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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LUCA). 누군가의 이름처럼 들리는 이 단어는 ‘모든 생명의 공통 조상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을 줄인 표현이다. 인간, 초파리, 메타세쿼이아, 아메바 등 모든 생물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날 이론적인 최초의 생명이 루카다. 루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과학자들은 생명 현상 중 무엇이 먼저 시작됐을지를 끊임없이 의논하며 답을 찾고 있다. 이 파트에서는 최초의 생명에 관한 유력한 가설을 검토해본다.

 

 

“단순히 유기 물질이 모여있다고 해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유기 물질이 최초의 생명이 되려면 극복해야 할 중간 단계가 많아요.”

 

윤환수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생명의 기원을 3단계로 나눈다. 첫째 단계에서는 간단한 유기물이 합성돼야 한다. 둘째로, 이 유기물이 서로 합쳐져 훨씬 거대한 고분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지질이 모여 세포막을, 핵산이 모여 RNA와 DNA를, 아미노산이 결합해 거대한 단백질 덩어리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로 이렇게 만들어진 고분자가 조화를 이뤄 생명 현상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최초의 생명 ‘루카’가 탄생한다.

 

문제는 셋째 단계다. 윤 교수는 “무기물에서 간단한 유기물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더 복잡한 고분자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실험적으로 증명이 됐다”며, “하지만 이 물질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여 루카를 탄생시켰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모든 톱니바퀴가 모여야 작동하는 손목시계처럼, 세포막과 유전 물질, 단백질 효소 등이 모여 한꺼번에 작동해야 온전한 생명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루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생명 현상이 먼저 일어났을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생명은 ‘막으로 외부와는 구분되는 공간 내에서 영양분을 분해하고 만드는 대사 작용을 하고’, ‘유전 물질이 있어 재생산을 한다’. 이중 대사 반응이 가장 먼저 일어났으리라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런 ‘대사주의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생명은 열수분출공에서 시작된

화학 반응으로 탄생했을 것”

 

생물이 외부의 화학 물질을 받아들여 분해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에너지를 이용해 새로운 화학 물질을 만드는 과정을 통틀어 ‘대사 활동’이라 부른다. 로버트 샤피로 전 미국 뉴욕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생물학자들은 이런 대사 활동이 생명 출현의 첫 단계라 생각한다. 몇 가지 기본적인 대사 활동이 자연적으로 이뤄졌고, 이를 통해 고분자가 만들어지고 쌓이면서 루카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 대사 활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여기는 유력한 장소는 심해의 열수분출공이다.

 

열수분출공은 뜨거운 물과 가스가 솟아 나오는 굴뚝형 지형이다. 지층 사이로 들어간 바닷물이 지각 아래에서 가열돼 지각의 여러 화학 물질과 함께 뿜어져 나온다. 열수분출공은 1976년 처음 발견됐을 당시부터 생물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햇빛 한 점 없는 심해였지만, 열수분출공에서 올라오는 화학물질을 먹고 사는 생명체들이 풍성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3년 미국 워싱턴대 존 버로스 교수팀은 열수분출공에서 생명이 시작했다는 가설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열수분출공에서 고열에서도 생존하는 고세균 무리를 찾아냈는데, 이들의 DNA를 분석하니 지구 생물 중 가장 오래된 계통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열수분출공 가설은 착실히 증거를 쌓아왔다. 열수분출공은 황 화합물 등 최초의 생명체가 에너지를 얻기 좋은 화학 물질이 풍부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온이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에 적당한 조건이다. 여러 고분자 유기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란 의미다. 여기에 더해, 열수분출공 주위를 둘러싸며 만들어지는 굴뚝에는 폭 1mm가 안 되는 매우 미세한 틈이 가득하다. 이 틈은 여러 유기물과 유전 물질을 담아둘 수 있는 세포 내부처럼 작용할 수 있다.

