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일기예보는 언제 시작됐을까? 기상관측의 시점은 널리 알려진데 반해 기상예보의 시작을 기록한 자료는 지금까지 없었다. ‘1905년 11월 2일자’ 일기도 한 장만이 가장 오래된 일기도로 기록됐지만 그 내용이 상세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얼마 전 그보다 하루 전인 11월 1일을 기록한 일기도가 부산에 있는 국가기록원에서 다른 두 종류의 일기도와 함께 발견됐다. 이 일기도는 그 자체로 현대적 일기예보의 시작을 증명하지만 실제로도 일기예보와 폭풍경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기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적어도 4일 전에도 일기예보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또 당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봤을 때 이보다 1년전 어떤 형태로든 일기예보를 했을 가능성도 함께 제기됐다. 일기예보가 시작된 시점이 언제인지 어렴풋하게 드러난 것이다.
열강 패권 경쟁 속 태동한 기상관측
이번에 발견된 일기도가 그려지기 전까지는 기상관측만이 이뤄졌다. 1881년 2월부터 한성 주재 일본공사관은 하루 세 번 기상을 관측한 뒤 그 결과를 본국에 보고했다. 1883년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에 들어온 청나라인이 매일 기상관측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기상의 시작은 일본의 기상관측과 맥을 함께 한다. 일본 근대 기상은 1875년 6월 1일 도쿄에 기상대가 처음 세워지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9년 뒤인 1884년 6월 일본은 일기예보를 시작했는데 이때 처음 부산에서 관측한 기상정보가 이용됐다. 다시 2주 뒤인 6월 16일부터 일본 중앙기상대가 일본전신국에 위탁해 부산에서 정기적인 기상관측을 시작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실시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격돌했다. 대한제국의 분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군대를 파병했고 1904년 2월 8일 드디어 중국 다롄과 인천에 정박해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전시 상황에서 일본은 대량 해상수송과 해상안전을 위해 기상관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전쟁을 시작한지 한 달 뒤인 3월초 도쿄 중앙기상대는 와다유지(和田雄治)를 조선의 기상관측 책임자로 발령했다. 그는 훗날 조선이 측우기를 발명했으며 빛나는 측우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처음 알린 자이기도 하다.
와다유지는 조선 일대에 흩어져 있던 기상관측소들을 임시관측소라는 일본 편제 아래 포함시켰다. 제1임시관측소는 부산, 제2임시관측소는 목포로 결정됐다. 여러 임시관측소 가운데 어느 곳이 먼저 활동을 시작했는지 기록은 많다. 대부분의 자료는 제1임시관측소인 부산(3월7일)을 꼽고 있지만 일본 기상학회 자료는 3월25일 문을 연 목포 임시관측소를 꼽는다.
4월 하순 대한제국에 상륙한 일본국은 북상하기 시작해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고, 중국의 남산과 다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8월 랴오양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 제1차 한일협정)을 대한제국과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한다.
공교롭게 이날은 일본중앙기상대 관측기사 겸 임시관측과장이었던 와다유지가 조선 근무 발령을 받고 인천의 제3임시관측소장으로 부임한 날이다. 그가 부임한 뒤 기상관측소의 기구는 더욱 확장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제주도와 울릉도, 중국의 다롄, 옌타이, 톈진에서, 10월에는 항저우, 난징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됐다. 그래서 1904년 10월까지 새로 세워진 기상관측소는 13개에 이르렀고 매일 세 차례 관측이 이뤄졌다. 그리고 일본 내 30여개 관측소에서도 매일 새로운 기상 관측 자료를 수집했으며 군대 집결지와 섬 지역의 일본 해군 감시 망루에서도 기상관측을 실시했다.
이 정도라면 일기도를 작성하고, 천기(일기)예보와 폭풍경보를 발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였다. 더욱이 와다유지는 도쿄에서 일기예보를 해왔던 유능한 예보관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작성된 일기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 바람 불고 맑은 날씨’
관측소가 늘어나면서 전쟁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1904년 10월 사하회(沙河會)전투, 1905년 1월 흑구대전(黑溝臺戰), 3월 봉천전투 등 연이은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했다. 다롄항에서 옴쭉달쑥 못하던 러시아 극동함대와 발트함대는 일본 연합함대에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종전일인 1905년 9월 5일은 일본이 이미 조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확보한 뒤였다.
