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이탈리아 커피점에서 오토매틱하게 커피가 끓으면 핸들을 꽉 눌러서 꼭 한컵만 나오게 하는 에스프레소 커피다. 굉장히 진하고 빛이 검고 향기로운 커피였다.… 내가 만약 다시 구라파에 간다면 나는 우선 커피를 마시겠다.”
1950년대 독일에서 유학하고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작가 전혜린. 그녀의 유고 수필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한편인 ‘지나간 시절의 미각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유학시절 맛본 각종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전후 피폐한 나라에서 유학 온 젊은 인텔리 여성에게 에스프레소의 짙은 향과 강렬한 맛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나보다.
에스프레소의 고장 나폴리에서 모의 재판
이런 전혜린이 에스프레소가 피고인의 신분으로 이탈리아의 한 법정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커피를 처음 접한 5백년 전 중세유럽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난 9월말에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진 무대는 다름아닌 커피의 진수라는 에스프레소의 나라 이탈리아의 나폴리. 커피콩을 곱게 갈아 담고 여기에 고압의 수증기를 통과시켜 얻는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특히 남유럽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인구 5천8백만인 이탈리아에서만 매일 7천만잔의 에스프레소가 소비되고 있다.
나폴리 소재 한 대학의 약학과에서 진행된 이번 재판에는 12명의 관계자들이 참고인으로 출석했고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차출된 법대 교수들이 진행을 맡았다.
커피가 기소된 것은 물론 카페인 때문이다. 볶은 커피콩에는 무게비로 0.8-1.8%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커피 한잔에는 카페인이 얼마나 들어있을까. 커피콩의 종류나 커피의 농도, 양에 따라 적게는 40mg에서 최대 1백80mg까지 카페인이 들어있는데, 평균 1백mg으로 보고 있다.
커피가 백해무익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인 원고측은 커피가 근심, 초조, 불안을 유발하고 카페인 금단 증상으로 두통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또 커피를 마시면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생활리듬이 깨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우므로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도 커피의 큰 폐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커피를 옹호하는 피고측은 커피가 중추신경계를 자극해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정신을 명료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또 커피의 음용은 뇌속의 도파민 농도를 증가시킴으로써 몇몇 암과 파킨슨씨병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고 주장했다. 소금처럼 커피도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과도할 때만 문제라는 것이다.
카페인 관련 논문 매년 2천 건
원고측과 피고측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엄청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치열한 설전을 펼쳤다. 사실 커피와 카페인은 기호식품과 향정신성 약물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주제다. 오늘날에도 매년 1천5백-2천건의 관련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첫번째 논쟁은 커피로 인한 카페인 금단 증상이다. 뇌속에서는 아데노신이라는 물질이 분비되는데 피곤한 신경을 쉬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카페인의 구조가 아데노신과 비슷하기 때문에 아데노신이 결합해야할 수용체에 대신 달라붙어 그 작용을 방해한다. 따라서 카페인이 몸에 들어오면 쉬라는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은 그 대응책으로 수용체의 숫자를 10-20%정도 늘린다. 이런 상태에서 카페인 공급이 끊기면 아데노신 신호가 증폭돼 졸림이나 우울증, 두통 등 카페인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피고측은 카페인 금단 증상은 다른 약물과는 달리 길어야 1주일이면 사라진다고 말한다. 가장 흔한 금단 증상인 두통도 2-4일 정도 지나면 없어진다. 카페인은 다른 약물에 비해 중독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약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카페인으로 인한 불면증이 도마에 올랐다. 일본과학자의 실험 결과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실 경우 잠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4배나 늘어난다. 또 잠의 질도 떨어져 카페인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사람은 잠자리에서 뒤척거리고 자주 깨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페인이 불면증을 일으키는 이유는 체내에 남아 아데노신의 작용을 계속 방해하기 때문이다. 카페인의 반감기(체내 약물의 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는 3-7시간 정도인데 남성보다 여성이,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이, 비흡연자보다 흡연자가 카페인을 빨리 분해한다. 한편 음주는 카페인 분해력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같은 커피를 마셔도 술을 마신 한국 남성은 담배를 피우는 영국 여성보다 카페인의 효과가 5배정도 길게 지속된다.
