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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닥나무 한지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선조들이 만든 인쇄물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이 그러하고 구텐베르크보다 70여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줄여서 직지, 1377년)도 그렇다. 지난 1천년 간 가장 위대한 발명 또는 세계를 변화시킨 1백대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쇄술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들은 선조들이 일구어 낸 눈부신 인쇄술 덕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예로부터 인류는 삶의 족적을 기록으로 후세에 남기고자 애썼다. 그래서 수천년 전 선사시대 사람들은 바위 위나 큰 절벽 또는 동굴의 벽면 등에 삶의 족적을 새겨 넣거나 그림으로 남겼다. 사슴, 고래, 거북, 물고기, 호랑이, 멧돼지, 곰, 토끼, 여우같은 동물은 물론이고 사냥하는 모습이나 고래잡이의 광경이 그려져 있는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가 우리들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이유도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삶의 족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발달과 함께 인류는 그림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진보된 문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 문자(B.C. 3100년경)나 이집트의 신성문자(B.C. 3000년경), 그리고 중국의 한자(B.C. 1300년경)는 삶의 기록을 남기고자 애쓴 인류의 위대한 성취였다.

삶의 족적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인류의 오랜 염원은 그래서 바위 표면(그림)에서, 진흙판(수메르문자), 파피루스(신성문자), 대나무 편(중국의 한자)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전자, 광선, 자기력을 이용한 첨단 과학으로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정보를 기록 저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위대한 사상과 축적된 경험이나 지식을 기록해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보급할 수 있는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문자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정보가 축적되고 축적된 정보가 세계 곳곳으로 보급돼 인류의 문명 발달에 엄청난 역할을 했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정보의 축적과 전파 이면에 숨어 있는 종이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최고의 목판과 금속인쇄물을 일구어낸 사실만을 내세우고 있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우리 종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천년 세월을 견뎌낸 우리의 종이,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우리의 한지. 그래서 살아 숨쉬는 종이라고 했다던가. 1천수백년을 견뎌낸 이런 한지도 알고 보면 이 땅에 자라는 질 좋은 닥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담장을 감싸고 덮은 등나무 줄기


탁월한 외교수단

우리 종이의 명성은 예로부터 자자했다. 닥나무로 만든 통일신라의 종이(楮紙)는 다듬이질이 잘되고 섬유질이 고르고, 희고, 질겨서 중국에서 백(추)지(白 紙) 또는 계림지로 평판이 높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흔적은 오늘날도 찾을 수 있다. 국보 제196호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755년경, 호암미술관 소장)의 종이를 조사한 제지역사분야에 권위자인 오오가와란 학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종이는 매우 희고 광택이 있으며 표면은 평활하고 강한 광택이 있다. 티라든가 풀어지지 않은 섬유 덩어리도 적은 아름다운 종이이다. 얇은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먹이 번지지 않았다. 비추어보면 전체적으로 조화 있으며, 만지면 파닥파닥하며 치밀하고 밀도가 높은 종이로 보여진다. 종이의 색이 매우 하얀 것을 보면 하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의 밀도는 0.64g/㎤로 보통 닥나무 종이의 2배 정도의 밀도를 보이며 표면에 먹이 스며드는 것을 관찰하면 종이 표면에 먹의 침투를 막기 위한 무엇인가를 바르고, 다듬이질, 문지름 등의 가공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 종이는 원료의 닥껍질에서 최종 가공까지 일관되게 정성들여 만들었을 것이다. 제지기술의 뛰어남을 보면 고대 한국의 유명지(有名紙)의 하나로 보여진다.”

이처럼 뛰어난 신라의 제지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져서 더욱 이름을 얻었다. 송나라와 원나라는 섬세하고 희고 빛이 나고 매끄러운 고려 백
추지를 많은 양 수입했으며,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지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지의 이러한 성가는 조선 전기로 이어졌다. 오죽 종이질이 좋고 명성이 자자했으면 한지가 중국과의 사대외교에 필수품으로까지 한몫을 했다고 한다.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떠올리는 이야기 한 토막은 오늘날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성서가 겨우 5백년의 수명을 가지고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모셔져 있는 반면, 1천년에서 수백년 묵은 우리의 고서적들이 박물관이나 도서관 또는 골동품 상가에서 나뒹굴다시피 쌓여 있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뛰어난 제지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상들의 제지술을 마냥 팔아먹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책을 쓴 저자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그가 쓴 책종이는 누렇게 삭아서 떨어져 나가는 오늘의 우리 제지기술은 분명 부끄러움이다.
 

