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있는 A중학교는 5월 중순쯤 교내에서 ‘19단 외우기 대회’를 열 계획이다. 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을 이용해 19단 외우기를 겨루게 된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5월부터 19단 노래를 방송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전국에 19단 열풍
올들어 19단 외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 19단은 구구단을 19자리까지 확대한 것이다. ‘9×9=81’대신 19단은 ‘19×19=361’로 끝난다. 인도를 ‘IT강국’으로 이끈 원동력이 19단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와 함께 19단을 외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19단의 인기는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서점에서는 벌써 ‘19단 정복하기’ ‘기적의 19단’ ‘수리수리 19단’ ‘19단은 내 친구’ ‘재미있는 19단을 외우자’ 등 19단과 관련된 책이 20여종 이상 나와 있다. 19단 책받침과 벽에 붙이는 벽보, 19단 CD, 19단 외우는 컴퓨터 게임, 19단 노래 등도 인기다. 학원과 학습지 회사에 이어 19단을 외우는 유치원까지 등장했다.
19단의 진원지는 역시 인도다. 일부 신문이 ‘수학의 나라’ 인도의 초등학생들이 19단을 쉽게 외운다고 보도하고, 한 방송사는 900단을 외우는 인도인을 소개했다. 자연스럽게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는 인도인의 저력이 19단 암기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19단은 정말 두뇌를 발달시킬까. 지난해부터 19단 시범교육을 해온 B중학교의 수학 교사는 “19단을 외우면 계산이 빨라지고 소인수분해와 제곱수 계산 등에 이용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21을 소인수분해 하려면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지만 19단을 알면 13과 17이라는 소수가 금방 떠오른다.
19단 교재를 내놓은 기탄교육 수학개발팀 주성택 팀장은 “초등학교에서는 수학의 6가지 기능 중 수와 연산능력이 60%나 차지하며 19단은 이런 능력을 키워준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19단을 외우거나 공부하면 좌우 두뇌가 함께 계발되고, 큰 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수 개념이 확장된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교수신문에는 19단과 관련해 재미있는 설문 조사가 실렸다. 국내 수학 교수 36명을 대상으로 19단에 대해 조사한 결과 ‘수학 교육에 악영향을 미칠 것’(18명), ‘수학학습능력 증진과 상관없다’(12명)는 부정적인 답변이 80%를 넘어선 것이다. 교수신문은 19단을 긍정적으로 본 교수는 단 2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조차 19단의 수학적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 암산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고 보도했다.
19단이 수학 혐오증 낳을 수도
수학교육 전문가들은 19단 외우기에 대해 대개 부정적이었다. 건국대 수학과 홍진곤 교수는 “큰 수에 대한 개념을 익히기 위해 19단을 외운다고 한다면 왜 100단을 외우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홍 교수는 “19단을 외워 봤자 그 이상의 곱셈 문제가 나오면 막힐 수밖에 없다”며 “19단이든 100단이든 10진법으로 된 현행 수학 체계에서는 구구단 이상의 효과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19단을 외우면 두뇌가 개발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뇌 전문가인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는 “19단을 외우면 좌우 뇌가 발달한다는 말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며 “어린이에게 19단을 억지로 외우게 하면 오히려 창의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도 “어린이에게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하면 스트레스가 심해져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19단 외우기가 수학 혐오증이나 학습 혐오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19단을 직접 가르친 교사들 사이에서도 19단에 대해 비판적인 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4, 5, 6학년을 대상으로 19단 교육을 한 수원 율전초 이유직 교감은 “19단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교감은 “19단을 외워도 생활에 쓸 데가 별로 없기 때문에 금방 잊는 것이 문제”라며 “외우기를 싫어하거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는 역효과가 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사 등에서 19단을 생활에 활용하는 사례를 찍고 싶다며 문의해 오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없어 난감했다고 털어놨다.
이 학교에서 지난해 19단을 배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9단이 재미있고 외우기도 쉽다’라고 답한 학생은 16%에 그쳤다. ‘재미는 있지만 외우기가 어렵다’고 답한 학생이 45%, ‘재미도 없고 외우기도 어렵다’고 답한 학생은 38%였다. 80%가 넘는 학생들이 19단 외우기를 어려워한 것이다. 이 교감은 “앞으로 19단을 수학 특성화반의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계획이며 전체 학생들에게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단 옹호론자들은 19단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19단이 나오는 원리를 이해하면 수의 규칙성을 깨닫는 등 학습 효과가 높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11단은 (10+1)단으로, 19단은 (20-1)단으로 이해하면 수학의 분배 법칙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익대 수학교육학과 박경미 교수는 “19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수학 패턴은 구구단을 통해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상업주의와 점수 지상주의가 지금의 19단 열풍을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수학계 석학인 한양대 수학과 김용운 명예교수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19단 열풍 뒤에는 “상업주의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과 기관들이 19단이 좋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이는 19단이 가르치기 쉽고 한번 배우면 아이들 실력이 눈에 띄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업적으로 19단은 최고의 소재인 셈이다.
김 교수는 “수학에 대한 학부모의 불안심리를 일부 언론과 기관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우리나라에서 자폐증 환자가 많이 나올 것”이라며 우려했다.
신관중 주소연 수학 교사는 “19단 열풍은 최근 교육이 창의성 중심에서 다시 학력 중심으로 변하는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 교사는 “학력이 강조되는 교육 분위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점수”라며 “점수를 따기 위한 시험에서는 계산력이 중요한데 19단이 계산력을 높여준다고 알려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서울 강남에서 주산 교육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계산력보다는 사고력이 중요
수학 교사들은 19단 열풍이 계산력과 암산 실력을 수학의 전부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많은 교사들은 19단 열풍의 뒤에는 암산을 통해 자신의 아이가 1등이 되고 다른 집 아이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주 교사는 “계산력이 강조되면 사고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며 “학생들이 수학에 정을 떼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문가들은 인도가 수학과 IT에 강한 점을 19단에서 찾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복잡한 생각하기를 즐기고 어려운 수학을 생활 속에서 일반화한 전통이 인도가 수학에 강한 진짜 이유다. 더구나 인도가 세계 수학을 이끌어 가는 것도 아니다. 김용운 교수는 “인도에서 IT산업이 강한 것은 기존 인프라 없이도 할 수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녀를 길러 본 사람들은 이들 나라에서 19단은커녕 구구단조차 잘 외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운율상 구구단 외우기가 불편한 데다 구구단을 꼭 외워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교 수학 시간에 계산기가 버젓이 등장한다. 그러나 수학을 비롯해 첨단 과학을 이끌어 가는 나라는 바로 그들이다. 수학을 통해 계산력보다 창의성과 사고력, 논리력을 배우기 때문이다.
1970년대 국내에서 암산으로 두자리 수의 곱셈을 해내는 KHM 암산법이 등장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지금의 19단을 넘어 100단에 가까운 계산법이었다. 그러나 이 암산법은 금새 사라졌다. 한 수학 교사는 “수학을 전공한 사람 중에는 19단이 효과가 높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상업적인 유행이 끝나면 19단도 곧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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