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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헤르츠파를 쏜다

X선 대체할 차세대 광학 빔

* 2015년 어느 봄날 아침. 만개한 꽃을 뒤로하고 연구원 A씨는 국회의사당 옆 의원회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B의원과의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나 주요 공공건물에서 불특정 대중을 대상으로 무기나 폭탄의 원격 검색을 가능하게 한 ‘공공보안검색법’이 발효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A씨는 오늘 B의원을 만나 이 법에 주로 사용되는 ‘T선’ 기술의 정확도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더 많은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할 작정이다.

** 같은 시각 A씨의 부인 C씨는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고 있었다. 지난주 T선을 이용한 정밀 암검사를 신청해놓았던 것. 요새는 암검사도 유행인가? 지난 겨울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미세 암검사 얘기를 하는 바람에 C씨는 마치 철지난 옷을 입고 나온 사람처럼 어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도 암검사는 마음이 편치 않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해본다. 무심결에 다가서는 꽃향기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 A씨가 의원회관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현관 입구에서 보안 경찰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A씨를 뒤따르던 30대 초반의 한 남자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놀란 A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경찰이 그 남자의 바지춤 속에서 압수한 플라스틱 통. ‘폭탄’ 어쩌고 하는 말이 귓가를 스쳤다. 그 남자는 플라스틱 폭탄을 숨기고 의원회관에 접근했던 것이다. 건물 입구에 설치된 T선 원격 검색 장치가 그 폭탄을 탐지했던 모양이다. 순간 A씨는 식은 땀이 흐르며 아찔해졌다.

**** C씨가 병원을 나선 것은 들어간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유방암을 포함해서 전신 피부암을 검사하는데는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피부암이 의심되는 깨알보다 작은 조직 2군데를 목 뒤에서 발견해 그 자리에서 바로 제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C씨는 목 뒤의 반창고 자리를 조심스레 만지며 검사하러 오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 얘기는 물론 가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최근 T선은 과학계의 ‘뜨는’ 기술로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MIT가 발간하는 ‘테크놀로지 리뷰’ 2004년 2월호에서 ‘세상을 바꿀 떠오르는 10대 기술’에서 T선은 만국어 번역기, 합성생물학, 나노전선, 베이지안 기계 학습에 이어 당당히 다섯 번째로 소개됐다. 지난 1월에는 일본 정부가 향후 10년간 집중 추진할 과제로 선정한 ‘10대 근간 기술’에서도 단연 T선이 가장 먼저 개발돼야할 기술로 뽑혔다. 도대체 T선이 뭐길래 이토록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일까.

새로운 인식 연 새로운 빛

T선의 T는 ‘테라헤르츠파’의 첫 자를 딴 것이다. 테라헤르츠파에서 ‘테라’는 1012을 의미하는 것으로 테라헤르츠파는 1초에 1조번 진동하는 빛을 말한다. 빛의 파장으로는 수백μm고, 에너지로는 수십meV 대역이다. 보통 가시광선의 파장이 0.3~0.7μm 정도니까 테라헤르츠파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수백배 더 길다고 보면 된다.

그간 테라헤르츠파는 연구하는 사람의 전공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은 ‘원적외선’이다. 원적외선이란 명칭은 광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테라헤르츠파가 적외선보다 파장이 긴 25μm~1mm의 원적외선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테라헤르츠파는 파장이 수백μm로 원적외선 중에서도 파장이 긴 영역이다. 이 밖에도 전파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테라헤르츠파를 ‘밀리미터보다 짧은 파’ 또는 ‘극초단파’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테라헤르츠파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극초단 레이저로 고체역학을 연구한 사람들의 공이 크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극초단 레이저를 광전물질에 쏘아 테라헤르츠파를 발생시키고 측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빛을 ‘테라헤르츠빔’이라고 불렀다. 이후 서서히 테라헤르츠파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테라헤르츠파의 인기가 급부상한 것은 그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테라헤르츠파는 가시광선이나 적외선이 투과하지 못하는 종이, 나무, 옷감, 플라스틱 등의 물질을 잘 투과한다. 그리고 어떤 물질을 투과했는지 쉽게 분석할 수도 있다. 강한 투과력을 가진 X선과 흡사하다. 이 때문에 테라헤르츠파에는 T선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모든 물질은 빛이나 전자기파로 그 구조와 특성을 분석할 수 있다. 특히 자연계 대부분을 형성하는 생물이나 분자 형태의 물질은 1~100meV가량의 매우 낮은 에너지의 빛으로도 그 구조나 특성을 잘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T선을 사용해 X선처럼 투과 사진을 찍으면 내부의 구조 등 모습뿐만 아니라 어떤 물질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1995년 ‘옵티컬 레터스’에는 반도체칩과 나뭇잎의 투과영상이 실렸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 영상에 흥분했다. 투과영상을 찍은 대상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투과영상 기술이 바로 T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과영상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T선 기술이 조만간 우리 주변으로 다가오리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새겨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과학자들은 이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반도체, 초전도체, 양자소자 등의 첨단 물성연구에서부터 단백질변이 질병연구, DNA 연구 등 다양한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는 물론이고, 우주과학, 원자력 등 폭넓은 과학 분야에 T선을 응용하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간 X선은 투과영상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제 T선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할 판이다.


