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한 장 넘기며 ‘5월’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러나 가만히 좀더 생각해보자. 과연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마도 ‘5월’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어린 시절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어린이날 기억이나 부모님께 어버이날 편지를 드리자 감격하시며 대견스러워하시던-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난감을 받고 부모님께 편지를 드리던 그 때 어떤 일들이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났기에 아직까지도 기분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농담 반복해도 계속 웃는다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할 때는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도 의식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며칠 전 또는 몇 년 전의 기억들은 기억의 한 종류일 뿐이다. 즉 외현기억 또는 서술기억이라고 불리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기억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자전거를 배워본 적이 있는가. 처음에는 균형을 못 잡아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그러나 연습에 연습을 거쳐 우리 몸은 어느 새 편하게 자전거의 두 바퀴를 굴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암묵기억 또는 비서술기억의 한 예다. 비서술기억은 서술기억보다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에 많이 기여한다.
기억작용이 일어나는 뇌 조직이 어딘가에 대한 해답은 우연히 발견됐다. 1950년대 캐나다에서 한 의사가 H.M.이라는 심한 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뇌를 수술했다. 그 뒤 H.M.은 기억에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다. 어린 시절부터 수술 전 몇 년까지의 기억은 멀쩡한데 수술 후 기억은 어떤 것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다. 이때 지속할 수 없는 기억은 서술기억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H.M.에게 농담을 하면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조금 뒤에 다시 그 농담을 하면 그는 마치 새로운 내용을 듣는 양 웃었다. 그 뒤 또 같은 농담을 해도 여전히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정상인이라면 아무리 재미있는 얘기도 여러 번 들으면 싫증나는 법이다.
만약 H.M.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보자. H.M.은 분명 자전거를 잘 배울 것이며 타는 법을 터득해 오래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자전거를 배운 사실은 잊어버려 분명 “배운 적이 없는데요, 자전거를 탈 줄 몰라요”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자전거를 잘 타고 있는 중에도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H.M.은 과연 뇌의 어느 부위가 손상돼 서술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연구자들은 H.M.뿐 아니라 유사한 기억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뇌 측두엽에 들어있는 해마가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험동물에서 해마를 인위적으로 손상시켜본 연구자들은 해마가 서술기억 저장과정을 주도하는데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설에 따르면 처음 학습할 때는 정보가 뇌의 피질을 통해 전기신호 형태로 해마에 들어온다. 해마에서는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부위이자 전기신호의 전달통로인 시냅스를 통해 정보가 저장된다. 그리고 몇 주나 몇 달에 걸쳐 해마를 통해 피질이 계속 활성화되면서 피질의 시냅스는 점차 변화하고 평생 기억할 만큼 강력한 기억을 형성한다. 이를 ‘시냅스 강화’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해마 손상은 최근 기억과 새로 형성할 기억에는 영향을 주지만 오래전의 기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H.M.의 경우와 실험동물을 이용한 연구결과들이 이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
가장 널리 이용되는 동물의 학습과 기억 모델 중 하나로 ‘파블로프(Pavlov)식 조건형성’을 들 수 있다. 개에게 종소리를 들려주고 먹이를 주는 것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린다는 것. 이를 변형시킨 모델이‘공포조건화’로 소리와 먹이 대신 소리와 전기충격을 연관시키는 방법이다.
학습은 신경세포 자극 과정
쥐는 전기충격을 받으면 무서워서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이를 ‘프리징(freezing) 행동’이라고 한다. 특정한 소리를 먼저 들려준 뒤 전기충격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쥐는 전기충격이 올 것을 학습해 소리만 들어도 프리징 행동을 보인다. 즉 소리만 들어도 공포의 대상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어떤 쥐는 한 달 이상, 어떤 쥐는 평생 동안 이 기억을 갖고 살아간다. 이 학습에는 뇌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편도체 영역이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쥐는 전기충격을 받은 환경과 전기충격도 연관지어 생각한다. 즉 전기충격을 받은 환경에 넣어만 둬도 프리징 행동을 보인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가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심한 체벌을 가하거나 폭언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이는 숙제는 꼭 해야 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체벌이나 폭언도 함께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실험동물을 이용해 해마와 편도체를 중심으로 공포조건화 연구를 진행해왔다.
쥐의 뇌를 이용한 단순한 학습모델은 뇌 연구를 급속히 발전시켰으며, 단순히 뇌의 어느 부위가 중요한가를 떠나 세포와 분자수준에서 일어나는 변화까지도 보기에 이르렀다. 뇌란 결국 여러 종류의 신경세포들과 그들의 연결부위인 시냅스가 모여 있는 덩어리다. 기억은 여러 정보와 자극들이 뇌로 가 신경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연구자들은 신경세포 내에서 분자수준의 변화를 보기 위해 쥐의 뇌를 여러 절편으로 자른 다음 해마나 편도체 등에 전기생리학적 방법으로 일정한 자극을 가했다. 그 결과 자극의 세기와 빈도에 따라 시냅스가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때 시냅스가 강화되는 현상을 LTP(Long-Term Potentiation), 약화되는 현상을 LTD(Long-Term Depression)라고 한다.
