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유럽연합(EU)에서 영국이 탈퇴하는 이른바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찬성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결과는 52%대 48%, 탈퇴파의 승리였다. 당연히 잔류할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예측을 벗어난 결과였다. 투표 결과가 발표된 뒤 주식시장은 출렁였고, 경제학자를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브렉시트가 가져올 일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과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이 참여하는 국제공동연구도 많고, 영국이 2007년부터 7년간 EU로부터 지원받은 연구 자금도 880억 유로에 달한다. 혹시 한국인 과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을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한국 과학계에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한국과 영국의 연구교류가 많지 않고, 여러 국제공동연구기관도 투표 결과가 발표된 직후 브렉시트 때문에 연구 자금이나 인력은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으니까요. 며칠간은 혼란스러웠지만, 이곳의 연구진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영국에 설립한 세계 최대의 핵융합 토카막 연구시설인 유럽 공동핵융합실험장치(JET, Joint European Tokamak)에서 연구하고 있는 김현태 박사가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상반된 분위기였다. 김 박사는 “JET는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에서 5년 단위로 예산 지원을 받아 운영되기 때문에 2018년까지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2020년 이후로 계획돼 있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약간은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을 포함해 EU, 미국, 중국 등 7개 나라가 참여한 국제열핵융합실험로(ITER)가 완공되는 2026년 전까지 참여국이
모두 JET에서 연구를 하기로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아마 비 EU 국가 자격으로 계속 연구를 이어나갈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과학계에서 영국이 고립되는 일은, 최소한 국제연구기관에서는 없을 것이고, 연구도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국제공동연구기관은 담담한 분위기, 변화가능성 적어
2012년까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힉스 입자 공동연구에 참여한 박인규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박 교수는 “CERN에서 브렉시트 투표 다음 날 단체 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메일에는 “영국과 CERN의 관계는 변함 없으며, CERN의 연구 자금 및 연구원들의 거취 등에 어떤
혼란도 없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명시돼 있었다. 아래는 CERN에서 보낸 메일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는 연구소가 위치한 스위스를 포함한 몇몇 회원국의 일부분이 아니며, EU 회원도 아니다. 영국이 CERN의 회원인 것은 EU를 탈퇴한다는 영국의 투표 결과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입자 물리학의 국제적인 협업을 더 강화하도록 사전 대책을 강구할 것이며, 영국이 계속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독려할 것이다. CERN의 연구는 회원국들의 자금으로 운영되며, 일부는 EU의 보조금으로 운영된다. 지금의 결정이 CERN과 EU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EU로부터 연구 자금(FP)을 받을 자격이 있다.”
영국 취업엔 기회일 수도
영국에서 공부나 일을 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과 연구자는 어떨까. 큰 영향이 없거나, 오히려 영국에서 일자리를 얻는 게 더 쉬워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영국의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3학년을 보내고 있는 이상민 씨는 “영국에서 일을 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5년 비자를 위해 영국 정부에
내야 하는 돈이 약 1500파운드(브렉시트 전 환율 기준으로 약 255만 원)”라며 “전에는 EU 국적을 가진 학생들은 비자가 필요없으니까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이 돈을 내줄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유럽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이후에는 유럽인이나 한국인이나 똑같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처지기 때문에 같은 출발선상에 놓이게 된다.
구본경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줄기세포연구소 교수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구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케임브리지대만 해도 박사후연구원(포스닥)을 뽑을 때 유럽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며 “영국이 EU에서 탈퇴한다면 영국 취업에 한해 한국 학생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과학계에 미칠 영향 적지만 연구 개발 투자는 주의해야
브렉시트가 한국의 과학 연구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도 미미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지난 7월 1일 발간한 보고서 ‘브렉시트에 따른 과학기술계 영향과 대응’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국제협력 중 유럽과 협력하는 사업은 26.4%이고, 영국과의 사업은
3.2%에 불과하다(2012년 기준). 미국이 39.4%인 것에 비하면 꽤 낮은 수치다.
하지만 장용석 STEPI 글로벌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브렉시트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처럼 큰 해일은 아니지만, 작은 지진을 계속 일으키며 점진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있다”고 경고했다. 장 선임연구위원은 브렉시트가 2차 글로벌 경제위기를 만들 경우를 우려했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돈이 빠지는 곳이 바로 연구개발(R&D) 투자입니다. R&D 투자는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R&D와 기업이 투자하는 민간 R&D가 있는데, 민간 투자가 약 78%정도로 많죠. 경제위기가 닥치면 민간 R&D 투자가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까지 R&D 투자를 줄이면 과학기술 발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투자를 무조건 줄이기보다는 전략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브렉시트, 영국 UCL 한국인 동문회의 생각은?
영국에서 학부 생활을 하고 있는 유학생들은 브렉시트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생생한 의견을 듣기 위해 지난 7월 16일, 서울 신사동에서 열린 영국 UCL한국인 동문회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 봤다. 오랜만에 모인 동문들 사이에서도 브렉시트는 주된 토론 거리였다. 방학을 틈타 잠깐 한국에 들어온 학생들도 의견이 다양했다. 파운드 가치가 떨어져 학비 부담이 줄었다는 의견부터 EU로부터 지원받던 연구비 때문에 여러 프로젝트가 무산될 가능성까지 나왔다.
김진석(자율전공, 2016년 졸업예정)
일단 학비 부담이 많이 줄었다. 파운드 환율이 200~300원 정도 낮아지니까, 당장 다음 학기에 낼 학비가 500만~600만 원 정도 줄었다. 영국이 워낙 물가가 비싸고 생활비도 만만치 않은 나라라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브렉시트를 반기는 분위기도 있다.
여준석(금융공학, 2015년 졸업생)
석사과정을 밟을지 군대를 갈지 고민하던 도중, 브렉시트가 터져 한국으로 돌아왔다. 브렉시트가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영국이 EU를 탈퇴한다면 굳이 영국에서 유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글로벌 은행들이 영국에서 철수하고 있어, 이쪽 분야를 공부하는 공학자들은 인턴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임우식(건축공학, 2016년 졸업예정)
브렉시트가 일어나도 한국 유학생들에게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장학금 중 50% 이상은 EU 국적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동양인에게는 장학금 혜택이 거의 없었다. EU 학생들의 혜택이 사라지면 그 혜택이 동양인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아마 장학금을 전체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거나, 자국민을 위해 쓸 가능성이 높다.
김곤수(정보보호, 석사과정)
EU에서 연구비를 받는 대학 프로젝트들은 위기일 것 같다. 당장은 연구비가 끊기지 않겠지만, 이후 해당 연구를 진행할지는 미지수니까. 실제로 학부를 다니던 시절 외국인 유치와 관련된 사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외국인 유치 제한 정책을 펼치며 사업에 대한 자금을 끊었다. 계약직이었던 나는 해고 대상 1순위였다. 브렉시트 이후 연구자 중 나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수(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지금 영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 산업은 크게 금융, 관광, 영어교육 세 가지다. 제조업은 아시아에 밀리고, 패션 산업은 이탈리아나 프랑스한테 밀리고, 남은 주력 산업이 별로 없다. 그만큼 일자리가 한정적이라는 의미다. 아마 브렉시트가 일어나도, EU 국적의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동양인한테 주기보다는 자국민들에게 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영국 경제상황이 나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라,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