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미국 필라델피아 의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치매에 걸린 미국 표현주의 화가 월리엄 어터몰렌(74)의 자화상 전시회였다. 어터몰렌이 치매와 싸우기 시작한 1995년부터 치매에 완전히 ‘점령’ 당한 2000년까지의 작품들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작품에는 뇌를 잠식당하는 한 인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어터몰렌이 그려낸 절망의 붓 터치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1996년작 ‘자화상1’에서 그는 두 눈에 공포가 가득 찬 표정을 화폭에 담는다. 1년 뒤인 1997년작 ‘자화상2’에서는 코와 눈이 평면으로 그려진 얼굴을 캔버스에 그려낸다. 이때 이미 어터몰렌의 공간 감각은 사라졌다.
병세가 깊어진 2000년에 그린 ‘지워진 자화상’에서는 일그러진 얼굴 외곽선과 부분적인 이목구비만 남은 형체가 힘겹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 어터몰렌은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다. 지금 그는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중증 치매환자로 살고 있다.
치매 앞에선 누구나 속수무책
예고 없이 찾아와 서서히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치매.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빼앗는 이 질병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야 하는 운명은 신체적 질병보다 더 큰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치매를 막거나 치료할 뾰족한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는 데 있다. 바꿔 말하면 치매 앞에선 누구든 속수무책이다. 누가 언제 치매에 희생될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치매가 자신을 피해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치매 환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 또한 엄청나다. ‘책을 많이 읽어라’ ‘사회활동을 즐겨라’처럼 뇌 기능을 돕는 생활습관을 실천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
치매는 어떻게 일어날까. 의학계는 얼마 전까지 치매의 발병 원인을 뇌 속에 쌓인 베타 아밀로이드로 봤다. 베타 아밀로이드는 정상인의 몸에서도 소량 만들어지는 단백질로 아직 정확한 기능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매 환자의 몸에서는 베타 아밀로이드가 과도하게 생성돼 뇌에 쌓이게 되고 이것이 기억과 학습 장애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알려진 상태다. 분해되지 않은 베타 아밀로이드가 뇌를 망가뜨린다는 말이다. 따라서 치매를 치료하려는 노력도 자연히 베타 아밀로이드를 요리하는데 맞춰졌다.
그러나 이 같은 통념을 깬 국내 연구자가 있다. 치매정복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서 교수는 1996년 베타 아밀로이드와 함께 C단 단백질이 치매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제기, 세계 의학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2003년에는 C단 단백질이 신경세포의 핵에 침투하는 과정과 세포핵 속으로 들어간 단백질이 독성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체계를 과학학술지 ‘파세브’에 발표해 치매 발병 원인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서 교수에 따르면 C단 단백질은 ‘Fe65’라는 단백질을 통해 신경세포의 핵 속에 침투한다. 핵 속에 침입한 C단 단백질은 ‘CP2’라는 단백질과 결합해 독성 유전자의 활동을 촉진한다. 이 같은 결합 메커니즘을 차단하면 치매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가 치매의 주원인으로 지목한 C단 단백질은 베타 아밀로이드보다 독성이 10배나 더 강한 물질이다. 뇌를 파괴하는 속도도 그만큼 빠르다. 때문에 C단 단백질의 역할과 결합 메커니즘을 규명한 서 교수의 연구결과는 치매에 대항할 약물을 만들 중요한 밑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마디로 서 교수가 치매를 제압할 ‘급소’를 찾은 셈이다. 한편 그는 지난해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치매를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치매 치료제개발의 또 다른 단초를 제시하기도 했다.
원인 물질의 독성을 제거하라
서 교수는 치매의 원인을 밝혀내면서 동시에 치매의 근본적인 치료방법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현재 개발 중인 치료제는 치매를 일으키는 물질의 독성 자체를 없앤다는 점에서 과거 선보인 치료제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오수유라는 한약재를 이용한 DHED, 인삼에서 추출한 성분을 이용한 MPC, 기억 항진제인 BT-11 등이 모두 치매의 원인을 뿌리 뽑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과거의 치매 치료제는 뇌 속 신경전달물질이 훼손되는 것을 부분적으로 억제하는 대증요법에 의존한다. 대증요법은 열병 환자의 체온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마에 올린 ‘물수건’에 비유된다. 열병의 원인은 치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만큼 연구단이 만들고 있는 치료제의 가치가 큰 셈이다.
개발 중인 치료제 중 하나인 DHED는 실용화 문턱에 와 있다.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이 눈앞이다. 임상실험에서 효과가 입증되면 수년 내 감기약 먹듯 치매 치료제를 복용할 날이 올 전망이다.
기능성 식품 등록이 추진되고 있는 BT-11은 뇌가 스트레스를 방어하는 능력을 높인다.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기능도 있다.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BT-11을 먹으면 기억력 항진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게 서 교수의 설명이다. 서 교수가 BT-11을 시판 절차가 긴 의약품이 아니라 기능성 식품으로 내놓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치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하루라도 빨리 열겠다는 의지다.
선행학습이 뇌 손상 일으켜
뇌 전문가이기 때문일까. 최근 서 교수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유아기의 선행 교육이 뇌 손상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어릴 때 억지로 공부를 하면 청소년기에 각종 행동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서 교수는 “유아기는 창의성과 인성을 기르는 시기다”라며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의 학습은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자라면서 부위별로 뇌가 발달한다. 언어능력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억지로 영어를 가르치는 건 스트레스만 줄 뿐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유아기부터 불고 있는 각종 조기교육 열풍에 대한 일침이다.
서 교수는 “지금과 같은 교육 풍토에서는 피교육자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남보다 먼저 배우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어렸을 때부터 선행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압박에서 부모들이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의단지기
기초의학 연구하는 대의(大醫)
요즘 이공계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머리 좋은 학생이 공대나 이과대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대척점에 의대가 있다. 최근 포스텍 수석 졸업생이 서울대 의대에 편입해 과학기술계를 우울하게 한 것처럼 의대는 우수 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노릇을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사회적인 지위가 매력이란 것이 의대 쏠림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서유헌 교수는 “우선 기초과학이 정말 비전이 없는지부터 살펴야 한다”며 “인생 전체를 단기적인 경제논리의 틀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의대 속의 기초 과학자’다. 서 교수가 의대에 재학하던 당시에도 임상의를 지망하는 학생이 많았지만 그는 달랐다.
서 교수는 “임상의로 평생 열심히 일해도 살릴 수 있는 환자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한다”며 “신약을 개발하는 기초의학을 연구하면 수백만 명 이상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이를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라는 말로 표현한다. 환자를 직접 대면하며 의사로서의 보람을 찾으면 소의, 사회에 봉사하며 폭넓은 사람에게 의료술을 펼치면 중의, 환자를 직접 만나진 않지만 많은 이들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신약을 개발하면 대의라는 얘기다.
기초의학에 대한 서 교수의 확신은 그의 아들이 화학과로 진학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주인공인 서원혁 박사는 현재 미국에서 박사후과정을 밟고 있는 촉망받는 연구자. 서 교수는 “아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 의대보다 기초과학 분야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고 말했다.
현재 서 교수는 서원혁 박사와 함께 나노 물질을 이용해 치매 치료제를 뇌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기초과학자 부자 간의 국제공동연구인 셈이다.
서 교수는 “요즘에는 의대 내에서 기초 의학을 지원하는 사람이 더 줄어들고 있다”며 “좋은 인재들이 이 분야에 매력을 느끼고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