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 들어서자 그 흔한 실험 기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책상마다 놓인 것은 컴퓨터와 책들 뿐. 주위를 둘러보려고 하자 연구원들이 “사진은 이쪽에서만 찍어주세요”라며 기자를 이끈다.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걸까. KAIST 시스템모델링시뮬레이션연구실 김탁곤 교수가 “우리 연구실은 군사 기밀을 다루는 곳이라 보안이 생명”이라고 소개한다.
“우리 학생들은 군부대에 수시로 출입하며 군사 정보를 다룹니다. 그래서 모두 국방부의 비밀취급인가를 갖고 있어요.”
시뮬레이션으로 국방력 키운다
연구팀은 지난 2000년부터 국방부에서 개발하는 전쟁 시뮬레이터(war game simulator)를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전쟁 시뮬레이터란 가상 조건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를 설정해 그에 따른 병력의 배치·이동·공격 등을 실제와 같이 컴퓨터로 모사하는 시스템이다. 실제 전투 훈련을 치르지 않아도 돼 비용과 인력을 크게 절감할 수 있고, 예상 밖의 상황에 대처하는 다양한 전략을 미리 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 교수팀은 올해 을지 포커스 렌즈 훈련에 참가해 시뮬레이터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자문 역할을 맡았다. 2003년 개발한 해군 전쟁 시뮬레이터 ‘청해’와 2005년 공군 전쟁 시뮬레이터 ‘창공’, 해병대 시뮬레이터‘천자봉’ 등이 연구팀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전쟁 시뮬레이터와 연구팀의 이름은 무슨 관계일까. 시뮬레이션을 구현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사항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여기에 따라 목적에 맞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현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이 과정을 ‘모델링’이라고 부른다. 전쟁 시뮬레이터는 군이 필요한 사항을 제시하면 시스템 모델링을 거쳐 구현하고 검증을 받는다. 모델이 실제 시스템처럼 동작하는지 확인하는 검증 과정은 필수적인 부분이다.
“간단히 말해 모델링이 방정식을 세우는 것이라면 시뮬레이션은 방정식을 푸는 것과 같습니다.”시뮬레이터는 국방뿐만 아니라 반도체 생산 공정, 수질 오염 모니터링, 일기예보 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된다. 전쟁 시뮬레이터 구현에는 군인, 일기예보라면 기상 전문가 등 해당 분야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도메인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 밖에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전문가, 확률·통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다. 전문가들이 모여 지식을 공유해야 실제 상황을 가장 잘 재연할 수 있기 때문에 협조는 필수적이다.
가상공간에서 갖춘 최신 무장
미국도 연구팀의 기술을 인정했다. 이들은 용산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군과 함께 시뮬레이터 모니터링·관리 도구를 개발했고, 한국군 시뮬레이터가 미군과 연동해 동작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미국 국방성 연동 표준 인증서’(HLA)도 받았다. 연구팀은 시뮬레이터를 개발하며 미군에서 적용하지 않은 객체 지향적 설계 기술 등 최신 소프트웨어 기술을 대거 반영했다.
“이제는 우리 군대가 미국보다 뛰어난 시뮬레이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팀의 기술로 한국군이 가상공간에서도 최신식 무장을 갖춘 셈이죠.”박사후연구원 1명, 박사과정 8명, 석사과정 5명으로 구성된 연구원들은 대부분 해군, 공군, 해병대 등 군별로 담당이 정해져 있어 이들과 일정을 함께 맞춘다. 특히 을지 포커스 렌즈 훈련은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에 학생들도 순번을 정해 교대로 근무한다.
“문제가 생겨 시스템이 다운되면 이를 해결하느라 군대 막사에서 자고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훈련에 참가할 때면 무척 뿌듯합니다.” 박사과정 김재현 연구원의 설명이다.
부대를 출입하며 군사 정보를 다루다 보니 학생들도 군사 전문가가 됐다. 한 여학생은 해병대에서 시뮬레이터를 시연할 때 군 장성들에게 “교관 하셔도 되겠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다.김 교수에게 군과의 인연을 물었더니 “1975년에 임관한 ROTC 13기”라고 대답한다. 그는 “장교 출신이라 현직 장교들과의 소통도 쉽고, 군 경험이 시뮬레이터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미국 애리조나대 자이글러 교수, 오스트리아 케플러대 프레이호퍼 교수와 공동으로 쓴‘모델링과 시뮬레이션 이론’(Theory of Modeling and Simulation)은 지난 2001년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시뮬레이션을 공부하기 위해선 먼저 이산수학과 소프트웨어공학, 통계학 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금 과장하면 시뮬레이션으로 거의 모든 걸 다 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