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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제주 돌담 태풍을 막다

얼기설기 쌓은 틈이 저항 줄여

여유로워야 할 추석에 태풍 ‘매미’가 남긴 상처는 너무도 깊었다. 주저앉은 대형 크레인, 나뒹굴고 뒤섞인 자동차, 배가 뭍으로 올라와 민가를 덮친 모습은 마치 ‘트위스터’나 ‘스피드 2’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할 정도로, 매미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간 최대 풍속이 1904년 기상 관측 이래 최대치인 초속 60m였다고 하니 엄청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고층 아파트의 유리창이 파손되고 지붕이 날아 가버리고, 창고가 허물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거센 폭풍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민가의 돌담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히 돌만으로 쌓아 올린 제주민가의 돌담이 건재했던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날 첨단과학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목적 따라 다양한 제주 돌담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1백만년전 77회 이상의 용암분출로 형성됐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서 생긴 현무암이 많다. 이렇게 형성된 암반이 농경지에 노출돼 있는 경우가 흔한데다 돌이 많아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면적이 더욱 줄어든다.

제주의 자연환경을 흔히 삼다(三多)라고 한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다는 의미이다. 바람과 돌이 많다는 것은 거친 자연환경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자가 많다는 것은 이런 거친 자연을 헤쳐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담은 이 세가지가 한데 모인, 즉 거센 바람을 이기기 위해 지천에 널린 돌을 제주사람들의 의지로 쌓은 것이 아닐까?

사실 돌담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제주의 중요한 풍경중의 하나가 된 돌담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고종 때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는 경작지의 경계가 불분명해 이웃의 경작지를 침범하기도 하고 지방 세력가들이 백성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는 등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종 때부터 제주에 고위관료들이 파견돼 통치하기 시작했는데, 고종 21년부터 고종 27년까지 재임했던 김구 제주판관이 지방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토지소유의 경계로 돌을 이용해 담을 쌓도록 했다고 한다. 돌담을 쌓은 후부터 토지경계의 분쟁이 없어지고 방목했던 소와 말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줄었다. 특히 제주 특유의 바람을 막아내는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제주의 돌담은 어느 장소에 사용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 초가의 외벽에 쌓은 ‘축담’이 있고 큰길에서 집으로 출입하기 위한 골목을 따라 쌓은 ‘올랫담’ 그리고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밭담’,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성처럼 길게 쌓은 ‘잣담’ 등 돌담의 종류도 많고 기능도 다양하다. 또 길을 가다 보면 밭 한가운데 무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이 자주 보인다. 무덤을 둘러싼 ‘산담’은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경계 짓는 영역이기도 하다. 농사짓기에 적당하지 못하고 그래서 생활 그 자체가 어려웠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던 제주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 만들어진 돌담은 감귤밭 주위에 세워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제주의 관광지개발계획과 아울러 소득증대사업의 일환으로 감귤농사가 지역곳곳에서 시작됐다. 이때 감귤밭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돌담이 제주고유의 이미지로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최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경작지의 밭담이나 취락지역에 돌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점차 콘크리트 블록 벽이 돌담을 대신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특히 초가집을 둘러싼 돌담에는 단순히 부지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능 이외에 자연의 위력에 맞서기 위한 삶의 지혜가 가득 숨겨져 있다.

자연석으로 무공해 담쌓기



제주 돌담에는 빈틈이 많아 서 바람이 불 때 벽면에 생기 는 힘이 줄어든다.


육지의 담쌓기는 일정한 크기의 돌 또는 기와와 흙, 짚 등을 사용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돌이나 기와를 쌓고 그 위를 짚을 섞은 흙으로 채운 후 다시 돌을 쌓는 방식이다. 짚을 섞은 흙은 일종의 접착제이면서 담을 구성하는 주요 재료가 된다. 흙으로만 만든 담은 가볍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다. 돌이나 기와는 이를 방지하는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하며, 아울러 흙담의 단조로운 벽면을 예쁘게 장식하는 효과도 있다.

