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여인의 초상


0.....

평생 잊기 힘든 몇 개의 선이 있다.

여인의 초상……이라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 단순한 선들!

붓질하듯 수백 수천 단어를 집어 화가의 마음을 되살려야 하다니.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질 때까지 내가 겪은 일들을 밝힐 때가 온 것이다. 글짓기가 싫어서 미술대학으로 간 건 아니지만, 이 좋은 봄날 작가 흉내나 내며 책상머리에 앉을 줄은 몰랐다. 아니다, 그래도 글이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 여인의 마지막 초상 | 종이에 오일 파스텔, 34×45cm


1.....

죽음은 예고도 없이 온다. 몇 날 몇 시에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모로 편리하겠지.

그 분들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변명해도, 데이트 장소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거나 상견례 자리에 부모님을 모시고 왔던 남자들은 절대로 내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았다. 부고를 접했다고 곧바로 달려갈 이유가, 물론 내겐 없다. 그러나 최소한 일주일에서 최대한 몇 년 동안 함께 얼굴을 마주보았던 이들이 죽었는데 어찌 딴 짓부터 할 수 있으리.

두 눈 딱 감고 남자친구를 따라 서해안 대천 해수욕장까지 갔다가 총알택시를 대절하여 서울로 돌아온 적도 있다.

굳이 이유를 대라면 할 말은 있다. 알츠하이머…… 쉽게 말해 치매로 세상을 떠난 노인의 장례식장엔 무거운 피로가 내내 깔린다. 유족도 문상객도 발병 이전의 고인만 그리워한다. 나는 물론 유족이 아니지만, 그들이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척하는 고인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 발병 전의 모습도 소중하지만 병마가 덮친 후 그 병마와 맞서 싸운 고인을 몇 장의 그림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고인의 그림 자체를 무시하는 유족도 있다. 정말 이 그림을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고모나 삼촌이 그렸느냐고 따져 물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물론 그 그림은 고인의 작품이 틀림없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들의 그림을 사칭해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부고와 아홉 번째 남자친구를 맞바꾼 날이었다. 장례식장을 나와서 포장마차에 들러 매운 닭발에 소주부터 한 병 마셨다. 유족이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내 돈 들여 액자에 넣어갔던 그림을 집 앞 공터에서 불태웠다.

고인은 평생 비행기 조종사로 일했다.

젊어서는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았고 전역한 다음에는 항공사에서 여객기를 조종했다. 20년 동안 단 한 번의 작은 사고도 없었다. 발병 후 고인은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 심심산골로 들어갔다. 허공을 가르는 잠자리 날개만 보고도 눈물이 흘렀던 탓이다. 고인과 함께 석 달 동안 그림을 그렸다.

그는 좌우가 똑같은 모양에 집착했다. 문신이라는 조각가의 작품처럼, 별도 두 개 달도 두 개 머리도 두 개 코도 두 개였다. 그는 내게 펜으로 그린 ‘2학년 2반’이란 작품을 선물로 주었다. 기억도 선명하고 손에 힘도 남아 있던 여름날의 작품이었다. 2라는 숫자 두 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등을 대며 서 있었다. 자세히 보면 각 글자를 만드는 작은 글씨들이 가득했는데 그 글씨 역시 2라는 숫자 두 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등을 댔다.

놀라운 집중력의 결과였다. 왜 하필 제목이 ‘2학년 2반’인가요……라고 묻진 않았다. 무엇인가 그에게 답을 듣기보다 나 혼자 혹은 유족과 함께 오랫동안 고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편이 제법 아름다웠던 것이다.

불티가 밤하늘로 튀어 올랐다. 경찰관을 앞세운 사내 둘이 다가왔다. 서둘러 불을 끄고 일어섰다. 달밤의 불장난이라도 탓하러 왔나. 법으로 따지자면 분리수거를 해야 하겠지만 내가 치료한 환자의 그림들은 이상하게도 꼭 이렇게 태워 날리고 싶다. 술기운이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쳇, 그깟 벌금 내면 될 거 아냐.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감박사님이 보내셨습니다. 감석경 박사님 아시죠?”

2.....


| 2학년 2반 | 종이에 펜, 먹물, 20×27cm


감석경 박사와 아버지는 견원지간이었다.

서른 즈음에 다툰 후 25년 가까이 교유가 없었다. 감박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인체 유해 색소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일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 심한 일도 하셨던 분이니까.

미술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날부터 나도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다.
외동딸이 가업을 잇기 바랐지만 식품사업은 내 길이 아니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몇몇 기념할 일들이 생겼지만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식에도, 첫 개인전에도 어머니만 꽃다발을 사들고 왔다.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할 때 잇달아 비보가 날아들었다.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소천한 뒤 보름 만에 아버지가 비행기 창에 머리를 들이받다가 기절한 것이다. 어머니의 간병 덕분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병세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2년 꼬박 아버지와 지냈다. 무척 힘들었다. 액자고 화병이고 집어던지는 바람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림을 즐기던 어머니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떼어낸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그렇게 반년이 흐를 즈음 감석경 박사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출시한 식품들의 유해성을 사사건건 따졌기 때문에 이름과 얼굴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감박사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두툼한 볼 살 탓에 불도그를 닮은 감박사는 썰렁한 거실을 살피며 한 마디 했다.

미술치료를 해봐.

감박사의 충고 때문에 1년 남짓 강의를 듣고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딴 것은 물론 아니다.

아버지는 소천할 때까지 찰흙놀이를 무척 즐겼다. 처음엔 찰흙덩이를 던져댔지만 곧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미끈미끈한 찰흙의 감촉을 즐겼다. 두상을 여러 점 만들었는데, 모두 긴 혀를 입술 밖으로 쏙 빼냈다.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부위가 바로 혀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평생 식품회사를 경영한 사람다웠다.

