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나 베트남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의 가장 큰 불만은 밥이다. 푸슬푸슬 흩어지고 입 안에서 맴돌며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인디카 계통에 속하는 이 쌀은 세계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무시 못 할 쌀이다.
사실 우리가 밥맛을 따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맛이야 어찌됐건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점차 나아진 식생활은 밥맛에 눈뜨게 했다.
하지만 밥 안 먹고는 못사는 우리나라를 다국적 기업이 그냥 둘리 없다. 시장개방을 확대하려고 매일 초인종을 누르니 문은 점점 더 크게 열릴 것이다. 그럼 우리가 맞설 경쟁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기능으로 수출하는 우리쌀
“홍국미(紅麴米)로 지난해 6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습니다. 주로 일본에 수출하죠.” (주)에프엔피의 김신제 대표는 시장개방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쌀을 수출한다. ‘붉은 누룩’이라는 뜻의 ‘홍국’은 반자자낭균과에 속하는 홍국균(Manascus pilosus)을 넣어 발효시킨 누룩으로, 홍국에 들어있는 천연물질(Monacolin-K)은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고지혈증을 예방하는 효과로 의약품으로 세계에 판매되고 있다. 홍국미는 홍국균을 밥쌀에 배양해 만든 기능성 쌀이다.
서울대 고희종 교수가 개발한 거대배아미는 벤처기업 (주)신지를 통해 지난해 6억 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체 영양소의 80% 이상이 모여 있는 쌀눈을 크게 키운 거대배아미는 돌연변이 육종기술이 핵심이다. ‘일품벼’라는 벼에서 추출한 돌연변이를 육종시켜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다. 거대배아미는 일반벼보다 가바(GABA, Gamma-Amino Butryric Acid) 함유량이 높다. 뇌세포 신경전달물질인 가바는 뇌세포 대사를 촉진하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쌀의 변신은 다이어트까지 이어진다. 2003년 아주대병원 이관우 박사는 흥미로운 임상실험을 했다. 당뇨병과 비만환자들을 대상으로 특수쌀을 먹여 그 효과를 검증한 것이다. 그 결과 당뇨병 환자에게 있어 혈청 인슐린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비만 환자에게서는 체질량지수(BMI)와 중성지방(TG)가 현저하게 낮아졌다. 한 달 정도 먹으니 ‘살이 빠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 쌀이 바로 다이어트쌀인 ‘고아미2호’다. 소화되지 않는 식이섬유인 ‘헤미셀룰로스’(hemicellulose)의 함량을 늘려 영양분이 몸에 쌓이는 것을 막는 원리다. 작물과학원 황홍구 박사와 농촌개발연구소 이성현 박사는 ‘고아미2호의 효능과 이용’에 관한 논문으로 일본에서 열린 국제동맥경화학회에서 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성이 만들어낸 경쟁력
기능성 쌀의 품종 개발은 돌연변이 육종법을 따른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형질을 얻으려면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한다. 자연 돌연변이의 경우 1백만분의 1정도 확률이라 거의 찾아내기가 불가능하고 특정한 방사선이나 화학물질로 처리해 인공돌연변이체를 만든다. 고아미2호의 경우 MNU (N-methyl-N-nitrosourea)라는 유기물질을 사용했다. 인공돌연변이도 새로운 형질을 찾아낼 확률은 1000분의 1 밖에 되질 않고 이를 다시 교배 번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쌀 시장 개방에 맞서 내수시장 경쟁력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대량 생산하는 외국쌀과 가격으로 승부할 수는 없다. 결국 경쟁력은 밥맛이고 비결은 고품질 쌀 생산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년간의 연구결과 모두 242품종을 개발했다. 최근에 개발한 품종인 고품벼, 삼광벼, 풍미벼, 운광벼는 작물과학원이 평가한 결과 일본 최고 품종인 고시히카리보다 더 우수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는 품종의 유전적 특성을 밝히고 일일이 교배시켜 세대를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품종 하나를 만들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정성’이 필요하다. 이는 유전 특성 해석, 형질전환, 교배 번식에 관한 생명공학 기술이 모두 뒷받침돼야 한다.
