는 낟알이 그대로 붙어있는 반면 오른쪽의 탈립성이 큰 품종인 카살라스는 쉽게 떨어진다. 02 다양한 품종의 낟알. 붉은색은 모두 야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재배종이다.


적포도, 청포도 누가 원조?

최근 와인이 붐을 이루면서 포도 품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적포도 품종으로는 프랑스 보르도를 대표하는 남성적인 까베르네 소비뇽과 부르고뉴의 상징인 우아한 삐노 누아, 프랑스에서 들여왔지만 이제는 호주 와인의 대명사가 된 시라즈 등이 있다. 한편 백포도주를 만드는 청포도로는 ‘샴페인’의 재료인 프랑스의 샤르도네와 깔끔한 맛의 독일의 리슬링, 향이 풍부한 이탈리아의 모스카토가 떠오른다.
“적포도주는 색으로 마시고 백포도주는 향으로 마신다.” “적포도주는 육류와, 백포도주는 생선과 어울린다.”

와인과 관련된 이런 말을 보면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만드는 재료인 적포도와 청포도 역시 ‘포도’라는 이름만 함께할 뿐 서로 상당히 떨어진 과일처럼 느껴진다. 과연 그럴까? 포도나무에 대한 분자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청포도는 적포도의 돌연변이체다.

야생의 포도는 모두 흑자색이나 자색을 띠고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적포도에서 청포도가 나왔으리라고 추측해왔다. 실제로 최근 연구결과 청포도의 과실색은 붉은색이나 자주색을 띠는 색소인 안토시아닌을 합성하는데 관여하는 유전자인 VvMYBA2에 돌연변이가 생긴 결과임이 밝혀졌다.

안토시아닌을 함유한 과일은 짙은 색으로 동물들을 끌어들여 씨앗을 퍼뜨린다. 따라서 포도껍질에 안토시아닌을 만들지 못하는 돌연변이체는 야생이라면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돌연변이체를 발견한 누군가가 흥미를 느껴 정성을 들여 키웠을 것이고 그 결과 지금처럼 널리 퍼졌을 것이다. 현재 포도 품종은 7000가지가 넘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청포도다.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청포도를 재배했을까?

포도는 와인의 재료이므로 고고학적 유물에서 발굴된 와인의 흔적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와인은 기원전 3200년 고대 이집트에서 나왔는데 레드 와인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화이트 와인은 언제일까? 1922년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돼 엄청난 부장품이 출토된 고대이집트왕 투탕카멘의 무덤. 기원전 1333년 9살에 왕위에 올라 18세에 요절한 그의 무덤 속 부장품에는 암포라 26개가 들어있었다. 암포라는 손잡이가 둘 달린 일종의 항아리다.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로 암포라에 담겨진 내용물을 적었는데 해독 결과 6개의 항아리가 와인을 담고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로자 라무엘라-라벤토스 교수팀은 암포라 6개에 남아있는 잔여물을 채취해 그 성분을 분석했다. 진짜 와인이라면 포도의 주성분인 타타르산이 검출돼야 한다. 분석 결과 모두 타타르산이 확인됐다.

다음은 적포도주 색소 성분인 말비딘-3-글루코시드의 대사산물인 시린지산의 존재여부. 분석 결과 한 암포라의 시료에서만 시린지산이 검출됐다. 시린지산이 나오지 않은 나머지 다섯은 백포도주일 가능성이 높다.

라무엘라-라벤토스 교수는 “청포도가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버질이 이집트 마리우트산 청포도를 예찬한 문헌”이라며 “이번 발견으로 청포도의 재배역사가 그보다 훨씬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01 투탕카멘 무덤에서 출토된 암포라. 02 고대 이집트인들은 암포라에 내용물이 와인이라는 것과 공급업자의 이름까지 적었지만 와인색은 언급하지 않았다.


사과 조상은 체리만한 크기
 

중앙아시아의 야생 사과나무에서 딴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사과


“하루에 사과 하나면 의사가 필요 없다.”

오래 된 서양 속담이 말해주듯이 사과는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유기산이 풍부한 건강식품이다. 껍질째 먹을 수 있고 얼리지만 않으면 수개월간 보관할 수 있어 오래전부터 온대지방이나 냉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량이었다. 게다가 잼이나 식초를 만들고 술도 담글 수 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 라비크가 즐겨 마시는 술 ‘칼바도스’는 바로 사과로 만든 브랜디다.

이처럼 사과가 사랑받는 이유는 열매 하나가 충분히 크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크기 사과 한 개는 200~300g 정도다. 사과크기가 체리만하다면 먹기도 번거로울 뿐더러 상대적으로 과육의 비율이 낮아 같은 칼로리를 얻는데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탐스런 사과의 조상은 체리만한 크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열매가 큰 쪽으로 선택이 이뤄진 셈이다. 연구결과 특이하게도 선택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곰이었다.

곰이 즐겨 먹는 것이라면 꿀이나 연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과일도 좋아하는 편이다. 지난해 ‘사과 이야기’라는 책을 펴낸 영국 옥스퍼드대 베리 주니퍼 교수는 “오늘날 품종 이름이 2만 가지나 되는 사과는 단 하나의 야생종에서 비롯됐다”며 “이 종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나무에 열리는 사과는 우리가 흔히 보는 사과와 비슷한데 다만 크기가 좀 작다. 곰이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이 야생종이라는 것.

우즈베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지대에는 동서로 텐산산백이 펼쳐져 있는데 지형적인 영향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도 충분해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과일 나무가 많은데 사과만 해도 수십 가지의 야생종이 자생한다. 이들은 크기도 제각각이고 맛도 차이가 많다. 이들 사과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큼직하고 달콤한 종, 즉 재배사과의 조상종과 체리만한 사과가 열리는 야생종의 유전자가 매우 비슷했던 것. 이들의 관계를 연구하자 이 일대에 살고 있는 불곰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불곰은 나무에 올라가 달린 열매를 따먹거나 떨어진 과일을 갈퀴 같은 발톱으로 긁어모은다. 원래 육식성이었다가 잡식성으로 진화한 곰의 턱은 과일을 씹기에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구조다. 대충 어석어석 씹어 삼켜져 곰의 뱃속에 들어간 사과는 소장 대장을 거쳐 과육은 소화되고 씨는 배설물과 함께 땅에 뿌려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크기가 작은 사과는 제대로 안 씹혀 거의 온전한 채 배설된다. 사과를 비롯해 많은 과일들은 씨앗이 붙어있는 자리인 태좌에 씨가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질이 함유돼 있다. 따라서 온전한 채 배설된 사과에서는 씨가 발아하지 않는다.

한편 열매가 클수록 제대로 씹혀 과육과 태좌가 소화되면서 씨가 노출돼 배설된 곳에서 싹을 틔웠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열매가 큰 사과의 씨가 발아될 확률이 높았으므로 점차 사과가 커졌다고. 한편 곰은 단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달콤한 사과만 골라 먹었을 것이다. 결국 오랜 세월에 걸쳐 열매가 크고 달콤한 사과나무가 숲을 지배하게 됐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다양한 품종의 사과는 사람들이 재배한 결과지만 그 출발점은 곰의 노력 덕분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말이 있다. 올 가을, 사과를 한 입 베어물면서 이 속담을 떠올리기보다는 우리에게 이런 탐스런 선물을 안겨준 곰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사과 조상은 체리만한 크기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 김상민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농업학
  • 지구과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