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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에 빠진 뇌, 우정을 느낀 뇌

미묘한 감정 변화 일으키는 전기회로

‘왜 나는 어떤 사람이 미치도록 좋을까?’ ‘왜 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할까?’ ‘왜 나는 갑자기 까닭도 없이 슬퍼질까?’

이 질문에 대한 똑부러지는 대답은 아직까지 없다. 인간 감정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는 학습이나 기억, 추리 등의 행위에 비해 너무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기 힘들다고 생각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뇌 영상화 기법, 예컨대 기능자기공명영상법(fMRI)이나 양전자방출 단층촬영술(PET)은 정신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뇌의 활동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기법들은 학습이나 기억, 말 등의 지적활동 외에 사랑이나 공포,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나는지 밝혀주고 있다.

이성은 정서에 봉사하는 시녀

인간의 정서에 대한 뇌생리학적 연구는 최근 들어 정서가 이성보다 우선이라는 인식이 대두되면서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한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이 때문에 정서는 상대적으로 경시돼 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정서를 담당하는 뇌 부위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논리적 예측이나 추론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행동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언뜻 생각하기엔 정서가 배제될 경우, 마치 컴퓨터처럼 더욱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에 따라 빈틈없는 행동을 보일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도 금방 변덕을 부려 하던 일을 끝맺지 못하고 다른 일로 넘어간다든지 다른 사람의 합리적인 충고를 신경질을 내며 거부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즉 이성은 정서에 봉사하는 시녀인 것이다.

이렇게 정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감정의 정보처리가 일어날 때 뇌의 활동은 어떠한지에 대한 연구가 급증하고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인지신경과학자들은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애인의 사진을 볼 때 뇌의 활동이 어떠한가를 fMRI로 찍었다. 실험은 참가자들에게 각자의 애인 사진과 그 애인과 동성이면서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진행됐다. 단순히 애인의 사진만 보게 하지 않고 친구들의 사진도 보여준 이유는 ‘사랑’과 ‘우정’의 감정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즉 애인 사진을 볼 때의 뇌 활성화 정도에서 친구들 사진을 볼 때의 뇌 활성화 정도를 빼면 사랑의 감정에만 특별히 관여하는 뇌 부위들이 발견될 것이라는 논리다.

fMRI 스캔 결과,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는 내측 도(insula)와 전측 대상피질, 그리고 미상핵과 피각 등의 활동이 증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반구의 후측 대상피질과 편도체, 그리고 전전두피질 일부의 활동은 오히려 감소했다.

이런 여러가지 부위들 각각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로는 그렇게 상세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이 부위들로 이뤄진 일종의 ‘회로’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뇌에서 사랑이라는 감정만을 담당하는 어느 한 부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한가지 기능의 수행에는 여러가지 뇌 부위들이 관여하는 것이 뇌의 일반적인 작동 원리이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런 원리의 예외는 아니다.

자고 있는 고양이 귀 물어뜯는 쥐

우리는 대개 사랑이라는 중요한 감정이 뇌의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고싶어 하지만, 정작 정서와 뇌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많이 다뤄져 온 정서는 공포다. 공포는 다른 정서에 비해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만큼 공포라는 정서는 강력하게 느껴지고 겉으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동물에게서는 다른 어느 정서보다 공포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고양이를 만난 쥐는 도망가기 전까지는 바싹 얼어붙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숨쉬는 반응만 할 뿐이다. 신체 내부적으로는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돼 심박율과 혈압, 호흡이 가빠지고 스트레스 관련 호르몬이 분비된다.

공포의 이런 특징 때문에 동물을 대상으로 공포의 뇌 생리적 기반에 대한 연구들이 일찍부터 많이 행해져왔다. 이런 연구들에서 공포라는 정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구조가 편도체임이 밝혀졌다. 편도체를 손상당한 쥐는 고양이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고 있는 고양이의 등에 올라가 귀를 물어뜯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의 편도체를 손상시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편도체가 손상된 원숭이는 정상적인 원숭이가 기겁을 하며 피하는 뱀을 손으로 집으려 하고, 타오르는 불을 봐도 무서운 줄 모른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편도체가 없으면 동물들이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물연구에서 나온 이 결과는 인간의 경우에도 확인됐다.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편도체가 손상된 사람은 놀람, 슬픔, 즐거움 등의 다양한 얼굴표정을 별 문제없이 인식할 수 있지만 유독 공포에 질린 표정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여러가지 얼굴표정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을 때도 다른 정서의 표정은 잘 그리지만 공포에 질린 표정은 그리지 못한다.

편도체가 공포의 경험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 편도체를 자극할 경우 공포를 경험해야 하고 공포와 관련된 반응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실제 실험결과들은 이런 예측과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 동물의 편도체를 전기적으로 자극하면 공포와 관련된 모든 반응들이 나타난다.

공포 주관하는 편도체


공포를 느낄 때 뇌 편도체(사진의 노란색 부분)의 변화. 공포는 편도체에서 주관하는데, 편도체에 이상이 생기면 공포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발표돼 있다.


