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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전자 해독이 아무리 어려워도 앞으로 10년내 끝내겠다"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는 것은 성배(聖盃)를 찾는 일과 같다」고 말한 길버트

 

노벨상을 탄 과학자들중 '월터 길버트'같이 특이한 인물은 보기 드물다. 노벨상이라는 최고의 옝예를 누리면서 연구실이나 대학에서 평생을 보내는 다른 수상자들과는 달리 길버트는 학교와 연구실을 떠나 실업계로 뛰어 들었다. 그는 198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얼마 뒤 수십년간 가르쳐 오던 하버드대학을 나와 바이오젠사라는 생명공학기업의 회장이 되었다. 바이오젠은 오늘날 제넨테크사와 함께 생명공학계에서는 정상급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4년간의 실업계생활을 그만 둔 뒤 하버드로 되돌아 왔던 그는 최근 다시 제놈사라는 유전공학기업을 차리기 시작하여 올 여름에는 문을 열 계획이다. 과학계에서는 그를 가르켜 '너무나 자신이 만만하고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으나 상아탑과 실업계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최고만을 추구하고 있는 월터 길버트.

 

어릴때부터 과학에 열중
 

1932년 미국 매서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길버트는 어렸을 때부터 천문학과 화학에는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린 손으로 망원경용의 거울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아홉살 되던 해에는 벌써 워싱턴의 아마추어 지질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열살도 되기 전에 대학용 화학교과서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길버트의 학교성적은 평범한 편이었고 가끔 학교 수업을 빼먹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길버트는 태어날 때부터 하버드대학과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의 부친 '리차드 길버트'는 초기의 케인즈 경제학자로서 1924-39년간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쳤고 그의 모친인 '엠마'는 래드클리프 여대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다.
 

길버트의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들은 20세기초에 미국으로 이민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부친 '리차드'는 워싱턴으로 옮겨 연방정부의 물가행정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길버트는 버지니아 교외의 집 창고에 자그마한 연구실을 차려놓고 밤낮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가 12살되던 해에 하루는 아연조각에 황산을 부어 수소를 만드는 실험을 하다가 플라스크가 폭발해서 유리조각이 팔목에 박힌 일도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마지막해에는 학교를 빼먹는 대신 미 국회 도서관에 쳐박혀 핵물리학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장차의 노벨상수상자가 될 '압더스 살람'과 함께 이론물리학 박사학위과정의 연구를 했으며 그곳에서 또한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제임스 왓슨'과도 만났다. 몇해 뒤 길버트와 왓슨은 미국 매서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하버드대학에서 만나게 된다.
 

어느날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왓슨은 길버트에게 자기 연구실에 한번 들려 보라고 권하면서 '매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 봄 왓슨의 연구실에는 유전자의 명령을 세포속의 단백질 제조장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메신저'를 찾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뒤에 '메신저 RNA'로 밝혀지게 된 단명의 전달분자였던 것이다. 길버트는 왓슨의 연구실에서 하룻동안 이들이 하고 있는 실험을 관찰한 뒤 이와 관련된 6편의 논문을 읽고 나서 대충 이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파악하면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밤낮과 휴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이 연구실에서 보내기 시작했으며 5년뒤인 1965년에는 마침내 정식으로 하버드대학의 종신직 생물 물리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 무렵 길버트는 당시 분자생물학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의 하나를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프랑스의 유전학자인 '프랑소아 자콥'과 '자크 모노'는 세포속의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인자가 유전자의 일부정보를 막아버려 단백질을 제조하라는 유전명령이 전달되지 못한다는 이론을 세웠었다. 예컨대 췌장의 세포와 뇌세포는 유전자속에 꼭 같은 정보를 갖고 있는데도 췌장은 인슐린을 만들지만 뇌세포는 만들지않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들의 이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흔한 박테리아인 대장균(E. coli)을 연구하고 있던 길버트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대상으로 실험하던 가운데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대장균은 젖당(락토오스)를 소화하기 위해 베타-갈락토시다제 라는 효소를 만든다. 그러나 대장균은 젖당이 있는 경우에만 이 효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젖당이 없을 때는 이른바 이 '락 유전자'의 생산이 억제된다. 길버트와 뮐러-힐은 이 억제인자가 단백질분자이며 한개의 박테리아속에는 10-20개의 이런 단백질분자가 있어 '작동자'로 알려진 유전자 부분에 매달린다는 것을 밝혀 냈다. 이를테면 유전자는 언제나 '빨간 신호'에 걸려 있다가 젖당이 나타나면 이 억제분자가 '푸른 신호'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억제인자의 연구는 길버트의 말을 빌면 '전혀 우연히'오늘날 분자생물학자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된 가장 강력한 기술의 하나를 개발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유전자 결합서열을 해독
 