새로 발견된 일기도와 일기예보 기록은 1905년 11월 1일자이므로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에 기록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일기예보 제작을 더 이상 비밀에 부칠 필요가 없어져 자료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11월 1일자 일기도는 ‘천기도’ ‘변화도’ ‘기상표’로 나뉘어 있으며 매일 3장씩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첫 일기도에는 ‘14번’이란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이 날의 첫 일기도가 14번이니 앞에 13장, 최소 4일치 일기도가 더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천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한 장의 종이에 6시와 14시, 22시에 관측한 수치를 각각 적은 것이다. 각각의 시간대에는 기압, 기온, 풍향, 풍력, 운량이 적혀있다. 기압은 mmHg, 풍력은 뷰포트 풍력계급을 단위로 사용했으며 그밖에 등압선과 등온선을 그렸다.
변화도는 8시간 동안의 기압 변화량을 기입하고 등치선을 그려 나열한 윗줄과 같은 자료의 24시간 변화량을 적은 아랫줄로 나뉜다. 고기압과 저기압 표시가 모두 영어인 것으로 미뤄, 표기법이 서양에서 들여왔음이 뚜렷하다.
기상표에는 맨 위부터 부산, 목포, 인천 순으로 조선과 만주에 설치된 10개 임시관측소가 적혀있다. 아마도 개소된 순서로 나열된 듯하다. 여기에 중국(11개)과 일본(31개)에 설치된 42개를 합치면 모두 52개 관측소가 보낸 정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표는 해당 시간의 기압, 8시간과 24시간 동안의 기압 변화량, 풍향, 풍력, 기온, 우량, 운향, 운속, 운량, 운형,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을 기록하고 있다. 측정결과는 하루 세 번, 아라비아 숫자와 한자, 일본어로 기록했다.
날씨를 풀어서 쓴 ‘천기개황’ ‘천기예보’ ‘폭풍경보’는 별도의 란을 할애했다. 11월 1일자 천기개황은 ‘지역에 따라 바람이 불고 맑은 날씨’‘백도는 13도 봉천은 1도 8분’으로, ‘천기예보’는 ‘맑음’이라고 적고 있다. 폭풍경보는 빈 칸으로 남겨뒀는데 다음날인 11월 2일자 기상표는 실제로 경보가 발령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도 이 무렵부터 자체적인 기상관측사업을 시작한다. 1907년(광무11년) 1월 평양과 대구측후소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으며 2월1일에는 황제가 직접 기상관측을 독려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같은 날 경성에도 측후지소가 문을 열었는데 훗날 서울측후소의 전신이 된다. 하지만 이들 측후소들은 관측업무만 담당했을 뿐 예보기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4월 1일 마침내 일본은 일본 중앙기상대에 소속된 모든 임시관측소와 대한제국 소속의 모든 측후소를 흡수해 통감부 관측소로 만들었다. 1908년 4월 이들 통감부 관측소는 다시 일본 농상공부 관측소로 이름을 바꾸고 모든 업무를 일본인들에게만 맡겨 버렸다. 여기엔 두 가지 깊은 뜻이 담겨 있다. 1907년부터 1908년 3월 31일까지 대한제국에 기상전문인력이 존재했다는 것과 일본이 조선에 기상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농상공부 관측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점된 1910년 조선총독부관측소로 바뀌었으며 와다유지가 이 과정을 주도했다.
근대기상의 시작 시점
그렇다면 한국의 일기예보가 시작된 시점은 언제일까? 이를 결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시각에 따라 시점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기상관측의 시작을 일기예보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가’‘정기적으로 관측했거나 국가조직이 주도해야 하는가’‘일제 침략사를 포함시킬 것인가’에 따라 시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압계나 온도계의 사용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1881년이 돼야 마땅하다. 국가 기관 설립 시점을 중시한다면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6월이 될 것이다. 일기예보 기록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최초의 자료가 나타날 때까지 1905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단 침략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일 우리민족이 주도했는가를 중시한다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 1월 1일 또는 2월 1일이거나 광복절을 시점으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가 2004년 3월 25일을 근대기상 100주년으로 정한 것은 성급한 측면이 많다. 정부는 목포에 근대 기상관측의 시작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까지 세웠다. 여러 다른 의견이 있었음에도 일본기상학회의 주장만을 따른 결과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 일본의 주장이 옳다 할 수도 있겠으나, 침략의 역사를 잔치까지 열어가며 기념한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잘못된 잔치가 200, 300년 이어지는 것을 막는 것은 우리 세대의 소명일 것이다.
뷰포트 풍력계급 | 풍력을 단계적으로 나눈 표시법.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것을 0으로 하고 마을에 피해를 주는 풍력을 10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