카페인 민감성 개인차 커
이에 대해 피고측은 카페인으로 인한 수면장애가 카페인을 규칙적으로 접하지 않는 사람에게 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카페인을 습관적으로 섭취하는 경우는 이런 부작용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페인에 대한 민감도는 개인차가 심해 카페인의 효과가 느껴지는 최소 농도가 1.8mg에서 1백78mg까지 거의 1백배나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하루에 커피를 여러잔 마셔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잔만 마셔도 밤을 꼬박 새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민감한 극소수의 사람 때문에 커피를 유해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다음으로 원고측은 카페인과 불임의 상관관계를 들고 나왔다. 1991년 덴마크에서 1만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했던 연구 결과 커피나 차를 하루 8잔 이상 마실 경우 불임이 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미국에서 1천5백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하루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는 여성 중 20%가 임신하는데 1년 이상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커피를 마시지 않거나 3잔 미만일 경우 비율이 10% 미만이다.
그러나 피고측은 이런 결과 역시 양의 문제이지 카페인 자체가 불임을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실제 1992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두잔의 커피는 정자를 활발하게 하고 밀도를 높여 오히려 임신이 될 확률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두잔이 넘어가면 정자의 활동성과 밀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결국 알코올과 마찬가지로 적당량은 부부생활에 활력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피고측은 전문가를 통해 커피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참고인의 한 사람인 약학자 파피아대 마리아 대글리아 교수는 “커피를 하루 대여섯잔씩 마신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3잔 미만은 대장암이나 간경화를 예방하는 작용이 있다”며 커피를 적극 옹호했다.
수세에 몰린 원고측은 커피가 설탕의 섭취를 부추기고, 위스키를 섞는 아이리쉬(Irish) 커피의 경우는 알코올까지 마시게 해 건강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측은 카페인이 근육의 에너지원으로 당 대신에 지방을 쓰도록 촉진한다는 최근 호주스포츠연구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그 결과 선수들이 더 오랫동안 운동을 지속할뿐더러 피로가 느껴지는 시점도 최대 60%까지 늦춰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인들 역시 운동 전에 커피를 한잔 마시면 체지방을 연소하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커피야말로 술에 젖어있던 유럽을 구한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들은 지금은 고전이 된 독일 작가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의 저서 ‘커피의 역사’를 펼쳤다. 야콥은 이 책에서 커피를 18세기에 지적인 삶의 대폭발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슐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반세기 전 우리 젊은이들이 와인통과 술도가에 빠져있던 혐오스러운 선술집 시대는 지나갔다.… 정신을 맑게 하는 커피는 술과 달리 뇌에 영양을 공급하고 머리를 맑게 해주어 진리의 밝은 빛으로 현실을 비추고, 성욕을 억제하여 성적인 자극 대신 마음을 자극한다.”
카페인 치사량은 1백잔 분량
역사에 대한 무지로 뜻밖에 일격을 당한 기소인측은 어쨌든 카페인이 엄연히 독성 물질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실제로 정제된 카페인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카페인 자체는 반짝이는 결정성 고체로 약간 쓴맛에 향기는 없다. 따라서 커피의 향기는 카페인과는 전혀 무관하다. 순수한 카페인은 아주 유독해 10g 정도만 복용해도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카페인이 올림픽 선수의 도핑테스트 금지약물 목록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소변 속의 카페인 농도가 15mg/L가 넘지 않아야 한다. 실제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호주의 5종경기 선수 한명이 카페인 때문에 기록이 박탈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옹호론자들은 카페인 10g이면 커피 1백잔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라고 반박했다. 커피나 차의 형태로 소비되는 카페인의 양은 연간 12만톤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커피 과용으로 숨진 사람이 3명뿐이라는 자료를 제시했다. 다만 카페인을 포도당으로 착각해 포도당 링거를 맞은 환자가 사망한 사례가 간혹 보고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료진의 실수 때문이다. 도핑테스트에 대해서도 커피 10잔을 마셔도 이 수치에 이르지 않는다면서 카페인을 의도적으로 복용하지 않는다면 도핑테스트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커피가 일의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주장도 별로 공감을 얻지 못했다. 커피 옹호자들은 카페인이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활력을 주며 기분을 좋게 하고 명료한 사고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커피를 마시는데 빼앗긴 시간보다는 커피로 인한 생산성 향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커피 예찬론자 완승
참고인의 한명인 이탈리아 요리학회의 저마나 밀리테르니는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커피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지만 신체적으로 재충전도 되고 서로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커피를 예찬했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그나마 커피가 삶의 윤활제 구실을 한다는 주장이다.