 

열수분출공의 이런 환경에서 대사 반응이 먼저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대사주의자들의 생각이다. 2016년 빅토르 소조 당시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연구팀은 염기성 열수분출공에서 올라온 염기성 물질들이 상대적으로 산성인 굴뚝 바깥과 구분되는 환경을 만들고, 이 차이로 인해 현재 세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대사 활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doi: 10.1089/ast.2015.1406

 

염기성 열수분출공 가설은 생명의 기원을 찾는 지금까지 나온 유력한 가설 중 하나지만,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열수분출공과 같은 고압 고온 환경에서는 유전 물질인 DNA와 RNA가 오랫동안 안정한 상태로 유지되기 힘들다. 자신의 형질을 후대에 물려주고 번식하는 데 필요한 유전 물질은 생명 현상의 또 다른 핵심 아닌가. 그래서 또 다른 과학자들은 유전 물질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생각하는 생명의 열쇠는 유전과 촉매 반응을 동시에 일으킬 수 있는 물질, ‘RNA’다.

“잔잔한 물가에서 만들어진 RNA가

유전・효소 작용 등 생명 역할 했을 것”

 

“화학 대사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들도 어떤 화학 대사가 가장 필수적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김효중 미국 응용분자진화재단 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1980년대 등장한 ‘RNA 세계’ 가설의 지지자로, 심해 열수분출공이 아닌 현무암질 모래가 쌓인 호수의 물가에서 생명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명체의 핵심 물질은 DNA, RNA, 단백질 세 가지다. 단백질로 이뤄진 효소는 대사 반응을 조절한다. 그 단백질의 설계도인 유전 정보는 DNA에 들어있다. D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그 중간 단계인 RNA를 거쳐야 한다. DNA와 RNA와 단백질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흐름을 생명의 중심 원리라 부른다.

 

여기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생긴다. 세 가지 물질 중 무엇이 제일 먼저 나왔을까 하는 질문이다. RNA 세계 가설에서 주인공은 RNA다. 1980년대, 단백질처럼 효소 작용을 하는 RNA인 ‘리보자임’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RNA가 DNA와 단백질보다 먼저 나타나, 둘 모두의 역할을 맡아 북도 치고 장구도 치며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RNA 세계 가설이다.

 

RNA 세계 가설의 한계는 RNA가 만들긴 어렵고 분해는 쉬운 물질이라는 점에 있다. RNA를 이루는 리보스나 염기 분자는 아미노산만큼 쉽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유전학자 제럴드 조이스는 RNA가 “생명의 기원 연구자들의 악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연구원도 “대사주의자들은 RNA가 스스로 만들어지기 힘드니 유전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대사 활동이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RNA가 생각한 것보다는 만들어지기 쉬웠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2022년, 김 연구원이 참여한 응용분자진화재단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우주생물학’에 발표한 연구도 그중 하나다. doi: 10.1089/ast.2022.0027 연구팀은 RNA의 구성 물질인 뉴클레오사이드 삼인산을 원시 지구의 지각에 있었을 현무암질 유리와 섞고, 반응을 관찰했다. 그러자 염기가 100~300개 이어진 RNA 사슬이 만들어졌다. 긴 RNA 가닥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 연구원은 생명 탄생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앞선 실험에서처럼 RNA가 합성되려면 물이 있는 조건과 적당히 마른 조건 둘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처럼 RNA가 생명의 기원이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호수 근처가 생명이 발생하기 적당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수에는 RNA가 만들어질 수 있는 유기물이 농축돼 있고, 호숫가에서 물이 증발하며 마른 조건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거죠.”

 

생명의 기원,

끝없이 탐구하게 될 문제

생명의 기원은 본질적으로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생명 탄생 당시의 기록이 화석 증거로 남은 것도 아니거니와, 거대한 우연의 산물이라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을 찾기 위한 노력 덕에 20세기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21세기 들어서는 우주생물학이나 세포막과 DNA를 합성해 직접 인공 생명을 만드는 합성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 분야가 등장했다.

 

나아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실험적 증거들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도 고민하게 만든다. 유리와 밀러의 실험은 생명의 기원을 종교의 영역에서 생물학, 화학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운석과 소행성에서 발견된 유기 물질은 천문학자들에게 생명 발생이 어쩌면 우주 전체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통찰을 가져다줬다. 유기 물질을 분석하고 실험할수록, 인간의 자리는 축복받은 지구 최고의 존재에서 루카에서 진화한 후손 중 하나로 점점 내려온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꾸준히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김 박사는 이런 질문이 “당장의 실용적인 이익은 없을 수 있지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호기심 중 하나”라고 말한다. 생각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생명의 기원은 끝없이 탐구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한국 연구자를 많이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며 “국내에도 생명의 기원을 파고드는 과학자가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2023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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