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단비가 촉촉이 내린 지난 9월초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편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흡사 주유소를 본딴 듯한 이 건물의 정체는 올 10월 1차 완공을 앞두고 있는 ‘한국형 수소충전소’. 국내에선 처음으로 설립되는 수소제조시설이자 수소차량전용 연료공급 시설이다. 차세대 에너지로 지목되고 있는 수소의 제조, 저장 기술이 이 한곳에 모두 들어있다.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에너지연구원 윤왕래 박사는 공사장을 둘러본 기자에게 “내년 상반기 중에는 수소를 생산해 실제 수소차량을 충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에너지연구원 내에는 수소제조기술을 연구하는 윤 박사팀 외에도 여러 연구팀이 각종 수소 관련 연구에 한창이다.
수소를 둘러싼 선진 각국 노력
지난 2003년 부시 미대통령은 의회에서 “수소기술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 기술이며 향후 5년간 수소개발에 모두 1백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부시의 이런 깜짝 발표에 세계는 의아해 했다. 그러나 이번 발표가 그리 새삼스런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1990년대부터 ‘수소에너지개발법’을 통과시키고 에너지부(DOE) 주도로 수소에너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올해 연방정부 차원에서 투자한 연구비만 4억8천만달러, 우리돈으로 5천6백억원에 이른다.
일본 또한 관료들이 직접 수소연료전지차를 타고 다니는 등 수소기술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0년까지 24억달러를 들여 일본 전역에 모두 5백만대의 수소차량을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친환경정책으로 유명한 독일과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은 수소시내버스를 도입해 현재 시범 운행중이다. 선진 각국은 2005년까지 제도 정비와 기술 실증을 마치고 2005-2010년 상업적 도입단계를 거쳐 2020년까지 일반에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한국도 지난해 9월 정부 산하에 ‘고효율 수소에너지 제조·저장 이용 기술개발사업단’ (이하 수소사업단)을 발족시켜 수소 기술 개발과 정책 수립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또한 올 5월에는 수소연료전지사업단이라는 별도 조직을 구성해 수소기술 보급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SK와 LG정유 등 국내 주요정유사와 삼성엔지니어링, LG화학, 몇몇 중소기업들도 속속 수소연구에 뛰어들고 있다. 2015년쯤이면 전국에 총 50개의 충전시설과 ‘Hydrogen’ (수소)마크가 선명히 찍힌 1만5천여대 차량이 보급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오는 2010년에는 전세계 수소충전소가 2천개에 육박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쯤되면 의문이 생긴다. 세계 각국은 왜 이처럼 수소에 목을 맨 것일까.
차세대 에너지로 각광받는 수소
원소번호 1번, 원자량 1.0079에 불과한 수소는 말 그대로 가볍고 잘 타는 기체다. 산소와 결합하면 쉽게 불이 붙고 때론 강한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수소가 산소와 결합해 연소하면 에너지와 물이 나온다. 역으로 전기를 이용해 수소를 생산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장점은 연소할 때 이산화탄소 같은 공해물질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깨끗하고 효율 좋은 에너지’라는 별명도 이처럼 독특한 수소의 성질에서 유래했다.
수소가 에너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수소는 에너지원으로서는 찬밥신세였다. 공업용 암모니아제조와 제련, 메탄올 제조에 쓰였을 뿐 에너지로 거들떠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폭발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역시 수소의 에너지화에 걸림돌이었다.
화석연료고갈과 지구온난화 방지 목적이라는 측면 외에도 수소가 차세대 에너지로 주목받는 이유는 너무나 풍부한 자원이라는 점이다. 수소는 물과 화석연료, 생물체 등 지구 어디에든 존재한다. 지구의 3분의 2를 뒤덮고 있는 물은 무한정 수소를 공급할 수 있다. 사용후엔 물로 돌아간다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전자를 방출했다가 흡수하는 반응을 반복하면서 전기를 무한대에 가깝게 생산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런 까닭에 미래의 촉망받는 에너지로 영화에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체인리액션’ (1996년작)에서 수소는 물을 원료로 하는 무공해 에너지원으로 그려진다.