LTP는 초기와 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1시간 정도, 후기는 4시간 이상 유지되는데, 각각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메커니즘과 유사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 LTP와 후기 LTP가 형성될 때, 즉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신경세포 내에서는 과연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초기 LTP의 경우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으면 세포 내에 이미 존재하는 단백질의 활성도가 변해 시냅스가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호에 빠르게 반응해 시냅스를 강화시키지만 새로운 단백질을 더 만들지 않으므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고 금방 원래의 강도로 돌아가고 만다. 즉 세포 내 단백질에 단기적인 변형이 일어난다는 얘기.
이에 반해 후기 LTP는 초기 LTP가 형성될 때 세포가 받은 자극보다 더 강한 자극을 받은 경우에 생성되며, 세포 내에서 새로운 유전자가 발현돼 새로운 단백질들의 합성이 활발히 일어난다. 이로써 시냅스 강화를 훨씬 더 오래 지속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단백질 합성은 필수 요소인 것이다.
쥐와 달팽이의 숨은 공로
신경세포 내 분자 수준의 연구에 불을 붙인 공은 달팽이에게로 돌아간다. 미국 컬럼비아대 신경생물학 권위자인 에릭 칸델 교수팀은 바다달팽이 군소에서 학습에 관련된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찾아냈다. 또 인위적으로 운동신경세포와 감각신경세포를 연결시켜 시냅스를 만들어 학습과 기억이 일어날 때 분자수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밝혀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칸델 교수는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군소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행동모델은 충격에 의한 민감화다. 여러 번 충격을 받은 군소는 다른 비슷한 자극에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후기 LTP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유전자의 발현과 단백질 합성을 통해 일어난다. 군소 민감화 학습에서는 세포 내에서 인산화 반응을 일으키는 효소인 카이네이즈가 관여한다고 밝혀져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종류의 카이네이즈 중 PKA가 유전자 전사인자인 CREB을 인산화시키고, 인산화된 CREB이 여러 유전자들을 다시 활성화시켜 새로운 단백질 합성을 일으킨다. 군소에서 시냅스를 변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쥐나 포유류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한번 강화돼 안정된 기억은 평생 유지될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강화됐던 기억을 회상했을 때 안정 상태에 있던 기억이 다시 불안정 상태로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강화가 다시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즉 ‘기억재강화’가 필요한 것이다.
필요 없는 기억 골라 지운다?
미국 뉴욕대 신경과학센터 죠지프 르두 박사팀은 2000년 공포를 느끼는 기억재강화 과정에 편도체의 단백질 합성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쥐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전기충격을 주는 과정을 반복해 학습시켰다. 이 쥐에게 다음 날 소리만 들려주고 기억을 회상시키면 당연히 프리징 행동을 보인다. 프리징 행동을 시험한 직후 연구팀은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는 물질을 편도체에 주입했다. 그리고 다음 날 소리를 들려주면 쥐는 더이상 공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프리징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잊은 듯 여기저기 코를 들이대며 돌아다닌 것이다.
단백질 합성은 장기기억 형성에 필수적이며 학습할 때 몇 시간 내에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학습 후 하루 있다가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는 물질을 넣어도 원래 기억에는 이상이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르두 박사팀의 결과는 회상을 할 때 원래 기억이 불안정해지면서 처음 학습할 때와 마찬가지로 단백질 합성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때 단백질 합성이 필요한 시간도 학습할 때와 마찬가지로 회상 후 몇 시간 동안이다.
기억재강화는 연구자들에게 흥미를 끈 동시에 의심을 받은 현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의심이 기억재강화가 사실은 처음 학습한 것에 대한 기억강화 현상의 연장일 뿐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 즉 처음 학습에 대한 강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몇 시간 또는 하루가 지나기 전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2004년 5월 ‘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결과는 이런 의심을 반박하면서 기억재강화가 기존의 기억강화 현상과 차별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학습의 기억강화에는 관여하지 않던 Zif268이라는 유전자가 기억재강화만 특이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억강화에 관여한다고 알려진 유전자 중 하나인 BDNF가 기억재강화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처음 학습이 강화되는 경로와 회상 후 나타나는 기억재강화가 서로 다른 독립적인 경로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기억재강화 연구를 통해 기억력을 더 높여 암기과목 내용을 술술 외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던 원하는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일도 가능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주의하자. 나쁜 기억을 회상하고 나서 바로 단백질 차단제를 처방해 나쁜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때 소중한 기억이 같이 떠오르면 그 기억마저 잊어버릴 수 있음을.
기억은 나의 정체성
어느 날 갑자기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주인공 수진(손예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모든 기억을 잊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잊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해마가 손상돼 서술기억을 잃어버려도 우리 자신의 모든 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같은 병으로 암묵기억까지 손실되면 우리 개성까지도 파괴되고 만다.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히 배운 내용을 기억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 삶을 형성하는 모든 것이다. 즉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로서의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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