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1일 대전 구장, 2회초, 2아웃, 2볼, 2스트라이크, 만루상황.
‘딱!’
“어어…, 와아아아~.”
두산베어스 민병헌의 만루 홈런포가 터졌다. 배트를 짧게 쥐었음에도 힘으로 밀어서 담장 뒤로 공을 넘겼다. 프로야구 개막 후 10경기가 조금 넘은 시점에서 가장 ‘핫’한 선수를 꼽으라면 당연 민병헌이다. 개막과 함께 3번 타자로 출격한 그는 11경기에 4홈런, 12타점이라는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중심 타자로 우뚝 섰다. 지난겨울 근육량만 6kg 가까이 늘리며 ‘벌크업(bulk up)’을 이뤄낸 그는 호리호리한 발 빠른 대주자에서 근육질의 거포로 발돋움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야구는 게을러터진 스포츠? 중요한 건 슈퍼파월~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2013년, 흥미로운 조사를 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구장에서 실제로 뛰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를 재 본 것이다. 세 경기를 분석한 결과, 평균 2시간 58분의 경기 중 안타, 도루, 폭투, 사사구 등을 모두 포함해 필드에서 한 명이라도 뛴(인플레이) 시간은 총 18분에 불과했다. 필드 위의 선수들 전원이 뛴 시간만 따지면 5분 57초로 줄었다.
야구가 다른 구기 종목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은 선수들의 체형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다. 거구의 근육질 선수들이 팀의 중심에 있고, 근육질이다 못해 비만에 가까워 보이는 유명 선수도 있다. 야구가 낯선 사람들이 경기를 볼 때면 ‘몸이 저런 사람이 어떻게 운동선수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구기종목을 흔히 뛰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구, 농구, 탁구, 럭비 등 공을 갖고 하는 대다수의 운동은 계속 뛴다. 이 종목 선수들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운동선수의 몸’이다.
하지만 야구는 이들과 근본이 다른 운동이다. 야구는 계속해서 뛰진 않는다. 지구력이 덜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파워(power)가 가장 중요하다. 파워라고 하면 단순히 근력(strength)을 떠올릴 수 있지만 여기에 속도(speed)를 합친 개념이다. LG트윈스에서 11년간 트레이닝 코치를 지내고 현재 야구 국가대표 트레이닝 코치를 맡고 있는 김병곤 트레이너는 “야구의 체력 요소 중 파워가 차지하는 비중은 80~90% 이상으로 절대적”이라며 “근력이 단순히 10kg을 드는 것이라면, 파워는 그 10kg을 몇 초 만에 1m까지 드는지가 포함된 개념”이라고 말했다.
어깨는 50%에 불과하다
야구의 승패를 좌우하는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단연 어깨관절에 붙어있는 근육이다.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서다. 흔히 ‘공에 체중을 싣는다’고 표현하는 투구 동작은 다음과 같다. 공을 쥔 팔을 최대한 뒤로 뺐다가 앞으로 세게 뿌리며 가능한 가장 큰 힘을 공에 전달하는데, 이때 근육은 빠르게 수축해 팔의 회전속도를 초당 20회까지 높인다. 이를 통해 공을 뿌리는 힘은 몸무게의 2배로, 일반인의 어깨라면 견뎌내기 어렵다. 때문에 어깨관절의 유연성과 더불어 어깨가 이탈하지 않게 막아줄 근육의 고정력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투구 동작에 대한 연구가 거듭 이뤄지면서 어깨가 아닌 허리·복부와 하체 근육이 중요해지고 있다. 투수는 앞으로 이동하면서 던질 수 없기 때문에 대신 태엽 기계의 원리를 이용한다. 팔을 포함한 몸 전체를 뒤로 감았다가 빠른 속도로 회전시키는 것이다. 신체 하부의 회전력과 근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는 팔을 똑바로 세우고 던지는 오버헤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공 속도에 영향을 주는 비율이 팔과 어깨가 53%, 스텝과 허리회전이 47%로 나타났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의 근육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공의 속도는 어깨근육보다 복부와 하체의 파워에 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임승길 동신대 운동처방학과 교수가 2006년에 프로야구선수 30명을 대상으로 어깨관절과 요추부(허리·복부), 그리고 슬관절(하체)의 등속성 근력이 공의 속도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요추부가 상관성이 가장 높았고, 그다음이 슬관절, 어깨관절 순이었다.
복부와 하체가 중요한 것은 타자도 마찬가지다. 타격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지적받는 사
항이 ‘팔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서있는 상태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도 태엽기계와 같이 몸 전체를 뒤
로 돌렸다가 앞으로 빠르게 회전시킨다. 이때 가장 먼저 태엽을 풀어야 하는 부위는 팔이 아닌 복부와 둔부다. 몸의 중심이 회전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팔과 다리가 같이 회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복부와 둔부의 등속성 근력이 강해야 스윙도 빨라질 수 있다. 순식간에 이뤄지는 동작에 이런 세세한 이론들이 실제 경기로 이어질까. 윤완영 서원대 임상건강운동학과 교수는 2013년에 프로야구 타자의 체력 요소가 결과로 얼마나 직결되는지 분석해봤다. 체력요소로는 유연성, 순발력, 반응시간, 심폐기능 등을, 등속성 근력으로는 어깨관절, 요추부, 슬관절을 측정해 시즌 기록 차이와 비교했다.
