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통령 선거가 눈 앞에 다가왔다. 각 후보들은 저마다의 과학기술 공약을 내걸고 표를 호소하고 있다. ‘혹시 이번에도 그저그렇게 뻔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번 대선은 여느 때와는 달리 몇가지 특징이 있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이번 대선의 과학기술 공약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제 아들도 이공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 법대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제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말렸죠. 지금은 IT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8일 삼성동 한국과학기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통령후보 초청 과학기술정책 포럼’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한 말이다. 이번 포럼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주관하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 등 7개 단체가 공동주최했다.
한편 지난 10월 18일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가 이 자리에 초청돼 “제 자신은 법조계 출신이나, 인척 중에 과학기술을 전공하고 교수로 지내는 분 등 이공계 친인척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반쯤은 이공계 사람이죠”라고 말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한달여 남짓 남은 현재, 각 후보들은 각종 토론회나 정책발표회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후보들은 자신이 과학기술계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으며, 누구보다 과학기술계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말들은 후보의 입장에서 한표라도 더 받기 위한 선심성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대통령 선거와 비교할 때 과학기술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과거의 대선 때 쟁점화됐던 주요 이슈들이 과거지향적이고 정치보복에 치우치기 쉬운 것들이었음을 상기하면 많은 진보를 이뤄낸 셈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각 후보들이 제시한 과학기술정책은 과거에 비해 어떤 점이 달라졌으며 무슨 특징이 있을까.
이공계 기피가 화두
이번 대선에서 후보들이 공약한 과학기술정책의 가장 큰 특색은 ‘이공계 기피’라는 새로운 단어의 등장이다. 이 말은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번도 나온 적이 없다. 가장 가까운 지난 1997년의 대통령 선거 과정만 보더라도 어느 후보 하나 이런 단어나 현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공계 기피 현상은 지난 2001년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 미달사태를 계기로 처음 등장한 이후, 수능에서 이공계 지원자의 감소, 과학고생의 의대 진학 열풍, 이공계생의 사법시험 열풍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 현상에 대한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들이 나름대로 제시됐지만, 모두 단기적 처방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지난 11월 5일 한국정책학회 주최로 열린 ‘2002년 대통령 선거 정책분야별 공약토론회’에서는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통합21 등 4당의 정책담당자가 이공계 기피 해소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는 재벌정책과 주택문제, 농산물 개발 정책 등 9개 분야에 대한 토론이 열렸는데, 이공계 기피 현상이 9개 주제 중 하나로 ‘당당히’ 끼인 것이다. 이날 패널리스트로 나온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김동욱 교수는 “대선의 정책토론회 주제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그만큼 대통령 선거에서 과학기술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각 당의 정책개발자가 밝힌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해결책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한나라당 임태희 제2정조위원장은 “민간이 할 수 없는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분야에 예산을 집중 지원, 이 분야 인력을 육성하면 이공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민주당의 분석은 약간 달랐다. 김효석 제2정조위원장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투자액은 예산의 4.7%로 선진국에 비해 적지 않은데도 성과가 적은 것은 예산 분배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며 효율적 예산관리를 위한 혁신적 시스템 도입을 주장했다.
국민통합21 전성철 정책위의장은 기술고시와 행정고시의 비율을 강조했다. “기술고시와 행정고시 정원 비율이 일본은 1대1인데 우리는 1대6이나 될 만큼 기술경시 풍조가 심각하다”며 “이를 1대2로 바꾸고 기술자에 대한 대우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노동당의 장상환 정책위원장은 현 정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과학기술자의 생활안정을 소홀히 해 이공계 기피현상이 생겼다고 진단한 뒤 ‘합당한 대우책’ 마련을 공약했다.
과총의 토론회에 나온 이 후보와 노 후보도 이공계 기피 현상을 연설의 시작 소재로 삼아, 이 문제를 과학기술정책 중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 후보는 이공계 기피 현상 해결을 위해 ‘과학기술자의 처우 개선’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 과학장학생’과 해외 이공계 대학 국비유학생 제도의 신설, 그리고 병역특례제도의 개선을 공약했다.
