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4년 1월 26일 미국인 탐험 조종사 거스 매클라우드(Gus Mcleod)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제작한 반디호를 타고 남북극점을 경유하는 세계일주를 시작한 뒤 남극점 정복을 코앞에 두고 겪은 실화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지난 4월 ‘과학의 달’ 강연차 내한 한 거스 매클라우드를 항우연에서 만나 직접 얘기를 들어봤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800km만 더 가면 남극점이다. 이제 서너 시간 후면 경비행기로는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하게 된다. 꼬박 10시간 넘게 쉬지 않고 날아왔다. 서서히 몸 안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그간의 고생이 하나씩 떠오른다. 미국 플로리다주 세바스찬 공항을 출발해 벌써 보름 가까이 경비행기 반디를 집 삼아, 하늘을 벗 삼아 날아왔다.
착빙의 늪에 빠지다
잠시 후 조종석 유리창 너머로 저만치 앞에 있는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흡사 반짝거리는 은색 커튼 같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본다.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아름다운 구름은 비행기에는 치명적인 ‘독’이다. 저건 그냥 구름이 아니다. 구름을 가장한 얼음이다. 구름을 피하지 않으면 기체에 착빙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착빙이 되면 기체가 양력을 잃는 것은 순간이다.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어떡한담. 핸들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순식간에 구름이 코앞에 와있다. 반사적으로 계기판 온도를 확인한다. 바늘은 영하 1℃ 근처를 가리키고 있다. 영하 8~영상 6℃에서는 거의 착빙이 일어난다. 반디를 믿자. 구름을 타넘기로 했다. 그러려면 1500m까지 올라가야 한다.
반디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몸에 진동이 전해왔다. 기체가 떨리고 있었다. 반디가 착빙된 것이 분명하다. 주변은 온통 뿌옇다. 구름 속에 갇혀버렸다. 핸들을 돌려 급선회를 하자 몸이 한 쪽으로 쏠린다. 어떻게든 구름을 빠져나와야 한다. 지금은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반디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된다. 이미 반디는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구름에서 빠져나오니 고도가 550m까지 떨어졌다. 착빙 탓이다. 원래 6000m까지 거뜬히 올라가는 반디가 맥을 못 춘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고도를 높였다. 밖에서 바라 본 구름은 얄밉게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항로를 변경해 구름 뒤로 돌아갔다. 이번엔 우뚝 솟은 빙하가 떡 버티고 있다. 저 빙하만 넘으면 바로 남극점이 있다. 빙하를 넘어야 한다. 머릿속에는 계속 이 말만 맴돌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심호흡을 해본다.
차츰 빙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얼음벽은 3000m가 넘었다. 착빙을 피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남극점 정복은 물거품이 된다. 빙하 주변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낮은 지점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제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일까.
아르헨티나 남단 우수아이아 기지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안석민 박사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안 박사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착륙하라. 그 뿐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남극점을 정복할 것인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반디를 제작한 안 박사는 그 누구보다도 성공 소식을 애타게 기다려 왔을 터.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도저히 반디를 되돌릴 수 없었다. 벌써 두 번째 시도다.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 것인가.
남극점이 바로 저기다. 조금만 더 가 보자. 하지만 착륙하라는 안 박사의 외침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빙하에 가까이 갈수록 얼음 폭풍은 거세지고, 반디는 착빙을 견디지 못해 고도를 잃고 추락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남극 상공에서 홀로 얼음과 싸우며 45분을 그렇게 빙하 주변을 비행했다.
앞날개 덕에 불시착 성공
어떻게 반디를 돌렸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기지로 돌아갔다가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려 봐야겠다. 일단 남극 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로테라 기지에 착륙했다.
다시 이룩하려면 연료를 버려야 했다. 남극점을 왕복하려고 조종석을 제외한 세 좌석을 모두 뜯어내고 연료탱크를 채운 탓에 반디는 꽤 무거웠다. 최대 이륙중량이 1200kg정도인데, 연료를 채운 반디는 이미 이 무게를 넘었다. 활주로가 길어지고 고도를 높이기도 힘들다.