허나 솔직히 말해 그 얼굴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딱 배트맨과 맞선 조커였다. 그 두상을 보다가 문득 미술치료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욕망을 끄집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3.....


| 아름답구나, 그 놈의 혀 | 점토. 10×10×25cm


감석경 박사 병원에서 재미없는 동영상을 연이어 보았다. 두 편 모두 대통령이 주인공이었다. 환경단체에서 함께 일한 인연 탓에 감박사는 대통령의 주치의로 발탁되었다.

먼저 기자회견. 날짜를 확인하니 내가 아홉 번째 남자친구와 입맞춤을 나눈 밤이다. 약혼식까지 손도 잡지 않을 숙맥인 듯싶어 극장에서 내가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 그 밤에 남한과 북한 정상이 서울에서 평양까지 고속전철을 놓는 데 합의했던 것이다.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선 두 지도자는 좌우로 비스듬히 마주보고 서서 정상회담 결과를 간단히 설명했다. 먼저 북쪽 대표는 풍문처럼 통 큰 연설을 했다. 미리 준비한 연설 원고를 보란 듯이 바닥에 떨어뜨리고, 당장이라도 평양에서 서울까지 질주하듯, 오른 주먹을 내질러가며 합의사항을 자랑했다.

이번에는 대한민국 최형채 대통령 차례였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 역시 연설 원고를 펼쳤다가 접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시 한 수를 암송했다.

누굴 보듬어 안을 만큼
팔이 길었으면 좋겠는데
팔이 몸통 속에 숨어서

나오기를 꺼리니
손짓도 갈고리마저 없이

견디는 날들은 끝도 없는데
매사에 다 끝이 있다 하니

기다려 볼 수밖에
한 달 짧으면
한 달 길다 했으니

웃을 수밖에
커다랗게 웃어

대통령은 여기까지 외우다가 멈췄다. 다음 시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꼭 감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웅얼거렸다.

“커다랗게 웃어 웃을 수밖에 커다랗게 웃어…….”

대통령은 눈을 살며시 떴다. 고개를 돌려 비서관들 쪽을 바라보았다. 출입문에 선 비서관의 입술이 둥글게 모였다. 그 입술에서 힌트를 얻은 대통령이 다시 암송을 이었다.

몸살로라도 다가가
팔 내밀어 보듬어 볼 수밖에

4.....

감석경 박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대통령의 건망증을 지적하시려고 절 부르셨어요?”

감박사가 CD를 바꿔 끼며 되물었다.
“대통령님 별명이 뭔 줄 아나?”

내가 치료하는 노인들 별명도 기억하기 바쁘다.
“여럿 있지만 문장형 하나와 단어형 하나가 제법 유명하지.”

감박사는 대화도 문어체로 한다. 문장이면 문장이지 형은 무슨 형. 수수께끼는 내 체질에 맞지도 않다.
“별명 가르쳐주려고 부르신 거예요?”

이번에도 동문서답이다.

“숫자는 전부다.”
“숫자는 전부다? 무슨 별명이 그래요?”

“소수점 아래까지 시시콜콜 따지시거든. 계산이 딱딱 들어맞지 않는 조직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 대통령의 철학이셔. 국정보고를 할 때마다 장관들이 여간 곤욕을 치르는 게 아니란다. 중요한 지표들을 외우느라 밤을 샐 지경이야.”

“또 하나는 뭔가요?”
“Backspace!”

감박사는 아예 수첩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대통령님이 늘 말씀하시길, 이건 나폴레옹을 약간 흉내 낸 것이긴 한데, 훈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볼게…… 내 사전에 Backspace는 없습니다! 나는 키보드를 사면 가장 먼저 Backspace 키부터 떼어냅니다.

대통령은 결코 실수하면 안 됩니다. 잘못을 깨닫고 되돌아가서 고치는 것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할 짓이 아닙니다. 오류를 발견하는 순간 이미 상황은 종료된 다음입니다. 후회하고 고칠 일이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멋지지?”

감박사와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었다. 실연당한 밤에는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우는 편이 옳다. 숫자가 전부인 깐깐한 대통령, 키보드에서 Backspace 키만 떼어내는 괴짜 대통령이 나랑 무슨 상관이람.

“이상한 일이지. 너도 관찰력이 좋으니까 봤겠지만, 대통령이 그 시의 마지막 두 행을 잊으셨어. 그뿐만이 아니라 ‘커다랗게 웃어 웃을 수밖에 커다랗게 웃어’ 이걸 Backspace 키 누르듯 반복하시더라고. 이 시, 그러니까 김지하의 ‘사랑’은 대통령님이 무려 89번이나 암송한 애송시야. 단 한 차례도 실수하신 적이 없어.”

“나무에서 제대로 떨어졌네요, 뭐.”
감박사가 말꼬리를 잡아챘다.

“맞아. 보통 사람이라면 재수 없다 여겼겠지만 대통령님은 그 밤 당장 날 찾으셨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야. 진찰을 했지만 미열 외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지. 시를 잊었다고 뇌 촬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간단하게 몸살약과 비타민제를 처방했어. 헌데 닷새 후 대통령님이 다시 날 부르셨지. 그리곤 ‘로봇레스토랑’이란 제목의 CD와 함께 팔꿈치에서 뜯겨 나간 로봇 팔 하나를 보여주시더군.”

“로봇 팔이라고요?”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어수현
  • 김탁환 교수 · 소설가

🎓️ 진로 추천

  • 미술·디자인
  • 심리학
  • 의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