인간의 경우, 함부로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 편도체를 자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뇌종양을 제거하기 위해서나 기타 이유로 뇌수술을 할 때, 제거될 부분이 언어나 기억 등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여러 부위를 전기적으로 자극해볼 수 있다. 이렇게 수술 도중에 이뤄지는 전기자극을 통해 인간의 뇌 여러 부위를 직접 활성화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많이 밝혀져 있다. 예를 들면 엄지손가락의 피부감각을 담당하는 체감각피질을 전기적으로 자극하면 뇌가 자극받는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에서 촉감이 느껴진다. 이 방법을 사용해 편도체를 자극한 결과, 인간 피험자들은 공포감이나 불안감이 느껴진다고 증언했다.

편도체가 공포라는 정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편도체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여러가지 정서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인공포증 환자는 보통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 표정에 대해서도 편도체의 활동이 증가한다. 특별히 화난 얼굴이 아니더라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편도체 기능의 이상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월남전에서 자신의 눈앞에서 동료가 끔찍하게 죽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의 경우다.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받은 사람이 이 사건과 관련된 자극에 대해 거의 영구적인 공포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경축일에 터지는 폭죽 소리가 보통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을 의미하지만 이들에게는 전쟁터에서의 끔찍한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두려운 것일 수 있다. 이 환자에게 그들이 겪었던 끔찍한 사건을 상기시키는 자극을 제시하면 이들의 편도체가 과잉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머리 다쳐 성격 돌변


피니어스 게이지가 사고를 당한 모습. 그는 이 사고로 전전 두엽 부위가 손상돼 이전과는 달리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 했다.


사람은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항상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사랑이나 질투의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고 즐겁지 않은데도 즐거운 척하며 분노를 속으로 삭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붕괴되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만큼 중요한 감정을 뇌에서는 어떻게 조절할까.

캐나다 몬트리올대의 연구자들은 남성 에게 성적 흥분을 유발하는 포르노 영화의 일부와 그렇지 않은 중성적 장면을 보여주면서 뇌의 활동을 fMRI로 스캔했다. 참가자들은 성적 흥분 조건에서는 제시되는 장면에 정상적으로 반응하라는 지시를, 억제 노력 조건에서는 어떠한 정서적 반응도 의식적으로 억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장면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결과, 중성적 장면에 비해 포르노 장면에 대해서는 우반구의 편도체와 측두극, 그리고 양반구의 시상하부 활동이 증가했다(사진 1). 반면 의식적으로 성적 흥분을 억제한 경우에는 이 세 부위의 활성이 사라지고 우반구의 상 전두회와 전측 대상회의 활동이 증가했다(사진 2). 이 결과는 의식적으로 감정을 조절할 때 뇌의 활동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서의 조절이 실패할 경우 큰 문제가 생기는데, 전형적인 예가 충동적 공격성이다. 교통이 정체된 고속도로에서 자기 앞에 얄밉게 끼여드는 차의 운전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거나 학생이 교사를 칼로 찔러 죽이는 등의 사건은 분노의 감정이 억제되지 못하고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된 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걸까. 그 동안 많은 이유들이 제시됐는데, 여기에는 문화적·사회적 요인뿐 아니라 뇌 생리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표적 예가 피니어스 게이지의 경우다.

게이지는 19세기 중엽 미국 버몬트주의 철도 노동자였다. 평소에 사려 깊고 일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작업 도중 폭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쇠막대가 왼쪽 볼 아래를 뚫고 들어가 머리 앞부분으로 관통해 나오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났지만 이 사고로 성격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예절 바르고 능력을 인정받던 게이지는 무례하고 충동적인 행동이나 욕을 서슴없이 하는 무뢰한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이유를 조사한 결과, 게이지는 사고로 인해 뇌의 앞부분인 전전두엽이 손상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이지의 사례에서부터 시작된 많은 연구들은 전전두엽 영역이 손상되면 폭력적 경향성이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살인범의 뇌는 전전두엽 피질과 편도체가 비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증거가 뇌 영상법을 이용한 연구에서 얻어졌다. 또한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은 정상인에 비해 전전두엽 영역이 더 작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그러면 거꾸로, 전전두엽 부근의 기능을 증강시키면 폭력적 행동이 줄어들까. 고양이의 전전두엽에 전기 자극을 가하면 쥐를 공격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전전두 영역이 충동을 억제하는 브레이크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감정은 뇌와 불가분의 관계

현재는 ‘정서적 신경과학’(affective neuroscience)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정서에 관련된 두뇌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연구결과들을 요약하면 정서를 느끼고 표현하는데는 많은 두뇌 부위가 관여하며 정서만을 담당하는 두뇌의 어느 한 부위, 즉 ‘정서중추’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경과학적 연구들이 우리가 어떻게 희로애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가.

현재까지 두뇌와 정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주로 보여준 것은 사람이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낄 때 뇌의 특정 부위들이 활성화된다거나 뇌의 어느 부위가 손상되거나 자극을 받으면 정서 행동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특정 감정과 특정 뇌 부위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얘기일 뿐, 특정 뇌 부위의 활동이 ‘왜’ 우리로 하여금 특정 감정을 느끼게 하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편도체의 신경세포들이 활동한다고 해서 왜 공포가 느껴져야 하고 몇몇 뇌 부위가 활동한다고 해서 왜 사랑이 느껴져야 하는가? 좀더 넓게 보면, 두뇌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모두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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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문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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