수소를 생산하는 방법은 많다. 가장 오래된 방식이자 지금까지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은 1백년전 개발된 전기분해법. 하지만 전기분해방식은 투입된 에너지에 비해 산출되는 수소량이 너무 작아 비효율적이다. 특히 화석연료로 생산한 전기로 제조한 수소는 차세대에너지로서는 낙제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람이나 지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수소를 만드는 방식이다. 재생가능한에너지를 직접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화석연료와 달리 에너지 효율이 낮고 저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기로 저장하는데도 한계가 많다. 따라서 재생가능에너지로 수소를 만들고 필요할 때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수소는 에너지라기보다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매체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지열이 많은 아이슬란드나 바람이 강한 네덜란드, 태양에너지 연구가 활발한 독일에서는 이런 1차 에너지를 활용해 수소가 제조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도 자연력을 이용한 수소제조연구가 진행중이다.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직접 수소를 생산하는 방식도 고려되고 있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좀더 나은 기술이 나오지 않는 한 수소생산비용만 올라갈 뿐이다. 그러나 재생가능에너지를 이용한 수소생산은 필요할 때마다 전기를 만드는 분산형발전 모델의 한 전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과도기적으로 천연가스와 물을 고온에서 반응시켜 수소를 생산하는 방식이 고려되고 있다. 약간의 부산물이 나오지만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전기분해 방식보다 상용화 가능성이 더 높다. 열과 금속산화물 촉매로 수소를 생산하는 열화학적 방식이나 원자력을 이용한 수소생산도 적극 고려되고 있다. 특히 원자로가 생산한 고온가스나 전기로 수소를 만드는 원자력 수소생산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과기부와 원자력연구소는 오는 2019년까지 국내 하루 석유소비량의 20%(8만5천배럴)을 대체할만한 양의 수소를 생산하는 상용로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생산된 수소는 기존 가스공급망이나 탱크로리를 타고 각 가정과 건물, 발전소, 충전소 등에 공급될 예정이다.
수소사업단장인 김종원 박사는 “현재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제조방식과 가정같은 소규모 생산방식 모두가 연구되고 있다”면서 “중요한 점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좀더 값싸게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수소한국’ 을 이끌 국내 기술의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전문가들은 “수소가 에너지로 쓰이려면 저렴한 제조 방법의 개발뿐 아니라 효율적인 저장, 이용 기술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한다.
비교적 앞서 나가고 있는 쪽이 수소연료전지 분야다. 수소연료전지란 수소와 산소를 결합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일종의 발전기다. 전해질에 따라 고분자형과 인산형, 고체산화물형 등 그 종류는 매우 많다. 우주개발 초기부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우주선에 탑재됐지만 민간에서 사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요즘 연료전지 보급의 일선 역할은 수소연료전지차량이 담당하고 있다. 미국은 오는 2020년까지 전체 차량생산대수의 25%로 끌어올려 수소차시대로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우리 정부 역시 연료전지차 개발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특히 수소연료전지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산업자원부는 앞으로 5년 동안 2천5백억원을 투자해 수소충전소와 연료전지차량을 보급할 예정이다. 과학기술부 역시 올해 처음으로 연료전지 원천기술 개발에 70억원을 책정했다. 때맞춰 국내 업체들도 관련 연구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산타페를 개조한 수소차 개발에 성공, 시험생산에 들어간데 이어 3년간 친환경차량 연구에 1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엔지니어링도 올해말 연료전지를 사용하는 수소스쿠터 시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수소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좀더 다양한 연료전지들이 나와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수소사회에서는 각각의 가정과 건물마다 연료전지와 수소생산시설을 갖추고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그만큼 연료전지의 용량도 수W-수백MW급으로 다양해져야 한다. 최근에는 크기도 다양해져 노트북PC나 휴대전화 배터리에까지 수소연료전지가 쓰이기 시작했다. 삼성SDI와 LG화학 등 기존 전지 업체들은 노트북 모바일용 소형 연료전지를 잇따라 선보였다. 수소 하나면 자동차뿐만 아니라 노트북PC나 휴대전화까지 생활 속 전자제품 모두를 사용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높은 가격과 효율성 문제는 여전히 연료전지의 완전 상용화를 가로막고 있다.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게 연구자들의 생각이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전지의 크기를 좌우할 저장방법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량으로 수소를 얻는다 하더라도 안전하게 보관하고 운송하는 방법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극저온과 고압의 현 방식만을 따른다면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간다. 얼마나 작은 용기에 많은 수소를 저장하느냐는 수소연구자들의 주요 화두다.
