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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빙원에서 꿈을 이룬 극지연구가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장 김예동

“그때까지만 해도 남극에 다시 돌아갈 거라곤 믿지 않았죠.”

김예동(51)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극지전문가다. 호주를 출발해 7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낯선 하얀 대륙이 ‘평생지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한번 두고 보라”며 웃던 미국인 지도 교수의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산과 여행이 너무 좋아 지구를 좀 더 공부해보고 싶어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남극 연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9세였던 한 청년은 그렇게 한국 최초의 남극 방문자로 기록됐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파랬어요. 단조로울 것만 같지만 두터운 눈을 꿰뚫고 뿜어 나오는 남극 활화산의 증기는 정말 살아있는 느낌이었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설원과 하늘색에 한동안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로 들어선 ‘얼음나라’의 좋은 첫 인상에 영하 20℃ 살을 에는 추위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 뒤 김 소장은 남극의 홍보대사로, 최초의 남극기지 설립 주역으로, 극지연구자로 이름을 떨치며 한국의 극지 개발의 현장을 넘나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유학길에 올랐던 김 소장의 원래 전공은 중력이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마치겠다고 생각한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장학금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학교측의 통보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미국인 지도교수는 그에게 장학금 줄 수 있는 새로운 스승을 소개했다. 물론 전공을 바꿔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남극에 갈지 공부 그만둘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결정은 명쾌하고 짧았다.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장 '김예동'



훌쩍 올라탄 남극행 비행기

그의 첫 남극 탐험의 시작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1983년은 그에게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당시 항공기관사로 근무하던 김 소장의 형은 옛 소련 전투기에 피격된 대한항공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 남극에 첫발을 내딛기 불과 석 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김 소장은 “또다시 자식을 잃을 수는 없다”던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미지의 세상을 밟기로 마음 먹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이끌었다. “아마도 형의 보이지 않는 격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삶의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형을 떠올립니다.”

3개월간의 첫 탐험에서 그는 남극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짧다면 짧지만 남극의 가능성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살아있는 대륙 남극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험담을 신문에 기고했고 지인에게도 알렸다. 그가 목격한 남극은 더 이상 미지의 척박한 땅이 아닌 가능성이 충만한 ‘엘도라도’였다. 1987년 그는 열악한 근무 조건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국의 극지 연구에 동참했다.

극지야말로 자원빈국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첫 겨울을 날 월동대가 사용할 물품 하나하나를 챙기는 것부터 기지설계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두 번의 월동대장, 스무 번이 넘는 남극 방문을 경험한 그의 이름 뒤엔 언제나 ‘세계적인 극지전문가’라는 비공식 직함이 따라 다닌다.
 

입시준비로 힘들던 고교시절. 자주 찾았던 산과 들은 그에게 안식처였다(사진 앞줄 왼쪽).


‘재규야, 재규야’

힘들기로 악명 높은 남극 연구 중에도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는 그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하나가 있다. 지난 2003년 조난된 동료를 구조하러 나섰다 목숨을 잃은 고(故)전재규 대원이다. 전 대원 이야기를 꺼내자 김 소장의 눈가는 금방 촉촉이 젖었다. 전 대원은 김 소장보다 정확히 20년 뒤 남극 땅을 밟은 앞길 창창한 후배였다.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유능하고 열정에 넘치던 후배 하나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보낸 겁니다. 책임이 큽니다.”그러나 전 대원은 세상에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나갔다. 특히 연구소의 위상이 높아지고 남극연구자들의 오랜 숙원인 쇄빙선의 건조가 시작된 것도 모두 전 대원 덕분이다. 김 소장이 열 일 제치고서라도 쇄빙선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것도 더 이상 후배를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그렇게 젊은 후배의 죽음은 선배의 연구자에게 새로운 의욕을 심었다.

“극지는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천혜의 실험실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극지연구의 중요성은 특별히 부각되지 못했습니다.”김 소장이 강연활동과 집필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까닭도 극지 연구에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다. 엄혹한 극지연구는 사람들의 훈훈한 관심을 먹고 크는 연구 분야라고 그는 강조한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극지의 열악한 근무 조건에 고개를 돌리는 젊은 후배를 볼 때마다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되뇐다.

북극 다산과학기지로 또 다른 도전

첫 남극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그는 펭귄 인형 하나를 사들고 왔다. 오랜 비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비행기 트랩을 터덜터덜 내려왔을 때 그를 처음 반긴 것은 바로 펭귄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 낯선 외지인의 방문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설원에서의 첫 인사. 지금도 펭귄을 볼 때마다 마음은 수만리 떨어진 설원을 달린다.

그러나 김 소장에게 남극이 탐험의 종착지는 결코 아니다. 2001년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가 지배하는 ‘야생의 설원’ 북극이라는 새로운 미지로 여행을 시작했다. 배타적이기로 악명 높은 북극 연구와 개발에 한국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북극 다산과학기지는 그 결과로 세워졌다. 한국의 극지연구팀이 18년간 극지 연구에서 보여 온 열정이 비로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극지 연구 과정에서 예상외의 수확도 얻었다. 1992년 1월 김 소장의 연구팀은 세종기지가 위치한 남극 주변 해저에서 국내 연간 천연가스 소비량의 300배에 달하는 가스수화물층을 발견했다. 가스수화물은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메탄가스. 현재의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차세대 에너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구팀은 2003년 7월 북극 오호츠크해 일대에서도 가스수화물층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오는 2007년은 그를 포함한 극지연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다. 50년마다 찾아오는 북극과 남극의 환경 보호와 평화적 이용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제 극지의 해’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은 이를 기념해 흥미로운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남극이 여름을 맞는 2007년 12월~2008년 1월 남극 내 각국 연구소에서 출발한 원정대가 일제히 남극점을 향해 출발하는 이 행사엔 한국도 당당히 참여할 예정이다.

“비록 18년의 역사밖에 안 됐지만 극지 연구에서 한국은 수준 높은 결과를 내놓고 있어요. 이미 50년전 극지 연구를 시작한 선진국들도 우리를 높게 평가하고 있답니다. 모두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따라 와준 연구원들 덕분입니다.”

1년의 반은 낮, 반은 밤인 땅. 대낮에는 세상이 온통 하얘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갑자기 몰아치는 눈 폭풍이 일상인 하얀 대륙에 쏙 빠져 버린 한 청년 과학도는 어느새 중년의 과학자가 됐다.
 

2차 월동대장을 맡아 다시 찾은 남극 대륙에서 대원들과 한 컷.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악조건이었지만 대원들의 열정만큼은 뜨거웠다(뒷줄 오른쪽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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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김연정
  • 박근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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