고출력 자유전자레이저가 으뜸

그간 테라헤르츠파 연구가 오랫동안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광원 때문이다. 높은 출력을 내면서도 넓은 대역의 테라헤르츠파를 발생시키는 쓸만한 광원을 개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파와 가시광선 대역의 중간에 있는 테라헤르츠파 대역에서 강한 빛을 발생시키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었던 것이다.

다양한 테라헤르츠파 광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테라헤르츠파를 발생시키는 방법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자유전자레이저나 방사광 가속기 등 전자빔을 이용하는 광원과 극초단 레이저나 비선형물질 등을 이용하는 레이저빔이용 광원이 그것이다.

국내에는 5~6개 연구소와 대학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이용해 테라헤르츠파 응용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데, 그 중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자유전자레이저를 이용하고 있다.

자유전자레이저는 여러 광원 중에서도 테라헤르츠파 대역의 가장 이상적인 광원이다. 고출력 레이저 광원이기 때문에 다른 광원보다 출력이 수만~100만배에 이를 정도로 강하고, 파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등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전자레이저는 개발비용이 많이 들고 기술적으로 어려운데다가 장치가 매우 크다는 단점이 있어 그간 세계적으로 개발이 어려웠다.

이에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지난 2000년 세계 최초로 실험실 규모의 소형 테라헤르츠 자유전자레이저를 개발했다. 장치의 크기는 불과 2m×3m 정도로 실험실 책상만 하며, 100~1000μm의 아주 넓은 파장 대역에서 레이저를 발생시킬 수 있다.

미국의 벨연구소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오랫동안 소형 테라헤르츠 자유전자레이저를 개발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어 이 성공은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소형 테라헤르츠 자유전자레이저. 크기가 불과 2mX3m로 실험실 책상만 하다.


테러 잡고 암 진단까지

최근 이런 광원 개발에 힘입어 T선은 X선을 제치고 차세대 광학 빔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X선도 T선과 같이 물질을 투과할 수 있다. 오히려 투과 능력은 T선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왜 X선이 100년 동안 지켜온 독보적인 권위가 T선에 의해서 위협을 받을까?

X선의 치명적인 약점은 인체에 해롭다는 것이다. T선보다 에너지가 높아서 X선 촬영을 할 경우 방사선이 인체 내의 분자나 원자에 강한 충격을 준다. 최근 발표된 자료를 보면 X선 검사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의 양이 인체에 결코 안전한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X선을 많이 사용하는 검사의 경우 그 횟수를 제한하고 있다. 반면 T선은 X선보다 에너지가 낮아 인체에 무해하다.

X선으로는 마약과 폭탄처럼 가루로 된 물질의 성분까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된 폭탄을 지니고 공항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면 ‘삐~삐~’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X선이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금속탐지만 시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T선은 안전해서 사람과 화물 모두 조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금속물, 마약, 플라스틱 폭탄 등 최근 문제가 되는 모든 검색 대상을 정확히 판별해 찾아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요즘 T선은 보안기술과 의료기술의 차세대 기대주로 관심을 끌고 있다. 2003년 일본이화학연구소는 T선을 이용해 우편물 속의 마약을 정확히 검색해내는 기술을 발표했다. T선을 이용해 다양한 약품 속에서 찾고자 하는 대상만을 선택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T선을 이용해 검색이 어려운 폭탄을 찾아내는 기술 개발에 관심을 쏟았다. 최근 테러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공항에서는 승객의 보안 검색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T선을 활용한 기술이 더욱 절실해졌다. 얼마 전 영국의 테라헤르츠파 검사·검색 장치 전문제작사인 테라뷰는 막대 형태의 T선 개인 검색장치를 개발해 상용화시켰다. 마약과 폭탄을 검색하는 T선 장치를 공항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T선을 이용한 의료기술도 활발히 개발 중이다. T선은 암 조직과 건강한 조직을 구분해 영상화시킬 수 있다. 또 T선으로 건강한 조직이 암으로 변하기 전 단계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테라뷰는 이미 T선으로 피부암을 검사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시판하고 있다. 앞으로 T선을 이용해 생명체에 전혀 무해하면서도 높은 분해능으로 원하는 생체조직의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의료영상 기술의 시대가 열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T선도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T선 기술로 피부암 등 암을 검진할 경우 T선이 조직내부를 투과하는 것이 아니라 반사된다. 투과형의 경우 T선이 물에 쉽게 흡수되는 문제점이 있어 임상에 활용하기에는 아직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개발한 자유전자레이저는 출력이 강해 다른 광원보다 투과력이 높다. 최근에는 이 장치를 이용해 처음으로 귀뚜라미를 테라헤르츠 투과 영상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자유전자레이저를 이용해 원거리 검색 기술, 3차원 영상 기술, 정밀 암진단 기술 등이 개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빨간고추를 1THz로 찍은 영상. 고추 안의 씨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베이지안 기계 학습 (Bayesian Mechanical Learning) | 확률 이론의 하나인 베이지안이론을 기계에 적용시켜 기계가 자율적으로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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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정영욱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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