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唐)나라의 역사책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서는 발해의 영토가 5경(京) 15부(府) 62주(州)라고 설명한다. 그 15부 중의 하나가 바로 발해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말의 특산지로 유명한 ‘솔빈부’(率賓府)다. 지금으로 따지면 연해주 우수리스크 일대다.
솔빈부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강이 있다. 이 강이 ‘솔빈강’이다. 지금은 러시아식 명칭인 ‘라즈돌리나야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해 7월 취재팀은 솔빈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중국 국경을 향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발굴하는 발해 유적지인 ‘체르냐치노 산성’에 가는 길이었다.
4 년째 공동묘지 발굴 중
2003년부터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와 러시아 극동기술대 니키친 교수는 공동으로 체르냐치노 산성을 발굴해왔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체르냐치노 발해산성은 그 규모가 매우 크다. 각종 군사 시설, 행정 시설과 주민의 거주지만 포함해도 가로 1200m, 세로 800m에 이른다.
체르냐치노 산성은 군사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솔빈강 하구를 통해 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인접한 동해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콘스탄치노프카 발해산성이, 서쪽으로는 시넬리코보 발해산성이 마치 요새처럼 둘러싸고 있다.
정석배 교수와 니키친 교수팀은 체르냐치노 산성 안의 여러 구역 중에서도 고분 구역을 집중 발굴하고 있다. 쉽게 말해 발해의 공동묘지가 있던 지역이다.
공동묘지를 제일 먼저 발굴하는 이유는 뭘까. 고분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유물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크다. 또 여러 무덤에서 유물이 한꺼번에 많이 발견되면 유물이 동시대에 사용됐다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에 대한 정보도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이나 북한에서 발해 유물을 발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체르냐치노가 중국 변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체르냐치노의 유물 발굴을 통해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을 발해 유물을 추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이번 고분 발굴은 발해 시대의 고분으로는 최초이자 최대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취재팀은 체르냐치노 산성의 고분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발굴된 무덤이 발해 민간인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 병사의 묘라는 것이었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청동패식(허리띠 장식)에서부터 철제 화살촉, 버클, 갑옷 각편, 철제 단검 등 주로 발해의 병사가 쓰던 물건이었다.
정석배 교수는 “2004년에는 장군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석실분 2기를 발굴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정 교수에게서 들었는데, 2005년에도 발해 병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42기나 발굴했다고 한다.
환옥(옥장신구), 청동방울, 은장신구와 토기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청동방울 안에는 석재 방울이 있어 방울을 흔들었더니 여전히 소리를 냈다. 철제 단검은 크기가 작고 칼날 끝이 둥그스름했다. 정석배 교수는 “모양으로 보아 공격용이라기보다는 의료용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호한 사방 5000 리
당시 발해의 뿌리를 취재하던 필자의 눈에 들어온 유물은 토기였다. 특히 고구려계 발해 토기, 발해 토기, 말갈계 토기 이렇게 3종류가 한 무덤에서 발굴돼 호기심을 자극했다.
고구려계 발해 토기는 색깔이 회색으로 태토가 부드럽고 물레로 성형한 형태였다. 반면 말갈계 토기는 붉은색으로 흙 입자가 거칠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좌우 비대칭인 경우가 많았다.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종류의 토기가 같은 고분에서 발굴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석배 교수는 “발해 주민이 두 토기를 모두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말갈계 토기가 다량 발굴되는 흑룡강 유역에서 체르냐치노 산성 고분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시대, 같은 종류의 말갈계 토기가 나온다면 흑룡강 유역이 발해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아직도 발해의 영토에 대해서는 ‘신당서’에 남아 있는 ‘사방 5000리에 달한다’는 구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구절은 경계선을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물 발굴과 같은 과학적 조사를 통해 발해 영토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의 수를 토대로 계산하면 체르냐치노 산성 안에는 약 3500기의 무덤이 있다. 이제껏 발굴된 고분은 그 중의 1%를 조금 웃도는 40여기에 불과하다. 체르냐치노 산성의 고분 발굴은 지금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다.
지난 6월 정석배 교수팀은 다시 체르냐치노 산성으로 떠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발굴단은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발해의 유물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올해는 또 어떤 유물을 발굴해 세상을 놀라게 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대조영의 부활
지난 1년 동안 발해라는 주제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이 프로그램은 EBS에서 지난 6월 방영됐다). 필자가 선택한 지역은 ‘두만강에서 흑룡강까지’라는 연해주였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발해관이 크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연해주의 발해 역사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발해의 주체와 영토에 관해서는 세 나라 사이에 공통된 학설이 없다. 각 나라의 입장에 따라 학설을 정리했을 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언제부터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생각했을까. 역사적으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니 말이다.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가 대표적인 예다.
최근 들어 한국이 발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이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부터 한국이 발해를 포함한 북방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발해의 뿌리를 좇아온 필자에게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종의 우리 역사 흔들기로 보인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던 만주라는 역사적인 무대를 감추고, 만주에 살았던 고구려인과 발해인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한정돼 있지만 우리 역사 중심의 한 축이 만주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고구려의 건국을 다룬 사극 ‘주몽’이 인기리에 방송 중이다. 9월 초에는 발해의 건국 시조를 극화한 ‘대조영’도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발해 등 우리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드라마의 인기가 북방사에 대한 연구로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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