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갑자기 ‘예쁜 남성, 강한 여성’으로 변한 걸까. 동물의 세계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 보인다. 포유류, 새, 곤충, 양서류 등 수많은 동물에서 ‘예쁜 수컷, 강한 암컷’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냥의 왕 암사자
올들어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개봉된 ‘칼라하리 라이언’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한 켠을 지배하는 사자 무리가 나온다. 늙은 숫사자 한 마리와 암사자 두 마리로 이뤄진 사자 가족, 그리고 여기에 도전하는 젊은 숫사자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는 사자가 물웅덩이 주위의 영양 떼를 사냥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사냥하는 사자가 모두 암컷이라는 사실이다. 소리 죽여 영양 떼에 접근하고 맹렬하게 달려들어 앞발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영양을 잡는 것은 모두 암사자다. 동물의 세계에서 강한 암컷 1위에 오를 만 하다. 정작 숫사자는 영화 속에서 사냥하는 모습 한번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암사자가 잡은 영양을 얌체같이 가로채기만 할 뿐이다. 만화영화 ‘라이언 킹’에서 보여주던 용맹한 모습은 어딜 간 걸까?
실제로 아프리카 초원에서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개 암사자다. 숫사자는 어슬렁거리며 사냥에 살짝 도움을 주거나 사냥이 끝난 뒤 고기를 먹곤 한다. 숫사자가 싸움을 할 때는 대개 같은 사자끼리 무리의 리더 자리를 놓고 다투거나 하이에나 등 다른 육식 동물을 쫓아낼 때다. 물론 홀로 사는 사자는 사냥을 하지만 암사자와 같이 살면 사냥은 일반적으로 암사자가 한다고 한다(앞으로 암사자를 동물의 여왕으로 부르자!).
성덕여왕, 측천무후, 클레오파트라, 퀸 엘리자베스 2세···.
모두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명한 여왕이지만 통치자의 역사에서 여자는 아무래도 소수에 머문다. 그러나 일부 동물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암컷이 대대손손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동물이 개미와 벌이다. 두 곤충의 세계에서는 여왕개미와 여왕벌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다른 암컷이라면 몰라도 수컷은 감히 도전장을 내밀지 않는다. 여왕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벌과 일개미는 모두 암컷이다. 병정개미, 집 지키는 개미 모두 암컷이다. 수컷 개미와 수컷 벌은 태어난 뒤 열심히 치장만 하다 여왕 개미와 짝짓기를 한 뒤 모두 죽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수컷 개미가 짝짓기를 앞두고 한껏 치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데이트를 앞둔 여자가 화장하고 옷을 고르는 모습과 비슷하다(뒤에 나오는 ‘예쁜 수컷’의 한 예다).
여왕개미의 세계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고 고도의 정치력이 작동한다. 흔히 강력한 여왕개미 한 마리가 독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여왕개미가 사는 개미 왕국도 있다. 이런 왕국의 초창기에는 2∼50마리에 이르는 여왕개미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알을 많이 낳는다. 일개미들이 충분히 늘어나면 사람과 비슷한 ‘선거철’이 다가온다. 일개미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아 ‘투표를 하는 것처럼’ 가장 뛰어난 여왕개미를 선정한다. 대개 알을 가장 많이 낳고 튼튼한 여왕개미다. 나머지 여왕개미들은 모두 살해된다. 여왕 개미의 세계에서도 일단 강하고 볼 일이다.
아르헨티나의 어떤 불개미는 여러 여왕개미가 제국을 지배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이룬다. 일개미는 각각의 여왕개미들에게 일정한 양의 먹이만 줘서 하나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조절한다. 또 유전적으로 아주 월등한 능력의 여왕개미가 태어나면 일개미들이 그 여왕개미를 죽여 버린다. 뛰어난 여왕개미가 다른 여왕개미들을 평정하고 단일지도체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조랑말은 아줌마 천하
제주도에 사는 조랑말도 강한 아줌마의 세계다.
한국마연구회 회장인 제주대 강민수 교수(동물자원과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제주도 조랑말 집단은 나이 많은 암말이 주도권을 쥔 모계 사회다. 수말은 1년의 대부분을 집단의 일개 구성원으로만 지내고 무리를 이끄는 역할은 발정과 번식기에만 제한된다.
제주도 조랑말 집단에서는 출생도 ‘아들 선호’가 아닌 ‘딸 선호’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노정래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제주도 조랑말의 사회에서 서열이 높은 어미는 암컷 새끼를 더 많이 낳고 낮은 어미는 수컷을 더 많이 낳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 박사는 “서열이 높은 어미는 새끼를 키울 때에도 수컷보다 암컷 새끼에게 더 오래 젖을 주는 성차별까지 한다”고 설명했다. 서열이 낮은 어미는 반대로 수컷을 낳아 가능한 많은 암컷과 교미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전략을 구사한다.