실내가 습하면 습기를 빨아 들이고, 건조하면 품고 있는 습기를 내뿜는 한지의 특성을 이용한 한지벽지는 아파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향수 뿌려 가꾼 닥나무

이 땅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썼는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낙랑시대 고분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넣어 둔 통이 묵 가루가 그대로 붙어 있는 벼루와 함께 발굴됐기에 당시에 종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사용된 종이가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것인지, 아니면 기술을 전수 받아 국내에서 생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밖에도 이 땅에서 종이가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은 적지 않다. 백제의 아직기가 284년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이나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역사서를 편찬했다는 기록, 그리고 610년에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제지기술을 전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대체로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 경에 우리 나라에 종이나 그 제조법이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종이에 대해서는 제작기법은 물론이고 지질이나 그 특성에 대한 기록도 없어 자세한 것은 파악할 수 없다.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을 통해서 한지 제작과정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는 점이다. 이 화엄경 제50권의 말미에는 “절에서 쓸 종이를 마련하기 위해 닥나무를 재배할 때는 그 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리며 정결하게 가꾸고, 그것이 자라면 껍질을 벗겨 삶아 찧어 만든다”고 기록돼 있다. 바로 닥나무의 껍질로 한지를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구절이다.

세계에 자랑하는 한지를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닥나무는 그리 높지 않는 우리 산하 어느 곳에서나 자랄 수 있다. 가을이면 잎을 떨구는 낙엽성 관목인 닥나무는 줄기를 많이 만들어 내는 키작은나무의 특성처럼 여러 해 동안 매년 줄기를 잘라내어도 계속해 새 줄기를 만들 수 있는 맹아력이 왕성한 나무이다. 닥나무는 어미 나무의 뿌리에서 많이 생겨나는 맹아를 포기나누기나 삽목으로 번식시킬 수 있으며, 추위에 비교적 강하지만 햇볕이 잘 들고 부식질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한지의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통 3년이 지난 줄기를 사용하고, 옮겨 심은 후 5-7년 지난 줄기들에서 가장 많은 섬유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철에 나무를 벌채해 줄기의 껍질만을 한지생산에 사용한다.

오늘날도 전통 한지를 뜨는 지장들은 닥나무를 딱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딱나무라는 이름은 닥나무의 가지를 꺾으면 ‘딱’ 소리를 내기 때문에 죽을 때 자기 이름을 한번 부르고 죽는 나무라는 별칭에서 유래됐다고들 한다.

닥나무 재배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는 사찰과 유가에서 서적출판(대장경, 삼국사기 등)이 성행했기에 종이 수요가 늘어났고 이렇게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대량으로 종이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에는 인종 23년(1145)에서 명종 16년(1186)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닥나무를 전국에 재배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종이 수요가 더욱 늘어나 국영 조지서를 설치해 제지를 관영화했던 조선시대에는 닥나무 재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즉 태종 20년에는 대호(大戶)는 2백 주, 중호(中戶)는 1백 주, 소호(小戶)는 50주를 밭에 심도록 하고 만일 이를 시행치 않을 시에는 벌을 내린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 닥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24회나 언급돼 있는데 특정 수목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이유도 ‘문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종이가 갖는 중요성 때문이리라.
 

한지 만드는 법


화살도 뚫지 못하는 한지

살아 있는 종이, 한지가 천년을 견뎌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선조들이 발달시킨 독특한 제조기법을 들 수 있다. 전통 한지는 빛과 바람과 습기 같은 자연현상과 친화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빛을 그대로 비쳐주고 바람을 통해 주며 습도를 조절해 종이 자체가 신축운동을 한다.

한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한지가 자연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닥나무(섬유)와 나무재나 석회(불순물 제거), 그리고 닥풀(점액)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질 좋은 한지를 뜨는 데는 필수적으로 맑은 물과 풍부한 태양광선도 천연표백제로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종이, 한지가 천년을 견뎌내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지가 강한 예는 몇 장을 겹쳐 바른 한지로 갑옷을 만든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를 못한다고 한다. 한지가 이렇게 강한 이유는 닥나무 껍질의 인피섬유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학펄프로 사용하는 전나무, 소나무, 솔송나무 같은 침엽수의 섬유 길이(3mm)나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유칼리 같은 활엽수의 섬유 길이(1mm) 보다 훨씬 긴 섬유 길이(10mm 내외)를 닥나무의 인피섬유는 가지고 있다.

한지가 1천수백년의 수명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독특한 불순물 제거방법이다. 제지과정에 불순물의 제거는 질 좋은 종이의 생산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제지원료에 들어 있는 전분, 단백질, 지방, 탄닌 같은 불순물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이가 변색되거나 품질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한지는 화학펄프에서 사용하는 산성 화학약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중성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알칼리성에 비교적 강한 섬유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알칼리성 용재인 나뭇재나 석회를 불순물 제거제로 사용했다. 그래서 한지는 산성을 띤 재래의 펄프지처럼 화학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도 사용된 펄프지가 산성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러 공정을 거쳐 중성지를 만들어 내고 있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보통의 용도에는 산성지를 쓰고, 고급 용도에만 중성지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한지의 지질을 향상시킨 또 다른 요인은 식물성 풀에서 찾을 수 있다. 한지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했다. 황촉규(닥풀)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된 점제는 한지의 원료에 점성을 갖게 해준다. 그래서 종이를 뜰 때 섬유의 배열을 균일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건조하면 이러한 점성이 거의 소실되는 특성도 있어서 낱장으로 종이를 말리는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즉 한지는 닥풀의 뿌리에서 추출된 점액을 사용함으로 섬유의 배열이 양호해지고, 종이의 강도가 증가했고, 종이의 광택도 좋아졌으며, 종이를 얇게 뜰 수도 있었던 셈이다.