이에 비해 노 후보는 ‘과학기술자가 존경받는 사회’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현재 3개밖에 없는 과학기술 관련 정무직(차관급 이상의 고위 공무원) 을 10개 정도 늘려 총 13개로 운영하고, 3급 이상의 기술직 임용가능 직위 중 기술직 임용비율 목표제를 도입해 더 많은 과학기술인이 정책결정에 참여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두 후보 모두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과학기술인의 생활 안정과 노후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청소년 사이의 이공계 선호 현상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과학교육의 대대적 혁신을 공약했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박상욱 운영위원은 “이공계 기피 현상이야말로 지난 5년 간 과학기술계가 처한 현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라며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정책 총괄할 수석비서 마련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과학기술정책의 또다른 특징은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이란 말에 잘 함축돼 있다.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이란 청와대의 경제수석과 통일·안보수석처럼 대통령 측근에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조언을 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이 말이 처음 나온 때는 지난 1997년의 대선 과정에서였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과학기술정책의 입안과 시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을 신설하겠다고 공약했다.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 공약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과학기술부가 과학기술처로 존재할 만큼 과학기술계가 다른 분야에 비해 ‘홀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지원하는 업무는 과학기술부를 포함해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등 정부내 19개 부처가 수행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프랑스 등 과학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최대 규모다. 과학기술에 관여하는 부처가 많은 만큼 연구 주제는 다양해지겠지만, 과학기술의 연구와 개발 주도권을 놓고 부처 간 알력 다툼이 심해 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있다. 많은 전문가는 과학기술의 효율적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업무를 일괄적으로 조정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해 왔다.
다행히 이번 대통령후보 중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공히 과학기술 수석비서관 신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노 후보는 지난 11월 12일 동아일보와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등 9개 기관이 공동주최한 대선후보 초청 IT포럼에서 과학기술 수석비서관 신설을 공약했다. 그는 정부 부처를 둘러싼 조직 개편 논의에 대해서는 “당선되면 집중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정부 부처 간 과학기술 업무 조정을 위해 청와대에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도 과학기술 수석비서관의 신설을 약속했다. 13일 열린 같은 포럼에서 정부기관과 산·학·연으로 구성된 핀란드 과학기술 정책부서인 ‘테케스’를 예로 들며, “정부 부처로 나눠진 과학기술 행정업무를 한군데로 통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기획·평가·분석 업무는 하나의 부서를 만들어 통합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를 위해 과학기술 정책을 조언할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신설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고려대 행정학과 함성득 교수(대통령학)는 “대통령 중심의 우리 정치체제에서 과학기술의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조정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수석비서관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게 효과적이다. 후보들의 약속이 얼마나 충실히 지켜질지는 두고봐야겠지만, 과·기 수석비서관은 청와대 내의 다른 수석비서관과 공동협조체를 구축해 과학기술정책의 종합적인 조정기능과 예산 결정권을 가져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구비 확대 넘어 내실 다져야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과학기술정책은 무엇일까. 바로 연구개발비의 확대다. 이번 대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든 대통령후보는 과학기술 투자액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과학기술 연구개발비는 국가예산 중 4.7%이며 국내총생산(GDP)의 2.65%를 차지하고 있다. 