연료를 버리는 데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국령인 로테라 기지의 허가를 얻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처음에는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해 5시간이나 조종석에 앉아 있어야 했다. 늦은 오후 무렵 마침내 허가가 났다. 400L 가량의 연료를 버렸다. 하루가 아쉬운 마당에 기지에서 하룻밤을 더 허비할 수 없었다. 날은 어둡고 추적추적 얼음비마저 내린다. 그래도 한시가 급하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남극의 얼음 폭풍은 심해진다. 야간비행을 결심했다. 어둠을 뚫고 드레이크해협 상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우수아이아 기지로 돌아왔다. 세번째 남극점 비행은 전적으로 날씨에 달려있다. 징조가 좋지 않다. 대기 중에 얼음 알갱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다. 남극점 비행 시즌이 지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1주일후면 남극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남극점 비행을 다음 시즌으로 미뤄야 한다. 맥이 빠진다. 하지만 아직 돌아가는 여정이 남아 있다. 비록 남극점 정복은 못했지만 비행은 계속된다.
2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해 얼마나 날았을까. 갑자기 엔진이 멈췄다. 반디는 단발기다. 비행기의 유일한 엔진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넣은 연료에 물이 섞여 탈이 난 것. 아르헨티나 항공과 교신을 시도했다. 어이없게도 이들은 대기하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40km 떨어진 곳에 가장 가까운 공항이 있다. 이 상태로 거기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다. 반디를 믿고 바로 착륙을 시도할밖에. 아르헨티나 항공 소속 여객기 조종사는 살아남으면 자신에게 다시 교신하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핸들과 페달 조종 뿐. 나머지는 반디에 맡기자.
시속 170km가 넘는 속도로 반디는 땅으로 내리달았다. 다행히 반디는 동체 앞에 날개가 달린 선미익기여서 추락할 때 빙글빙글 돌지 않고 마치 파도를 타듯 동체 앞부분부터 비스듬히 내려갔다. 글라이더를 조종한다고 생각하자. 지상에 착륙하기까지 30~40초 동안은 오로지 무사히 착륙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땅에 바퀴가 닿고 3m 가량을 미끄러졌다. 반디가 멈춘 후 주변을 둘러보니 웬 사내가 말을 타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태어나서 한번도 비행기를 본 적이 없다는 사내가 반디를 새로 생각했다는 말에 웃음이 번지며 쌓였던 긴장이 좀 풀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 평야 130km 지점 불시착은 성공이었다.
오는 8월 반디와 함께 다시 한번 남북극점을 경유하는 세계일주에 도전한다. 1년 반 만이다. 지난해의 아쉬움을 모두 털어낼 절호의 기회다. 2003년 남극점 비행에 도전했던 영국 조종사 폴리 베커와 호주의 조 조안슨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기록을 세울 기회는 남아 있다. 시기도 좋다. 지난 비행보다 출발 시기를 앞당겼기 때문에 북극점을 찍고 남극점에 도착할 11월쯤에는 날씨가 한결 좋을 것이다.
세계일주 재도전
반디는 모든 준비를 거의 마쳤다. 5000m 이상 높이 비행한다면 더 이상 얼음 폭풍에 착빙될 염려가 없어진다. 더 강력한 엔진을 달아 이번에는 꼭 남극점에 반디의 흔적을 남기리라. 나는 준비할 것이 특별히 없다. 자신감은 이미 충만하다. 15세에 조종사 자격증을 딴 후 하늘에서 8000시간을 머문 지도 오래 됐다. 남극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는 지난번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조종사 로스코 터너는 내 영웅이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비행한 후 그는 내게 비행의 세 가지 규칙을 얘기했다. 비행기와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충돌을 피하지 말고 조종기술을 믿을 것 그리고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절대 비행하지 말 것. 5개월 이상 지구촌을 가로질러 5만km 이상을 비행하게 될 이번 여정에서도 이 규칙들은 나를 지켜줄 것이다.
2000년 세계 최초로 덮개가 없는 단발기를 이끌고 북극점을 정복했을 때 북극의 에스키모인은 내가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무타켁’(Mutakek)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춤추는 바다코끼리’ ‘거친 바다코끼리’라는 뜻이란다. 영하 14℃의 혹한을 맨살로 부딪치며 비행했으니 그렇게 부를 만하다. 나는 ‘북극곰’이라는 별명이 훨씬 맘에 든다. 이번에 세계일주에 성공하고 나면 그 이름을 붙여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