성차별을 넘어 사나운 암컷에 시달리다 죽는 곤충도 있다. ‘매맞는 남편’의 곤충판이랄까.
대표적인 것이 사마귀다. 사마귀는 암수가 교미를 끝내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곤 한다. 심지어 교미 도중에 암컷이 수컷을 머리부터 먹어치울 때도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행동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임신한 암컷에게 수컷이 자신의 몸을 영양분으로 제공하는 한편 짝짓기 시간을 최대한 오래 가져 자신의 자손을 확실하게 남기려는 진화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수컷이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쾌락에 빠져 있는 것인지 교미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인지는 사마귀만이 알 일이다.
사마귀에 대한 이 유명한 이야기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실험실에 사는 암사마귀는 거의 100% 교미를 끝낸 수컷을 잡아먹지만 야생 상태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야생 상태에서는 교미를 끝낸 수컷이 종종 암컷으로부터 도망쳐 목숨을 구한다고 한다.
화장하는 수컷 원앙
예쁜 수컷이 가장 많은 곳은 새의 세계다. 대부분의 새는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하다.
옛 어른들은 ‘다정한 한 쌍’ 이미지로 원앙새를 많이 떠올린다. 원앙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무지개 색깔로 화려하게 치장한 원앙과 잿빛 깃털로 뒤덮인 원앙이다. 화려한 새가 수컷이고 칙칙한 새가 암컷이다. 천둥오리를 비롯해 꿩, 공작, 호사도요 등도 모두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암컷이 더 아름다운 새도 일부 있다).
새 뿐만이 아니다. 사자는 수컷만이 멋진 갈기를 갖고 있다. 사슴도 수컷이 멋진 뿔을 갖고 있다. 한국 서해안에 사는 농게는 수컷이 엄청나게 큰 집게발을 갖고 있다. 거의 몸통 크기만 하다.
왜 이처럼 수컷이 암컷보다 아름다울까.
다 짝짓기 때문이다. 대개의 동물들은 수컷이 암컷 앞에서 구애 경쟁을 펼친다. 수컷끼리 싸우기도 하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해 암컷의 애정을 얻어내려는 동물도 많다. 자신이 ‘꽃미남’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꽃미남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세균에 감염되거나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새의 경우 돋보이는 색깔을 가질수록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잡아 먹히기 쉽다. 그런데도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내가 돋보이는 색깔을 가졌는데도 살아남은 것은 다른 경쟁자보다 더 빠르고 강하기 때문이다. 또 치장을 할만큼 남보다 더 많은 먹이를 먹을 능력이 있다’고 암컷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다.
이는 이스라엘 행동생태학자 아모츠 자하비가 내놓은 ‘핸디캡 이론’으로 진화생물학에서 매우 유명한 이론이다. 현대사회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화려한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암컷이 잘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인 이유는 수컷에게 그런 구애를 할 필요가 없고 알을 품을 때 육식 동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수컷새조차 암컷이 자신의 알을 품을 때는 잘 가까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암컷을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향수를 뿌리는 것도 창피한 일이 아니다.
호주 애들레이드대 화학과 존 보위 교수는 청개구리 수컷이 물에 녹는 페르몬을 이용해 암컷을 유혹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보위 교수가 물탱크 속에 청개구리 페르몬 40나노그램(ng)을 풀어놓자 1m 떨어진 곳에 있던 청개구리 암컷이 20초도 안돼 페르몬을 넣은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짙은 향수는 효과가 없듯이 페르몬이 너무 많으면 암컷은 혼란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였다.
임신하는 아빠 해마
엄마의 역할을 떠맡는 ‘전업 주부’ 수컷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동물이 펭귄과 해마다. 황제펭귄은 암컷이 알을 낳은 뒤 바다로 나가 새끼가 부화할 때쯤 돌아온다. 이 동안 수컷이 알을 품는다. 수컷은 암컷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알만 지킨다.
해마는 아예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 해마 암컷이 수컷의 육아낭(자궁과 비슷한 육아주머니)에 난자를 넣으면 수컷이 정자를 넣어 임신한 뒤 2~6주 동안 자신의 몸 안에서 새끼를 길러 낳는다. 수컷이 육아낭 안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동안 암컷은 정기적으로 수컷을 찾아와 상태를 살핀다. 수컷은 한 번에 100~200마리의 아기 해마를 낳는다.
예쁜 수컷이 적지 않다고 해서 모든 수컷이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한 암컷도 같다. 모든 동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 강한 암컷도 됐다가 예쁜 수컷도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필요에 따라 골고루 발휘하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사람이라는 동물에게 가장 유리한 생존 전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