米를 완성 한다
쌀맛을 내는 비결은 우수한 품종뿐만 아니라 수확 후 관리도 중요하다. “현미를 덮어 싼 미강층을 제거하고 쌀에 남아 있는 미분을 없애며 색체선별을 통해 가장 좋은 품질의 쌀만을 골라냅니다. 그렇게 완성한 쌀을 완전미라고 하지요.” 한국식품연구원 쌀연구단의 김훈 박사는 RPC(Rice Processing Complex, 미곡종합처리시스템)가 도입돼 2000종이 넘는 브랜드쌀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RPC는 수확한 벼를 건조, 저장, 도정하여 제품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자동화한 시설로 현재 전국 328개소에 설치해 운행 중이며, 중국, 인도, 필리핀 등에 수출하고 있다.
맛을 내는 기술은 저장에서 시작한다. 벼는 저장온도가 낮을수록 미생물에 의한 품질저하가 적고 발아율이 높게 유지돼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때라도 같은 맛을 내는 쌀을 생산할 수 있다. 벼는 저장 탱크인 사일로(silo)에 담아두는데, 저온으로 유지하기 위해 곡물냉각기를 사용한다. 일종의 에어컨으로 사일로에 담아 논 벼층 내부로 차가운 바람을 불어넣어 공기가 벼층을 통과하면서 대류에 의해 빠르게 온도를 낮춘다. 400톤의 벼를 하루 만에 저온으로 유지시킬 수 있다.
미분을 제거하는 연미기술과 불량미를 제거하는 색체선별 기술 역시 완전미를 만들어내는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현미에 딱딱하게 층을 이루는 미강을 제거해 백미를 만들어도 표면에는 미분이 남아있다. 작물과학원 품질관리과 김덕수 박사는 “미분이 많으면 쌀의 품질과 맛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미강을 제거한 백미에 수분을 뿌리고 강하게 회전시켜 쌀과 쌀끼리 부딪히면 마찰력이 생겨 미분이 제거되고 강제 흡입해 걸러낸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씻는 것도 미분을 제거해 밥맛을 좋게 하기 위함이다.
완전미를 만들기 위한 RPC의 마지막 기술은 색체선별기가 담당한다. 보통 집에서 먹는 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끔 탁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색체선별기는 이런 탁한 쌀을 제거한다.
(주)대원GIS의 한기동 박사는 “마치 과속차량을 단속하는 속도계와 같다”고 했다. 쌀을 미끄럼 태우듯 일정한 각도로 내려 보내고 끝부분에서 떨어지는 쌀의 모습을 CCD카메라 찍은 다음 불량으로 확인된 쌀은 고압배출기(air ejector)로 쏘아 분리시킨다.
야생에서 찾은 교훈
1906년 권업모범장이 있었던 자리인 작물과학원의 시험장 한편에는 다양한 품종의 벼 사이에 거대한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볍씨가 맺혀있다. 이것도 벼란다. 작물과학원 강경호 박사는 “야생벼의 유전자를 이용해 병해충 저항성을 늘리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잡초 같죠”라며 미소를 짓는다. 야생벼는 그야말로 우리 땅에 마구잡이로 자라는 풀이다. 보살펴 주는 농부가 없으니 스스로 해충들을 막아내는 성질을 유전적으로 타고 났다. 이런 유전자를 도입해 병해충을 스스로 막는 품종을 만든다는 계산이다.
시장개방이 점점 확대되는 이때 야생벼를 이용한 연구는 꼭 우리 모습을 닮았다. ‘신토불이’라는 말로 야생벼를 무작정 먹는 때는 이미 지났다. 벼에서 유용한 유전 성질을 뽑아내듯 우리가 가진 장점을 끄집어내 경쟁우위에 설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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