과총 정책포럼에 참가한 이 후보와 노 후보는 모두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을 GDP대비 3%, 국가예산의 7%까지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예산은 꾸준히 상승돼 왔다. 1980년까지 경제개발의 논리 속에 묻혀 독자적 예산을 ‘따내기’ 힘들었던 과학기술계는 198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면서부터 자신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그동안의 논리는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이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논리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독자적 예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1년 GDP 대비 0.62%이던 과학기술 투자액은 1987년 1.79%로 늘어났고 이런 추세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이런 성장의 밑바탕에는 선거 때마다 한 목소리로 예산 증액을 요구했던 과학기술인의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1997년의 대선에서도 모든 후보들은 연구개발비의 증액을 약속했다. 당시 이인제 후보와 이회창 후보, 김대중 후보는 모두 국가예산 중 7%를 연구개발 투자에 할당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과학기술 예산 증액 약속도 그저 그런 ‘선심성 공약’이 아닐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번 대선에 나타난 과학기술정책은 예전의 그것에 비해 확실히 대비되는 면이 하나 있다. 바로 ‘평가제도’의 도입이다. 사실 과학기술에 대한 예산을 늘리겠다는 말은 새로운 공약도 아니고 다가오는 21세기 무한경쟁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공약인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기술 예산과 정책에 대한 평가제도의 도입이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
노 후보는 과총 포럼에서 “예산의 확대는 물론 과학기술 투자비의 거품을 제거하고 알맹이를 높여 내실을 다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평가전문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국가연구개발제도를 종합적으로 조정·평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후보도 예산 자체의 증액은 물론 과학기술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후보는 과총 토론회에서 “한정된 예산의 낭비를 막고 효율적 투자를 위해서는 국가 전체적인 연구개발 사업의 사후 평가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 역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예산의 조정은 물론 사업 평가까지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오동훈 선임연구원은 “평가제도의 도입이야말로 과학기술의 실질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제도다.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투자만 있었지 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많은 예산이 낭비됐다. 선진국의 경우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정책은 반드시 이전 사업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다”며 “이번 후보들의 평가제도 공약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과학기술정책 자체의 진보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평가한다.
과학계 움직임 어느 때보다 활발
12월 19일은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그런데 한달이 채 남지 않은 11월 20일 현재, 대선의 쟁점으로 떠오르는 주요 이슈들은 과거 지향적이고 구태를 답습한 정책들이 적지 않다. 좀더 미래 지향적인 정책들은 없을까. 과학기술은 원천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정책을 대선 쟁점화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국가지도자의 경쟁력을 한단계 높이는 길이라고 보인다.
다행히 이번 대선에서 과학기술인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과총의 김시중 회장은 “이번 대선을 대하는 과학기술인의 태도는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자신의 속한 단체를 통해 한 목소리를 내는 한편,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총은 이미 두 후보에 대한 토론회를 끝냈고, 한국공학한림원도 지난 11월 12일 3당 대선 후보의 정책위의장 및 과학기술특보를 초청해 차기 정부의 공학기술정책 방향을 진단하는 포럼을 개최했다. 이외에도 젊은 과학기술인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각 후보의 과학기술정책을 묻는 설문을 계획중이고, 대덕연구단지의 전·현직 기관장을 포함한 중견 연구원 1백20명이 속한 대덕클럽도 11월 22일 이회창 후보를 초청해 간담회를 연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도 각 당의 후보에게 생명공학법과 유전자조작식품(GMO)에 대한 구체적 설문조사를 했으며, 경실련도 환경정책과 과학기술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다.
언론에서 과학기술정책을 다루는 태도 역시 크게 달라졌다. 동아일보는 이 후보와 노 후보를 상대로 IT정책포럼을 실시해 두 후보의 과학기술정책을 점검했고, 한국경제신문의 이공계 살리기 특별취재팀은 ‘국내 과학자중 떠오르는 스타가 있다면?’ 등의 구체적 항목을 갖고 각 후보에 대한 과학기술정책을 조사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역대 대통령의 국정능력을 평가하면서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이례적으로 많은 비중을 할당했다.
이같은 과학기술계의 움직임은 이번 대선의 과학기술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정책과 예전의 정책을 한층 보완한 바람직한 계획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1백만 과학기술인은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그가 선거기간에 말한 알차고 좋은 공약(公約이 당선되고 난 뒤 공약(公約)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진정으로 과학적 마인드를 갖추는 것만이 국가지도자와 국가의 경쟁력을 동시에 높여주는 지름길임을 후보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