길버트는 그의 대학원생 제자인 앨런 맥샘과 함께 일련의 정교한 화학적 조작을 통해 주어진 뉴클레오티드(핵산의 구성성분)의 결합서열을 빨리 그리고 신빙성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생물마다 간직하고 있는 유전의 '도서관'을 이론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관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길버트는 유전자의 결합서열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영국의 과학자 '알프레드 생어'와 함께 198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스피드 면에서 볼 때 맥샘-길버트가 개발한 기술은 이를테면 손으로 책을 베끼는 것에 비해 사진 복사하는 것만큼이나 뛰어 났고 이것은 과학자들에게 유전물질의 특정한 조각을 잘라 다른 유전자조각에 넣어서 대장균과 같은 생체속으로 삽입하여 유전자를 대량 복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로써 유전공학시대의 막은 올라 갔다. 70년대 중반부터 길버트는 이런 재조합방법으로 단백질을 양산하는데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사업가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보스턴 소재의 모험자본기업인 'T. A. 어소시에이츠'사 경영자인 '케빈 랜드리'와 만났을 때부터였다. 이때만해도 길버트는 미국 서해안의 한 과학자가 어떤 생물공학기업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흥분하여 "그 자로부터 과학정보를 완전히 끊어 버려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그가 1년도 안되어 바이오젠사의 수석과학이사를 수락한 이면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바이오젠사의 창설을 구상했던 '레이몬드 셰퍼'라는 사람은 그의 팀에 꼭 '길버트'를 참여시키고 싶었다. 모험자본가였던 셰퍼는 과학두뇌를 스카웃 하러 1년 반동안 유럽을 누볐다. 최고만을 찾고 또 그만큼 지불할 수 있는 넉넉한 돈을 듬뿍 갖고 있던 셰퍼는 나름대로의 '올 스타'과학자명단을 만들어 어느날 보스턴의 중국요리집에 길버트를 초대했다. 오찬을 함께 들면서 그가 길버트에게 보여준 명단에는 츄리히 대학의 '찰즈 바이스만' 에딘버러대학의 '키니스 머레이', 뮌헨의 막스플랑크 생화학연구소의 '피터-한스 호프슈나이더'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분자 생물학계에서는 이를테면 야구계의 홈런 타자들과 같은 초정상급 과학자들이었다. 이 명단을 훑어 본 길버트는 금방 마음이 동하게 되었다. 그는 기라성같은 이 과학자들을 이끌고 정상을 향해 달려보겠다는 생각을 금방 하게된 것이다.
 

노련한 셰퍼의 전략은 그대로 들어 맞아 길버트를 제네바에서 열리는 한 모임으로 끌어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길버트가 일단 승락하자 그 명단에 오른 다른 과학자들을 설득하기는 한결 쉬웠다고 셰퍼는 실토하고 있다. 이 과학자단과 투자가단은 1978년 3월 1일 제네바의 르리슈몽 호텔에서 첫번째의 모임을 가졌으며 이때부터 과학자들은 더 바랄 수 없을 정도의 귀중한 상품이 되었다. 바이오젠사는 이들의 명성을 업고 주식공개를 한 결과 1억2천 5백만달러의 사업자금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바이오젠사는 다른 유전공학 모험기업보다 넉넉한 사업자금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길버트도 연간 28만 5천달러의 봉급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58만주를 보유하는 바이오젠사의 유수한 주주가 되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바이오젠사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는 여러가지 사연이 있었다. 길버트는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있었으나 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8년 5월 바이오젠사가 설립되자 길버트는 바이오젠과 관련되는 프로젝트에 자기 시간의 20%를 할애하면서 과학자들을 이끌어 나갔으나 1981년에는 경영면의 책임까지 지게 되자 하버드대학에는 휴가원을 냈다. 그러나 정교수가 기업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하버드대학측은 1982년 마침내 대학과 기업중 어느 한쪽을 택하라고 요구하게 되었고 길버트는 바이오젠사를 택했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성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과학자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존경을 받는 대학의 분자생물학자가 되는 것이며 노벨상을 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모두 달성한 길버트의 생각은 이 분야에서 앞으로 첫째가 된다는 것은 성공적인 생물공학기업의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성공을 좋아하고 첫째가 되기를 좋아하는 길버트는 이 기회를 움켜 잡았던 것이라고 '랜드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길버트는 바이오젠사를 택하게 된 동기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어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이오젠사는 알파 인터페론을 비롯하여 간염백신에서 동물의 성장호르몬에 이르기까지 20여가지의 신제품을 내놓았다. 매서추세츠주 케임브리지와 스위스의 제네바에 본사를 갖고 있는 바이오젠사는 오늘날 4백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큰 기업으로 발전했고 이곳에서는 기라성같은 세계 정상급의 분자생물학자들이 일하고 있다.

