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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그린 지도, 우주 담은 시계

1만원 속의 과학 유산

내년부터 사용할 새로운 1만원짜리 지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1월부터 사용된 5000원짜리 지폐처럼 크기가 작아지고 그림도 달라졌다. 인물초상은 세종대왕 그대로지만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용비어천가를 새로 포함시켰고 배경으로 창호무늬를 사용했다.

뒷면에 있던 경회루는 사라지고 국보 제228호인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제230호인 혼천시계 그리고 보현산천문대에 있는 광학천체망원경이 들어갔다. 세종 때 천문학과 같은 과학기술이 발달했음을 강조하고 앞으로 과학기술 발전이 국가의 초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 태조 때인 1395년에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하는 돌 천문도의 탁본을 가지고 만든 별자리 그림이다. 돌로 만든 원본 천문도는 원래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란으로 인해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탁본을 보관했던 사람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바쳐 이를 토대로 다시 돌에 새겨서 만들었다.

동그라미에 담은 별자리

그 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많이 훼손됐다. 그래서 숙종 13년인 1687년에 다시 하나를 더 만들었다. 두 개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현재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 이름 그대로 하늘의 모습(天象)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만든 그림이다. ‘차’라는 것은 경도에 해당하는데 사계절의 하늘을 12개로 나누어 구분했다. ‘분야’라는 것은 하늘의 영역이 땅의 영역과 1대 1 대응을 이룬다고 여긴 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땅 위의 어떤 나라에 대응하는 하늘의 영역이 있어서 하늘에 어떤 조짐이 나타나면 대응된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생각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천문도를 비롯한 몇 가지 정보가 들어있다. 가운데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는 1467개의 별과 282개의 별자리를 넣었고, 그 아래에는 달의 위치를 중심으로 별자리를 28개로 나눈 28수(宿)를 기록했다. 그 밖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게 된 경위와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태조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오래된 탁본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별들의 좌표와 차이가 컸다. 입춘날 저녁 정남쪽 하늘의 별자리가 탁본에는 현재 겨울철 별자리인 묘수(昴宿, 플레이아데스)로 기록됐는데, 1395년 당시에는 현재 가을철 별자리인 위수(胃宿, 양자리)였다고 한다. 이 차이를 보정하는 계산은 당시 국립천문대였던 서운관의 수장인 유방택이란 천문학자가 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A1, A2 : 12차에 해당하는 별자리 각도와 12분야에 대응하는 나라 이름을 새겼다.
B, C : 해와 달에 관해 설명했다.
D : 24절기별로 저녁과 새벽 정남쪽 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
E : 동그라미 안에 별을 새기고 선으로 이어 별자리를 나타냈다.
F : 테두리에는 황도12궁과 대응하는 고대 중국 나라 이름(분야)을 새겼다.
G : 우주의 구조에 대한 고대 중국의 이론을 정리해 놓았다.
H : 별자리 28수의 좌표를 새겨 놓았다.
I : 제작 경위를 설명해 놓은 권근의 천문도설이다.
J : 제작 당시 천문대인 서운관 소속의 관리들 명단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천문관련 그림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은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1호분에 있는 벽화로 가운데에 북두칠성이 보인다.


원본 천문도는 고구려 때 제작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고구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탁본이 평양성에 있었고, 별의 좌표가 오랜 동안 세차운동으로 많이 변했다는 점을 들어 원본 천문도는 고구려 때 것으로 추측한다. 제작시기를 알기 위해 현대 천문학을 동원해 분석한 결과도 이러한 추측을 지지해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조선의 지도층들이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과연 고구려에서 이러한 놀라울 만큼 정밀한 천문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가능성은 유물들이 증언해준다. 4~7세기 동안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벽화 103기 가운데 24기에 천문 관련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점은 고구려 때 천문지식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또한 7세기말에 만들어진 일본 나라현에 있는 기토라 고분 속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천문도 벽화가 발견됐는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기토라 천문도의 별들을 관측한 위도는 39도로 계산됐다. 고대 국가의 천문관측은 수도에서 이뤄졌으므로 이 위도에 수도를 둔 나라에서 천문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북위 39도에 있는 나라의 수도는 평양이 유일하다.
 

기계시계의 구조와 원리


중력에서 진자의 등시성까지

1만원권 뒷면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앞에 놓인 유물은 조선 현종 때인 1669년 송이영이라는 과학기술자가 만든 혼천시계의 일부다. 혼천시계는 나무 상자로 돼있는 시계 부분과 시간에 따라 지구와 천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혼천의 부분으로 구분한다.

1628년 여진족의 지도자인 누르하치는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했다. 임진왜란으로 혼란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임금인 인조가 직접 항복의 표시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다. 성리학의 위계질서가 바탕을 이루던 조선에서 임금과 지도층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는 세계적으로 저온현상이 일어났던 소빙기로 천재지변이 잇달아 민심이 흉흉했다. 이에 지도층들은 예의를 강조하는 주자학을 발달시키면서 왕의 권위를 높여야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을 정책적으로 발전시켰다.