치열한 공방으로 시작했던 논쟁은 점차 커피에 대한 공감이 대세를 이루면서 막판에는 커피 예찬론 일색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번 재판에 대한 판결 역시 커피의 완승으로 끝났다. 판결문은 “커피에 대한 혐의 내용은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과도하게 탐닉했을 때나 일어나는 일”이라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사실 커피의 승리는 재판 이전부터 예견돼 있었다. 이제와 커피를 거부하기에는 인류는 카페인과 너무나 깊숙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일년에 소비되는 커피는 대략 6천억잔으로 전세계 인구(60억으로 가정) 수로 나누면 일인당 1백잔 꼴이다. 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인 셈이다. 전세계로 수출되는 커피의 금액은 1백4억달러(2000년)로 우리 돈 12조원에 해당한다. 석유 다음으로 무역 규모가 큰 품목이 바로 커피다.
어쨌든 이번 판결로 전세계 커피 애호가들은 마음 편하게 진한 에스프레소부터 감미로운 비엔나 커피까지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게 됐다. 적당한 커피는 몸에 좋다는 담소까지 곁들여 가면서….
카페인에 취한 거미가 지은 거미집에는 먹이가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커피나무는 왜 카페인을 만들까. 단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려고? 물론 카페인을 만드는 능력 때문에 커피나무는 인류의 도움으로 지구상의 넓은 지역에 광범위하게 자손을 퍼뜨린 성공적인 종에 속한다. 그러나 인류가 카페인의 맛에 취한 것은 기껏해야 2천-3천년 정도다.
커피하면 남미의 콜롬비아나 브라질이 연상되지만 커피나무의 원산지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영토인 동아프리카다. 기원전 1천년-기원후 5백년까지 이 지역에서 살던 유목민 오로모스(Oromos) 부족은 커피를 빻아 지방과 섞어 탁구공 모양으로 빚어 흥분제로 애용했다고 한다.
커피나무가 만들어내는 카페인의 화학구조를 보면 알칼로이드라는 물질군에 속한다. 식물은 이동성이 없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화학무기들을 개발해왔다. 이를 식물의 2차대사물이라고 하는데 알칼로이드도 그 중 하나다.
커피나무를 비롯해 차나무, 카카오, 마테(mate), 콜라, 구아라나(guarana) 등 여러 식물에서 카페인이 발견된다. 연구 결과 카페인은 유해한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죽이고 몇몇 해충을 불임이 되게 만드는 것으로 밝혀졌다. 식물이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카페인을 만들게 진화했다는 학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미국 하버드대 의대 신경학자인 제임스 나탄손 박사다.
나탄손 박사는 1984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카페인이 많은 곤충과 그 유충의 행동과 성장에 장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밝혔다. 카페인에 중독된 모기의 유충, 즉 장구벌레는 헤엄을 제대로 못쳐 물표면에 올라오지 못해 익사한다.
곤충에 대한 카페인의 신경독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지난 1995년 미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행한 거미실험이 있다. 연구자들은 거미를 카페인 등 향정신성 약물에 노출시킨 뒤 어떻게 거미집을 짓는지 관찰했다. 약물의 독성이 강할수록 거미집의 형태가 정상에서 벗어날 것이다. 아라네우스 디아데마투스(Araneus diadematus)라는 학명의 흔한 집거미가 만든 거미집을 보면 약물에 따라 변형된 정도가 다르다.
결과는 놀랍게도 카페인을 먹은 거미가 가장 엉터리로 거미줄을 쳤다. 다른 약물에서는 ‘굴대통과 바퀴살’이라는 거미집의 기본 구조가 유지되지만 카페인에 노출된 경우 이런 패턴을 전혀 볼 수 없다. 이런 엉터리 거미집으로는 모기 한마리도 제대로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독한 카페인이 왜 사람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섭취한 카페인의 상대적인 양 때문이다. 곤충이 커피나무의 잎이나 열매를 먹을 경우 카페인의 농도가 1% 내외다. 만일 사람도 주식이 커피나무라면, 하루에 1kg을 먹을 경우 약 10g, 즉 치사량에 해당하는 카페인이 흡수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에 커피 두세잔에 해당하는 2백-3백mg 정도를 섭취하므로 곤충에서 보이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카페인을 만드는 식물의 주위 토양에는 해가 지날수록 떨어진 잎이나 열매에서 나온 카페인이 농축되기 때문에 다른 식물이 자라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토양의 카페인 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카페인을 만드는 식물 자체도 더이상 살수 없는 환경이 되고 만다. 카페인이라는 생화학 무기가 결국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카페인을 만드는 식물은 자체 방어를 위해 노력한다. 즉 세포가 분열하는 곳처럼 독소에 민감한 부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카페인을 저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만든 카페인의 독성에 자멸하고 만다.
부분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커피 농장은 10-25년마다 자리를 옮긴다. 결국 커피나무는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약물을 만들어주며 사람들의 돌봄을 받는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