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지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는 반도체 설계 분야의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를 가리듯, 세계 최고의 연구만을 게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이 한 편만 실려도 걸출한 성과를 냈다고 인정받는다. 그런데 KAIST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1년에 평균 8.42편의 논문을 이 학술지에 싣고 있다. 심지어 2006년부터 14년간 논문 게재 건수는 전 세계 1등을 유지해왔다. ‘금메달’ 가득한 반도체시스템공학과를 7월 11일 방문했다.
“최고의 학생에게 최고의 학과에서 최고의 대우를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KAIST 정보전자공학동 건물에서 만난 조성환 반도체시스템공학과 학과장은 학과의 목표를 이 같이 설명했다. 조 교수는 “기본적으로 전기및전자공학부에서 배우는 커리큘럼에 심화된 실험 수업, 삼성전자 인턴 실습 기회 등을 추가로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보통 학부에서 하는 실험은 강의실에서 배운 개념을 익히기 위한 실험인 경우가 많다. 정해진 결과를 내기 위해 올바른 풀이를 따라하는 식이다. 하지만 반도체를 현실에서 설계할 때에는 실험이 그렇게 아름답게 이뤄지지 않는다. 조 교수는 “항상 예상 문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고 결과도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학생들이 실험 수업에서 직접 ‘디버깅(버그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교육하고 있다. 조 교수는 “반도체 설계 단계에서 다양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디버깅하며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좋은 스승 밑에 좋은 제자 자란다
반도체 설계는 벽돌(소자 공정)을 가지고, 집을 설계(회로 설계) 하며, 도시를 꾸미는(시스템 구성) 과정이다.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두 모여 있다. 소자 공정 분야의 최신현 교수는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인공지능(AI) 및 뉴로모픽 컴퓨터를 위한 소자를 구현하고 있다. 최 교수팀은 최근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성능과 신뢰도를 갖는 소자 구현에 성공했다.
그런가 하면 유회준 교수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연구자다. 유 교수는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고체회로학회에서 논문을 가장 많이 발표한 5명의 연구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또 반도체 기술자들에게 교과서 같은 책 ‘DRAM의 설계’를 집필했으며, 올해 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와 국제고체회로학회에서 뽑은 10인의 대표 강연자 중 한 명으로도 선정됐다.
시스템 분야의 유민수 교수는 엔비디아와 페이스북에서 시스템 개발을 연구하며, 세계 최초로 개인정보 보호 기술이 적용된 AI 반도체를 개발했다. 최근엔 구글이 컴퓨터 과학 분야 신진 연구자들과의 협력을 위해 수여하는 구글 리서치 학술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유명한 교수진이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 포진해 있습니다. 세계의 학술대회에서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 좋은 교수진으로 구성된 학과라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교수는 강조해 말했다.
그가 이토록 교수진을 강조하는 데는 그의 개인 경험도 반영돼 있었다.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학부생 시절 경종민 교수의 수업을 듣고 반도체 분야를 연구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경 교수는 1994년도에 최초로 386 중앙처리장치(CPU) 호환칩을 만들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강의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스승이 전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더 훌륭한 연구자가 돼야겠다는 동기를 얻었다. 조 교수는 “앞으로 반도체시스템공학과도 후배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반도체 분야를 세계적으로 이끄는 학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등록금・교환학생・취업 등 지원혜택 다양해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국가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기업, 정부, 학교가 힘을 모아 만든 계약학과다. 기업에서 세계적 인재를 키워 자신의 기업으로 유입하려는 제도이기 때문에 입학과 동시에 여러가지 지원 혜택이 따라온다. 4학년까지 등록금을 전액 지원받을 수 있고, 교환학생이나 학회 참가 시 연수 기회와 경비를 제공받는다. 또한 재학 중에 삼성전자가 아닌 다른 진로에 관심이 있거나, 다른 전공을 선택하고 싶으면 입학 후 자유롭게 전과가 가능하다.
평소에는 대전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금요일이나 방학 중엔 서울로 이동해 저명한 연구자들과 만날 기회를 갖게 해주는 특전도 인상 깊다. 조 교수는 “학부생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학생들이 졸업 이후 금융이나 다른 IT 분야로 진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학 동안에는 서울 캠퍼스에 가서 경영학 수업과 같은, 평소 듣지 않는 수업을 듣기를 적극 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서는 복수 전공이나 부전공을 통해 반도체 이외의 공부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올해 처음으로 신입생을 61명 모집했다. 이날 인터뷰 현장에는 그중 5명도 함께 했다. 그들은 전폭적인 지원이 보장된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 들어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조 교수는 “내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신입생들을 모집할 계획”이라며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학생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