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서강대 ‘경제학원론’ 강의 도중 생긴 일이다. 교수가 가격탄력도를 설명하기 위해 그래프와 미분의 관계를 칠판에 적자 한 신입생이 “고등학교 때 미분을 안 배웠다”고 말했다. 사학과 2학년 김진욱 씨는 “교수님이 한숨을 내쉬고 커피를 마시고 나서야 강의가 다시 시작됐지만 수업 수준이 고교 수학으로 후퇴했다”고 아쉬워했다.
대학가에 불어온 미적분 대란
올들어 국내 대학들이 ‘미적분 대란’을 겪고 있다. ‘선택과 집중’을 골자로 한 7차 교육과정을 배운 학생들이 올해 처음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문과 학생들은 수학의 미적분을 거의 배우지 않고, 이과 학생도 예전보다 적게 배운다. 문·이과 교차지원도 가능하다. 과학의 핵심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이공계 신입생이 수두룩하다. 대학가에서는 ‘한국 수학 교육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대학에서는 ‘미적분 보충수업’을 하느라 야단이다. 서울대는 5년 전부터 1학년생을 대상으로 수학 기초반을 만들었다. 연세대는 올해부터 공학 계열 신입생들의 필수 과목인 ‘공업수학’에 보충반을 추가했다. 보충반은 일주일에 수학 강의와 연습을 1시간씩 더 듣는다.
한양대 공대도 미적분 실력이 부족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미적분학의 원리’라는 야간수업을 개설했다. 매주 6시간 동안 고교 수학을 배운다. 수원대는 수학과 신입생들에게도 미적분학을 원리와 개념 중심으로 새로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이보영 교수는 “설문 조사 결과 이공계 신입생 중 미적분학을 고교에서 배우지 않은 학생은 약 20%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미적분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보충 수업을 하고 있지만 첫 시험 결과 미적분을 잘 하는 집단과 차이가 조금 밖에 좁혀지지 않아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이공계 수준의 수학 실력이 필요한 경제, 경영학과에서도 미적분은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 서울대 수학과 최형규 교수는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수학 실력이 처진다”고 우려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박선화 박사는 “7차 교육과정을 만들 때 수학 과목에 대한 부담을 30% 줄인다는 원칙에서 미적분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미적분이 덩치가 큰 데다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미적분을 빼내 수학에 대한 흥미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현재 고교 수학은 문과생을 위한 수학1, 이과생을 위한 수학2와 심화수학(미적분, 확률 및 통계, 이산수학)으로 나뉜다. 수학1에는 미적분이 없고 수학2는 비교적 쉬운 미적분에 그친다. 따라서 이과생이라도 수학2와 이산수학 과목을 택하면 미적분을 많이 배우지 못하고 졸업하게 된다. 문과생이 수학1만 공부하고 이공계에 진학할 수 있는 길도 넓다.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는 이런 방식에 대해 학력 저하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 수학, 특히 미적분은 과학의 기초 체력인데 홀대한다는 것이다. 대한수학회장인 연세대 민경찬 교수는 “외국은 고교에서 수학 교육을 늘리는 추세지만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수학과 김성기 교수도 “미국에서 명문대를 가려면 대학 1학년 수준의 수학을 고교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수학 대 쉬운 수학
현재 방식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홍익대 수학교육학과 박경미 교수는 “모든 학생들을 위한 수학 교육에서는 양보해야 하는 것도 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고교생을 수학 혐오자로 만들기 보다 수학 팬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어려운 수학은 심화 학습이나 영재기관 등에서 따로 배우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일부 교수들은 미적분을 전공한 사람에게만 이공계에 응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산고 최수일 수학 교사는 이에 대해 “이른바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갈수록 고등학생이 줄고 있는 현실에서 어렵다는 뜻이다.
고교 수학 수준은 낮아지고 대학이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신입생들이 짊어지게 마련이다. 전체적으로 강의 수준이 떨어지거나 미적분에 걸려 중간에 낙오하는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공계 학과 상당수가 미적분을 마치 ‘사칙연산’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미적분을 잘 못하면 대학 강의를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려면 먼저 신입생의 수준에 맞춰 대학이 변해야 한다. 연세대 수학과 유현재 교수는 “보충수업은 소극적인 대응”이라며 “대학에서 이공계 전공에 맞춰 다양한 수준의 수학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내 대학의 교수 인력 등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투자가 부족한 국내 수학계를 지원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박선화 박사는 “현재 차기 교육과정에서 고교 수학을 대학 교육과 연계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부담은 늘리지 않고서 미적분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선진국처럼 고교에서 대학 1학년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AP프로그램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한 수학교사는 “7차 교육과정에서 학생 부담을 줄인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며 “책상에서 나온 개선안을 현장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학수학회 교육이사인 수원대 수학과 이상욱 교수는 “시대가 바뀌면 고교 수학도 달라질 수 있다”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는 학생들이 수학의 원리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문제 푸는 법만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학의 학생 선발권을 강화하고 고교에서도 생각을 유도하는 학습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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