 

스포츠를 즐기는 길버트는 구설수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제놈」사 설립
 

그러나 생명공학분야의 벤처 비지니스가 모두 그렇듯이 바이오젠사는 순풍을 만난 배같이 순탄한 앞날을 약속받은 것은 아니었다. 항암제로서 기대를 걸었던 알파 인터페론의 항암효과가 크지 않아 실망을 안겨주자 그 생산과 시장권을 쉐링사에 넘겼다. 바이오젠사가 대기업의 연구개발을 대행하는 역할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은 길버트는 3천5백만달러의 회사자본을 투입하여 항암제로 지목되는 감마 인터페론과 인터루킨-2를 개발하여 자체 공장에서 생산을 할뿐 아니라 자체의 판매망을 통해 판매함으로서 연간 20억-50억달러의 세계 항암제 시장에서 패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모험자본가인 셰퍼는 "길버트는 운이 좋으면 바이오젠사를 대 제약회사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나 운이 빗나가면 빈털털이 기업으로 만들자는 생각이며 마치 폭풍우속에서 배를 몰고 나가는 옛날 항해사와 같다"고 말했다.
 

아뭏든 길버트는 바이오젠사에서 자주 폭풍이 몰아치는듯한 4년의 세월을 보낸 뒤 다시 하버드대학으로 돌아 왔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다시 올 여름에는 제놈사라는 새로운 생명공학기업을 발족시키려고 요즘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에 벌일 사업은 오늘날 사람에게 유전된다고 생각되는 3천여가지의 병을 치료하는 첫번째 단계로서 그의 기술을 사용하여 인간의 유전암호를 완전히 해독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동업자인 제프리 웨일즈와 함께 전국을 누비면서 개업에 필요한 1천만달러모금에 나섰다. 유전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최후의 만찬의 성배(聖盃)를 찾는 것과 같다"고 그는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목표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거창한 것이다. 유전자의 언어는 이를테면 4자로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쌍으로 결합된 뉴클레오티드라고 불리는 불록을 만들고 있다. 사람의 세포 하나 하나에는 이런 불록을 30억 개나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해독' 한것은 이중에서 불과 5백만개 뿐이다. 이것을 모두 해독하자면 50억달러의 돈과 수십년의 세월이 걸릴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자 길버트는 3억달러의 비용을 갖고 10년내에는 모두 해치우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유전자를 분석하는 정교한 생화학적공정을 자동화할 계획이다. 그렇게되면 하루에 1백만개의 불럭을 처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업은 미국 에너지부에서도 착수했고 일본 과학기술청에서도 곧 착수한다. 그러나 길버트는 자기가 가장 앞설 것이라고 자신만만하다. 그는 투자가들에게 3년간의 연구가 끝나면 이 유전 '지도'의 일부를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전문가들은 욕심이 많은 스키어에다 요트맨인 길버트는 무모한 도박사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이 연구를 하기 위해 몸의 모든 유전자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가 책을 쓰기 위해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단어를 알 필요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더우기 유전지도의 저작권을 주장한 길버트의 발표는 벌써부터 과학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전지도를 입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정보는 공공영역에 소속되는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평생 첫째만 추구해 온 길버트는 이런 비판이나 구설 쯤은 그대로 흘려 버리고 오직 정상만을 향하여 계속 달려갈 것이다.

198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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