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생 안기억 군은 시험 문제지를 받아 든 순간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뒤쳐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눈에 보이는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다. 옆에 앉은 새내기는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답안지를 적기에 바쁘다. 생각해보면 안 군도 입대 전에는 기억력이 왕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기억력이 갑자기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력은 신경회로가 강화된 상태
KAIST 생명과학부 시냅스생성 연구실의 김은준 교수는 “시냅스(synapse)의 연결성에 해답이 있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두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에서 신호전달의 효율이 높고 신경세포 간의 결합이 강화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시냅스가 신경세포 사이에 신호를 전달하지 못하거나 신호를 전달받는 수용체가 제 구실을 못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
김 교수는 시냅스에 관여하는 단백질 연구를 통해 정신지체나 언어장애 등 다양한 뇌질환의 원인을 밝히고 있다. 시냅스를 튼튼하게 유지하려면 두 신경세포가 가까이 연결돼 있어야 한다. 즉 신경세포 말단에서 수상돌기로 신호를 전달하는 ‘다리’가 필요한 셈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신경세포접착단백질이다.
하나의 신경세포는 1000개에서 많게는 10만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된 시냅스를 갖고 있다. 비록 0.5~1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의 좁은 크기지만 신경세포접착단백질이 잘못되면 A라는 목적지로 가야할 신호가 B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 ‘뉴로리긴’(neuroligin)이라는 신경세포접착단백질이 잘못되면 정신지체나 자폐증이 생긴다.
신호를 전달받는 수상돌기에는 가시같은 것(spine)이 붙어있다. 그런데 가시의 모양이 일그러지면 신호가 정체된다. 마치 건물이 붕괴돼 사람이나 물건이 갇힌 꼴이다. 사실 신경세포가 만들어질 때부터 가시가 돋아난 것은 아니다. 신경세포가 살아있는 동안 가시는 생성과 소멸을 수없이 반복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기억할 때는 시냅스가 활발히 만들어지므로 시냅스 구조가 허물어지면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치매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이에 김 교수는 가시의 생성과 모양을 유지하는 단백질인 액틴을 조절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미끼에 줄줄이 낚이는 단백질
“하나의 단백질을 당기면 그 단백질에 연결된 다른 단백질이 낚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지렁이를 송사리가 물고 송사리는 붕어가, 붕어는 메기가 연이어 무는 식이죠.”
과학자들은 시냅스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수백에서 수천 가지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만약 단백질을 하나씩 찾아내야 한다면 고단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시냅스에서 가장 잘 발현되는 ‘PSD-95’란 단백질을 미끼로 사용해 여기에 연결된 단백질을 낚고 있다.
김 교수가 단백질 PSD-95를 신경세포에 넣자 액틴의 뼈대를 형성하는 ‘섕크’(Shank)와 ‘IRSp53’이란 단백질이 걸려들었다. 섕크 단백질에 이상이 생기면 필란-맥더미드 증후군이 생기는데, 이 증후군에 걸린 아이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능도 정상아이보다 현저히 낮다. 일반인에게는 이처럼 생소한 질병을 연구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2004년 필란-맥더미드 증후군에 걸린 자녀를 둔 부모 모임의 대표는 “당신의 연구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때의 희망과 같습니다”라며 “더욱 열심히 연구해 달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내왔다.
올해 4월에는 ‘살름’(SALM)이라는 단백질을 발견해 신경과학 권위지 ‘뉴런’에도 게재했다. 그동안 알려진 뉴로리긴이란 단백질은 시냅스를 만들고 살름이 시냅스를 작동시킨다는 사실을 김 교수가 세계 최초로 규명한 것이다.
박사후 연구과정의 최정훈 연구원은 “시냅스생성의 메커니즘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가 많다”며 시냅스의 미로를 탐험하느라 더위도 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