나노기술을 이용해 만든 용기에 수소를 압축저장하는 기술이 비교적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기술로 꼽힌다. 기존 천연가스의 저장기술을 개량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연구도 가장 앞서 있다. 현재 수소사업단 내에서는 앞으로 개발될 수소차량에 탑재할 7백 기압 용기 개발이 한창이다. 한단계 높은 방식으로 수소저장화합물을 이용해 더욱 압축 저장하는 방법도 현재 연구 중이다.
수소한국 시대 언제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소시대가 쉽게 올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수소가 자연에서 쉽게 얻어지는 물질이 아니라는 점이 큰 걸림돌이다. 대부분 수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해 안정된 화합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천연가스나 원자력을 이용하는 생산방식 역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한계가 있다.
김종원 단장도 이런 부분을 인정한다. “자원고갈로 새로운 에너지 시대가 열리게 되겠지만 수소가 얼마만큼 주도할지는 이런 기술적인 난제들이 얼마나 빨리 해결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 수소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미국과 일본은 수소 에너지 기술의 표준화를 두고 대립하는 모습이다. 일본이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중심으로 수소표준화를 시도하자 미국이 ‘수소경제를 위한 국제협력기구’ (IPHE)를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기존 석유경제를 쥐락펴락한 셸(Shell), BP 등 세계적인 메이저 석유회사들까지 가세해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에너지연구원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경 수소제조시장 규모는 연간 8백억달러. 조만간 저장탱크의 구멍 크기 하나에도 엄청난 이권이 오가는 상황이 전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에너지연구원 배기광 박사는 “앞으로 수소경제 사회에는 미국과 일본, 유럽의 3자 구도에서 한국이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느냐가 과제”라고 말한다. 독자 기술을 서둘러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이를 위해 분야별로 진행되고 있는 개발계획들을 서로 연계하고 관련 법정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잡종 강세’ 하이브리드가 온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수소연료전지차량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할 시점은 2020년경. 그때까지는 하이브리드차가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하이브리드’ 는 ‘잡종’ ‘혼혈’ 이란 뜻의 영문표기. 하이브리드 자동차란 가솔린 엔진과 전기모터로 움직이는 차량이다. 속도에 따라 엔진과 전기모터를 번갈아 가며 작동하며 주행중 발전한 전기를 다시 전지에 충전해 사용한다. 하이브리드 차량은 일반차량에 비해 매연이 적고 연비가 약 50%정도 높다.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타는 올해 총 15만대 하이브리드 차량을 판매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2006년까지 판매대수를 2배로 끌어올린다는 계산이다. 혼다와 니산차 역시 각각 보급형 차량을 내놓았다.
일본의 질주에 바짝 긴장한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의 추격도 시작됐다. 제네럴모터스는 오는 2007년까지 연평균 1백만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세운다는 계획이다. 올해 미국 전역에서 수소차량 판매율은 36%나 껑충 뛰었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아직 열악한 편. 현대자동차가 1995년 FGV-1을 시작으로 아반떼, 베르나, 카운티 버스, 클릭 등 몇대의 시제품만을 선보인 정도에 불과하다. 쌍용자동차 역시 올해 들어서야 디젤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을 선언, 뒤늦게 대열에 동참했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신에너지혁명이 시작된다
01. 10년내 진짜 석유대란 온다
02. 바람과 태양이 세상을 바꾼다
03. 수소 경제가 뜬다
연료전지
04. 핵융합 vs. 우주태양광 - 2050년 상용화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