혼천시계는 당시 서양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기계시계인 자명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기계시계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해시계와 물시계가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다. 이미 원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은 매 시간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를 만들었고, 유럽에서는 14세기 초반 대형 기계시계를 도시 광장에 세웠다. 기계시계는 추를 끈에 매달아 막대에 감아 놓고 추가 내려오면서 균일하게 돌게 만드는 구조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82년 진자운동은 추의 무게와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해 추시계를 만들 수 있는 원리를 알아냈다. 하지만 추시계를 직접 만들지는 못했다. 이 원리를 토대로 1656년 네덜란드의 크리스천 호이겐스가 추시계를 만들었다.
 

혼천시계의 구조와 원리^​혼천시계는 기계시계와 혼천의를 합해 만들었다. 동력추가 아래로 내려가는 힘을 이용해 시계추(진자)가 움직이고, 진자에 연결된 탈진기는 시계톱니를 일정하게 돌게 한다. 사진은 충북대 이용삼 교수와 서울교대 이용복 교수가 복원한 혼천시계다.


01혼천의 : 혼천의 회전축이 시계 회전축에 맞물려 돌아간다.
02동력추 : 중력으로 추가 내려가며 회전축을 돌린다.
03탈진기 : 시계추의 진자운동으로 톱니가 일정하게 돌아가게 한다.
04시계추 : 진자가 왕복운동을 하며 탈진기를 작동시킨다.
05톱니바퀴 : 톱니 수에 따라 회전속도가 달라지는 원리를 이용해 시간과 날짜를 구분해낸다.
06시간표시장치 : 가로로 놓인 톱니가 시계 회전축 톱니와 맞물려 일정하게 돌면서 시간을 나타낸다.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다

서양의 기계 시계들은 중국을 거쳐 조선에도 전래됐다. 당시 조선에서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사용해 시간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흐린 날은 시간을 측정하지 못했고, 물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가 커졌다. 그래서 서양에서 들여온 새로운 기계시계를 활용했다.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자명종을 구해 왔다. 이때 전래된 자명종은 추시계를 발명하기 전이라 갈릴레오나 호이겐스의 추시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송이영이 참고한 자명종은 분명히 호이겐스가 만든 추시계의 초기 모델이다. 혼천시계는 추시계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서양에서 개발한 추시계의 원리를 설계도 한 장 없이 시계 하나만 보고 작동원리를 터득해 겨우 13년 만에 재현해냈다. 혼천시계에는 바늘 대신에 시간판을 돌리고, 인형이 종을 치는 등 서양에 없던 신기술까지 들어있다. 게다가 시계가 작동함에 따라 지구를 비롯한 천체들을 움직여서 실제 하늘의 모습과 흡사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승정원일기에는 현종 10년 음력 10월 14일 이민철이 물시계를, 송이영이 혼천시계를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 뒤 조선의 시계 제작기술은 뚜렷한 발전이 없었다. 19세기말 서양에서는 전기를 동력으로 쓰기 시작했고, 추의 진동은 태엽의 진동으로 바뀌어 휴대용 시계가 나오고, 수정의 진동을 읽어내는 전자시계로, 또 원자시계로 발전했다.

조선의 기계시계는 유교 정치관 속에서 임금의 권위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 민간에 널리 쓰이는데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송이영과 같은 과학기술자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에 문제가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천체를 들여다보는 광학망원경

1만원권에 나오는 마지막 주인공은 지난 4월 3일 열살 생일을 맞은 경상북도 영천 보현산천문대에 있는 구경 1.8m 천체망원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구경이 가장 큰 천체망원경이다. 망원경의 뒤쪽에는 고성능 디지털카메라가 장착돼 있어 관측한 천체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현재 세계에는 구경 8~10m의 천체망원경이 15기나 있어서 보현산천문대의 천체망원경은 작은 편에 속하지만 지난 2월에도 새로운 변광성을 발견해 미국 천체물리학 저널에 게재하는 등 그 역할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천체망원경이 우리나라 지폐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라 고민도 많이 따랐다. 1만원권을 도안한 디자이너가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보현산 천문대를 찾아갔다. 신권 도안에 잘못된 데는 없는지 자문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공개하기 전이라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가족 나들이로 위장했으며, 단 한 사람 보현산 천문대장에게만 은밀하게 자문을 구했다. 물론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극비 사항이었다.

보현산 망원경을 도안에 넣은 까닭은 찬란했던 과학기술 전통을 오늘에 이어받자는 의미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민의 힘을 하나의 정점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 것처럼, 혼천시계가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를 통합시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듯이, 오늘날의 과학기술도 시대의 요구에 맞출 수 있도록 국민들이 월드컵 못지않은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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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안상현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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