반면 제주의 돌담은 겉으로 보기에 다듬지 않은 자연 상태의 돌을 올려놓아 간단하게 쌓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제주 돌담을 쌓을 때는 먼저 가공되지 않은 자연 돌의 뾰족한 부분을 위쪽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윗부분에 요철(凹凸)이 생기게 한다. 그 위에 다시 돌이 놓여지므로 자연히 돌과 돌이 꽉 맞물리도록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건축물의 담은 블록이나 벽돌을 쌓을 때 접착제 역할을 하는 시멘트 모르타르를 바르는 인공첨가물을 사용한 ‘가공된 담쌓기’이지만 제주의 돌담 쌓기는 단순히 돌과 돌을 형태를 이용하여 쌓은 ‘무공해 담쌓기’라고 할 수 있다. 모난 부분이 서로 맞물려 쌓여진 담이니 아무리 길어도 하나의 구조가 되는 완벽히 일체화된 구조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바람과의 관계다. 인공적인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무공해 담쌓기 구조물이기 때문에 돌담에는 당연히 얽히고설킨 돌과 돌 사이에 빈틈이 생기게 된다. 이 빈틈이 돌담을 견실하게 지탱하게 하는 비밀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돌담에 숨겨진 구멍의 비밀

건축물에 바람이 불게 되면 벽면을 밀려는 힘이 발생하게 되는데, 벽면의 면적이 넓을수록 밀려는 힘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벽면에 가해지는 힘을 줄이기 위해서는 벽면 일부에 구멍을 뚫어 바람의 일부를 통과하게 하거나 건축물의 형태 자체를 평탄한 면으로 하지 않고 유선형으로 만들면 된다.

(그림 1)은 바람이 불 때 건축물 벽면 형태에 따라 발생되는 힘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그림1) 건축물의 형태에 따른 힘의 변화


등고선과 숫자는 각각 바람에 의해 발생되는 힘의 분포형태와 가해지는 힘의 정도를 나타낸 것이다. 왼쪽은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개구부(開口部)가 전혀 없는 건축물에서의 힘의 분포와 정도를 나타내고 있고, 오른쪽은 건축물의 아랫부분에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개구부가 있는 건축물의 경우이다. 바람이 통과하는 개구부가 있는 건축물이 그렇지 않는 건축물 보다 벽면에 발생하는 힘의 분포와 정도가 완화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안부근의 빌딩에는 종종 바람의 힘을 가장 많이 받는 중앙부분을 뚫어놓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해변에 인접한 고층건축물의 경우 바람의 힘을 고려해 개구부를 만들어놓은 건축물이 많다.

규모가 큰 건축물에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원리에서 본다면 큰 돌과 작은 돌로 얽히고설킨 제주 돌담 사이의 빈틈은 일종의 개구부와 같은 기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주 돌담의 빈틈은 단순히 자연석에 의해 생긴 의미없는 공간이 아니라 바람이 통과하게 만든 이유있는 구멍이다. 아무리 거세게 불어오는 태풍이라고 해도 이 구멍을 통해 바람이 통과됨으로써 돌담 벽면에 생기는 힘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고, 돌담 벽에 생기는 나머지 힘은 돌 자체의 무게로 버틸 수 있는 역학적 메커니즘을 지닌 첨단기술인 것이다.

또 건축구조물의 형태가 6각형 혹은 8각형일 경우 바람하중이 20%정도 감소하고 원형이거나 타원형인 경우는 40%정도가 감소한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돌을 사용하지 않는 제주민가의 돌담 돌은 6각형 또는 8각형 이상의 여러 면과 형태를 가진 돌이기 때문에 돌담에 불어오는 바람이 각진 돌 표면에서 분산돼 돌담에 가해지는 힘이 감소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일부가 돌과 돌 사이의 빈틈으로 다시 빠져나가기 때문에 더욱 저항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가지붕과 찰떡궁합

그런데 돌담의 빈틈을 통과한 바람이 다시 돌담 뒷면에 저항을 주지 않게 돌담의 역학적 메커니즘을 더욱 효과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보조 장치가 있는데 바로 초가지붕의 형태이다.