한지의 우수성은 표백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순백색의 우량 종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잡색을 띤 비섬유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표백이라고 하며 보통 염소계의 산화표백제를 많이 사용한다. 재래 한지는 이러한 표백제를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천연표백법을 사용했다. 냇물표백법이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옛날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곳에는 맑은 물이 항상 필요했던 이유이기기도 하다. 천연표백법은 섬유를 손상시키지 않고 섬유특유의 광택을 유지하면서 그 강인함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기 때문에 1천여년이 지난 한지가 오늘날도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한지의 질을 더 높인 조상들의 비법은 또 있다.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도침(搗砧)이 바로 그것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평활도를 향상시키며 광택이 나게 하기 위해 면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 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이 도침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기술이다.

중국산에 밀려나는 전통 한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 직지에 쓰인 우리의 종이, 1천수백년의 세월을 견뎌낸 우리의 한지는 안타깝게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국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종이의 양을 산정하는 통계연감에서도 찾을 수 있다. 97년 종이 소비량은 수입 56만t을 포함해 6백85만9천t이라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종이를 생산해 소비했지만 우리의 한지가 얼마나 생산됐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잡혀 있지 않다. 한국제지공업연합회나 해당 정부 부서에서 실시하는 통계조사항목에는 한지에 대한 항목은 애초 없는 실정이다.

또한 90년도까지 3백여개의 한지공장에서 생산되던 국산 한지는 값싼 중국산 수입한지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1백여개의 공장만이 옛 한지의 명맥을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파로 급격하게 변한 주거 양식 때문일 것이다. 즉 한옥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창호지와 장판지는 유리와 비닐로 대치됐고, 한지는 더욱 발붙일 곳을 잃어갔던 것이다.

한지에 대한 수요가 급감함에 따라 이 땅에 자라던 닥나무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농가에서는 겨울철 농한기에 벤 닥나무 껍질을 다듬어서 한지공장에 공급해 주고, 한해 필요한 종이를 얻어 썼다. 그러나 닥껍질을 수매하던 한지공장이 없어지니 농가에서는 더 이상 닥나무를 재배할 필요가 없어졌고 필요한 종이는 구입해 쓰게 됐다. 국산 피닥(닥나무 껍질)조차 구할 수 없는 몇 남지 않은 한지공장들은 값싼 동남아산 닥나무 껍질을 수입해 한지를 제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겨레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지를 살리기 위해 우리 모두 심각하게 궁리해야할 때다.

한지 만드는 법

1) 11월-12월에 베어낸 닥나무를 삶는다.
2) 삶은 닥나무의 껍질을 벗긴다. 겉껍질이 붙은 채 벗긴 것을 흑피 또는 피닥이라 한다.
3) 흑피를 철분이 없는 흐르는 냇물에 10여시간 담가 두어 불린 다음, 겉껍질을 칼로 벗겨낸 것을 녹피, 푸른 중간 껍질까지 다 벗겨낸 것을 백피라 한다. 보통 생닥나무 10kg에서 2kg의 마른 흑피, 1kg의 마른 백피를 얻을 수 있다.
4) 백피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물 속에 담근다.
5) 백피를 40-50cm로 잘라 잿물에 삶는다.
6) 잿물기가 빠지면 대나무 발에 올려서 다시 찐다. 기름기를 빼는 과정이며 종이 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7) 흐르는 물에 씻고 햇볕에 말려서 표백한다.
8) 충분히 짠 다음 티를 고른다.
9) 닥을 널따란 닥돌 위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2-4시간 동안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들겨 죽같이 만든다.
10) 닥과 닥풀(황촉규의 뿌리에서 추출한 즙액)을 잘 섞은 다음 물질(나무판에 발을 놓고 그것을 여러 번 흔드는 작업)을 한다.
11) 3백-5백장을 떠서 나무판에 쌓아 놓는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이 위에 판을 대고 돌로 눌
러 일차 탈수시킨다.
12) 압착해 물이 다시 빠지면 건조대에서 한 장씩 건조시킨다.

한지 한 장에 필요한 닥나무의 양은?

10kg짜리 생닥나무의 줄기를 벗겨서 그늘에 말리면 2kg의 흑피를 얻을 수 있고, 이 흑피를 삶고 말리고, 씻은 후 건조해 얻는 백피의 양은 1kg이다. 백피 1kg에서 5장(60x90cm)의 한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즉 1년생 생닥나무 줄기 2kg마다 한지 1장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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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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