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댐 도시 등 확실한 형체로 내 분신을 남긴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해방!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내 마음은 몹시 들떠있다. 뜨겁게 내려쪼이는 여름햇볕을 받으며 백양로를 걸어가는 짧은 치마의 여학생들 발걸음조차 날아갈 듯 가벼워 보인다. 기말고사가 끝난 상쾌함, 방학에 대한 기대도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유지만 무엇보다도 학과공부의 과중한 짐을 벗은 해방감에 마냥 즐겁다. 1주일 30시간 이상의 강의로 꽉 찬 시간표와 평균 7~8개는 족히 되는 리포트, 게다가 매주 한두차례는 치러야 하는 전공시험의 압박은 때로 끔찍할 지경이다. 이번 기말고사때만 해도 1주일 동안 고작 10시간밖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이처럼 내겐 몹시 힘들었던 학기였지만 한편으론 애착이 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학업면에서는 3학년 과정의 주요과목들이 4학년에 치를 토목기사 시험에 필수과목들인지라 그 때를 대비하는 공부로 도움이 됐고 생활면에선 시간시간 헛되이 쓰지 않게 되는 습관이 생겨 짧은 휴식에도 작은 행복을 느끼곤 했다. 힘들었던 만큼 보람과 즐거움은 더욱 큰 것이다.
요즘은 첨단산업이나 전략산업에 밀려 건설분야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퇴색한 느낌이다. 그렇다해도 우리 일상생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혜택을 주는 각종의 인공구조물과 자연물의 이용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1/4이 건설분야에 종사한다는 통계만 보아도 토목공학이 일상생활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인구 4천만 중 1천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건설업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보면 한 나라의 성장이 건설분야의 성쇠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산업혁명이 낳은 토목공학
토목공학은 영어로 시빌 엔지니어링(civil engineering)으로 표기되며 도시공학, 산업기반공학으로도 불린다. 옛날의 거대한 공사들은 거의 군대나 절대권력을 가진 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사회가 비대해지고 모든 산업이 분업으로 다양화하면서 국가의 통제만으론 급증하는 산업 전 분야의 건설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간인 주체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민간 건설업의 발전은 곧 토목기술의 체계적인 전수를 필요로 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학문분야가 토목공학이다. 이런 학문성립 배경은 토목공학이 모든 공학의 원조격이며 기초공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셀 수 없이 산재해 있는 자원과 자연의 힘을 인류에게 유용하게 만들고 필요한 물과 공기를 정결하게 유지·공급해주며 자연의 극심한 조건을 친근한 것으로 변환시켜 인류를 보호하는 각종의 인공 구조물들. 그것을 만들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 계획하며 실제로 설계·시공까지 할 수 있도록 토목공학과에서는 구조공학 수(水)공학 토질 및 건설재료 측량공학 등을 배운다. 뿐만 아니라 주위환경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위생 및 환경공학 교통공학 도시 계획 등도 전공이 세분화되면 습득하게 된다.
여러 종류의 인공 구조물은 인간에게 생활 그 자체로 연결되어 있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지구촌의 환경오염 문제, 자연자원의 고갈로 인한 대체자원개발의 절박성, 제반 시설물들에 대한 계속적인 재조정과 보수문제, 미개척지역의 부단한 개발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토목공학도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질 뿐이다. 특히 요즘 소련을 위시한 여러 동구권 국가들의 개방과 중국의 국토개발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의 손과 발은 더욱 바빠지리라고 생각한다.
고교시절 토목공학과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힌 가장 큰 이유는 남자다운 일에 접하여 생활한다는 점이 나의 성격과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무실에 앉아 펜대 굴리며 서류와 씨름하는 화이트 칼라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거대한 구조물을 완성해 가는 엔지니어가 더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설계로 이루어진 빌딩 다리 댐 크게는 도시까지…. 확실한 형체로 내 분신을 남긴다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하고 가슴 벅찬 일로 느껴졌다. 이런 이유로 지원을 하고 입학을 했지만 전공학문에 대한 회의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과의 거의 모든 전공과목들은 물리와 수학을 기초로 하는 역학-응용역학 구조역학 유체역학 공업역학 등-이 주종을 이루므로 이과 과목 특히 물리에 약했던 나로선 강의가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제법 심각한 고민에도 뼈졌었다. 공대에 발을 들여놓은 학생치고 한두번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막연한 호기심만으로 과를 선택했다가 막상 생활을 해보고는 적성 성격 어려움을 운운하며 고민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못해낼 일이야 없겠지만 기왕이면 자신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전공을 택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방학 이용해 현장실습 하기도
토목공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크게 연구직과 산업직으로 나뉘어 사회로 진출한다. 연구직은 국가공공연구소나 대기업 연구소에 취직하여 학문적인 발전에 기여하거나 건설과 직접 관련된 재료 설계 건설방법 등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이에 비해 산업직은 공무원이 되어 대규모의 국토개발이나 민간생활에 관련된 각종 공사를 계획하고 감독 관리하며, 일반기업체에 취업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직접 사무실에서 설계를 하거나 공사현장에 나가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아직까지는 연구직보다 산업직에 투자나 진출이 많은 편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건설분야에도 특히 연구직 분야에 국가 차원에서 많은 투자와 지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청년아!
어느 앞뒤, 동서남북으로도
피와 땀에 젖은 국토가 있다」
어렴풋이 서정주님의 시가 생각난다. 비단 우리의 국토 뿐만 아니라 작열하는 태양과 몰아치는 모래바람이 유혹하는 사막, 오로라가 아름다운 북극, 이 모든 곳이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모험심과 신비에 이끌려 신밧드가 여행을 떠났듯이 가슴속에 끓어 오르는 국토애에 이끌려 우리는 이 여름을 건설 현장에서 견뎌낸다.
방학을 이용해 각 기업체 공사장에서 현장실습을 하고 있는 친구들. 곳곳에서 땀으로 목욕하며 산지식을 배워내기에 여념이 없을 벗들이 보고 싶다. 모두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어려움쯤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튼튼히 단련되고 있으리라. 우리 검게 탄 굵은 팔뚝 힘으로 이 국토를 마음껏 어루만져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