지붕은 직접적으로 바람이 가해지는 면이 되는데 박공지붕이나 모임지붕, 합각지붕과 같이 지붕형태가 각이 지게 되면 바람을 받는 면적이 커져 지붕에 가해지는 힘도 커지게 된다. 그러나 완만한 경사의 둥근 지붕은 바람이 자연스럽게 흘러 지나치게 돼 훨씬 힘을 덜 받게 된다.

제주의 초가지붕은 육지마을의 초가지붕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초가지붕의 형태가 다르겠으나 대체로 육지의 초가는 지붕의 4면이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지붕 기울기는 약 40°이다. 반면 제주의 초가지붕은 굵은 새(芽)줄로 얽어맸고 모임지붕 같지만 실은 모임지붕이 아닌 4면의 형태만을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둥근 형태이다. 지붕의 기울기도 약30°정도로 상당히 완만한 지붕모양을 하고 있어서 거세게 부는 바람의 힘을 가능한 한 적게 받으며 바람이 자연스럽게 흘러 빠져 나갈 수 있다.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돌담과 초가지붕의 위치다. 제주민가는 돌담과 초가 사이에 빈 공간이 발생하지 않도록 근접 배치돼 돌담과 초가벽체가 거의 일체화된 형태이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일부는 돌담의 빈틈을 통과하고 나머지는 돌담을 넘어가는데, 이 바람이 완만한 초가지붕을 타고 다시 스쳐지나 가게 되는 것이다.(그림2)
 

(그림2) 제주 초가 단면도


다시 말하면 돌담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바람이 초가지붕의 벽면에 닿지 않도록 함으로서 초가의 외벽에 가해지는 바람의 힘을 최소화하고 한편으로는 돌담 뒷면에 바람이 휘몰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도의 역학구조를 이용한 최첨단 기법을 적용하고 있음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돌담과 초가지붕은 흔히 이야기 하는 찰떡궁합의 관계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자연재해에 맞서는 공동체 의식 반영

돌담은 토지나 가옥의 경계를 정하는 의미를 넘어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돌담 쌓기는 특별한 장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돌과 돌이 잘 맞물리도록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 혹 일부가 무너지더라도 간단히 복구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의 돌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쌓는 것은 아니다. 돌담 쌓기에는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보다는 바람과의 관계를 고려해 일정한 빈틈을 만들면서도 돌과 돌이 맞물리도록 하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가 요구된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능숙하게 쌓는다.

게다가 사용하는 돌도 큰 돌뿐만 아니라 작은 돌, 밋밋한 돌, 모난 돌, 둥글넓적한 돌들이 모두 필요하다. 각각의 돌들이 제 기능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큰 돌만을 사용했을 경우, 담 자체가 무게는 있지만 돌과 돌을 이어주는 이음새의 역할이 없게 된다. 또한 바람이 와 닿는 면적이 넓어져 불리하다.

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을 사용했을 경우 작은 돌 하나하나는 바람에 견디기 어렵지만, 이들이 서로 이음새 역할을 해 견고한 담으로서 새롭게 탄생될 수 있다. 또 돌만으로 짜여지기 때문에 바람에 의해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돌담 전체가 무너지는 피해를 주지 않게 된다. 설사 무너진다고 하여도 그 부분만을 쉽게 보수할 수 있기 때문에 관리측면에서도 편리하다. 이런 점에서 돌만으로 짜여진 제주의 돌담은 일종의 공동체 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돌담에는 작은 힘 하나하나를 모아 자연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스며든 것이다. 갈등과 반목, 대립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상 최대의 폭풍에도 무너져 내리지 않은 제주민가의 돌담은 또 다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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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강정효 기자
  • 김태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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