그 결과 타율과 장타율은 허리가 유연할수록, 홈런은 전체적인 파워와 더불어 우측어깨관절의 외회전
력, 좌측 어깨관절의 내회전력, 왼쪽 무릎의 굴근력이 높을수록 많이 나왔다. 2루타는 파워, 그리고 오른쪽 무릎의 굴근력과의 연관이 깊었다. 단순히 어깨관절 주위의 근육뿐만 아니라 허리의 유연성과 하체의 파워가 성적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등속성 수축 : 근육 수축의 한 종류로, 동일한 속도로 근육이 수축한다. 이를 이용해 트레이닝 효과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대세는 ‘코어’ 트레이닝
선수들이 이런 파워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간은 비시즌인 동계훈련 때 뿐이다. 시즌 중에는 일주일에 여섯 경기를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체력훈련을 하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10~11월에 시즌을 마친 선수들은 짧은 휴식기를 가진 뒤 다음 시즌을 위한 동계훈련에 돌입한다. 팀 훈련은 1월 중순부터 시작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보다 50일 전인 12월 초부터 개인 훈련을 한다. 훈련은 크게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으로 나뉘는데 시기에 따라 둘 간의 훈련량 비율도 달라진다. 김병곤 트레이너는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의 비율은 12월에 9:1이었다가 점차 체력훈련의 비중을 낮춰가면서 1월에는 7:3, 2월에는 4:6, 그리고 3월 이후에는 3:7정도로 한다”며 “시즌 중에는 동계훈련을 통해 만든 체력을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개막에 임박할수록 체력운동의 종류도 달라진다. 체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기초 체력, 운동 체력, 스포츠전문 체력으로 나눌 수 있다. 기초 체력에는 근력과 근지구력, 유연성, 심폐지구력 등이, 운동 체력에
는 순발력, 민첩성, 협응성(신체 각 분절의 조화) 등이 포함되며, 스포츠전문 체력은 해당 종목의 특성과 맞는 특수 체력을 말한다. 12월에는 기초 체력에 많은 투자를 하고 시즌이 다가올수록 운동 체력, 스포츠전문 체력 순으로 집중한다.

하루 훈련 일정도 이 세 단계에 맞춰 진행된다.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는 준비운동인 스트레칭과 본 운동인 웨이트다. 이 두 단계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하는 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벤치프레스, 스쿼트, 덤벨, 레그 익스텐션 등을 통해 기초 체력과 운동 체력을 높인다. 야구선수들의 특수성은 세 번째 단계인 ‘코어 트레이닝’에서 드러난다. 김 트레이너는 “몸의 중심인 복부와 둔부를 강화하는 코어 트레이닝이 요즘 대세”라며 “이 훈련들은 야구의 동작들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했다. 코어를 강화하는 운동법은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운동이다. 때문에 운동법의 명칭도 동작도 굉장히 낯설다. 하지만 동작만 봐도 ‘야구를 위한 운동이구나’라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야구의 동작과 닮아있다(QR코드 참조). 봉, 튜브, 케이블 등을 이용해 야구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 나간다.
겨울을 뜨겁게 보낸 몸은 다르다
고된 동계훈련을 끝낸 선수들의 몸에는 얼마나 변화가 있을까. 이호성 단국대 스포츠의학과 교수는 2015년에 소프트볼 우수 선수 20명을 대상으로 동계훈련이 신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분석했다. 우선 체중은 그대로 유지되고 지방은 줄었다. 이 교수는 “약이나 식이요법을 쓸 경우 지방이 줄지만 근육량도 함께 감소한다”며 “동계훈련을 통해서 지방은 줄이면서도 체중은 유지해, 제지방량(체중에서 체지방을 제외한 수분, 근육, 뼈, 내장기관의 무게)이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깨관절의 등속성 근력도 향상됐는데 특히 외회전근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단기간의 동계훈련으로도 신체의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이 교수는 “긴 시즌 동안 계속해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며 “신체뿐만 아니라 심리적, 생리적 조건들이 시즌 중에 정상 패턴을 잃었을 때 얼마나 빨리 회복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스포츠에 ‘기적’, ‘돌풍’과 같은 말이 많이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준비가 없다면 그 기적도 돌풍도 없을 것이다. 올 시즌 프로야구에 기적의 사나이가 나타난다면 그의 몸을 한번 눈여겨보시라. 그의 지난겨울은 아마 뜨거웠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