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 BT, IT, ST, ET, 의료, 국방 등 산업전반에 걸쳐 혁신을 이루기 위해 과학 선진국에서는 대형 양성자 가속기를 운영하거나 건설중에 있다. 수소의 원자핵인 양성자를 고에너지로 대량 생산해 이들 첨단산업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서도 양성자 가속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과학기술부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의 일환인 양성자기반공학기술개발사업이 바로 그것. 지난해 7월 시작된 양성자기반공학기술개발사업에 대한 소개를 듣기 위해 기자는 벚꽃이 만발한 4월 대전 원자력연구소 내에 위치한 양성자기반공학기술개발사업단의 최병호 단장을 찾아갔다.
핵심 기술의 국산화 추진
최 단장은 “미래원천기술 개발을 위해 2010년까지 세계 최고급 양성자 가속기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사업단은 에너지 1백MeV, 전류 20mA의 선형 양성자 가속기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백MeV의 에너지는 기존의 양성자 가속기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양성자 가속기를 평가하는 또다른 한 축인 전류가 20mA라는 점에서는 사뭇 다른 평가를 받는다. 이 정도 전류는 양성자 가속기에서 상당히 높은 전류에 속한다. 199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양성자 가속기는 산업적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에너지보다 전류를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개발돼 왔다. 이런 맥락에서 사업단에서 건설할 양성자 가속기는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이다.
최 단장이 가속기 개발에서 강조하는 또다른 점은 ‘핵심 기술의 국산화’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원자력중장기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가속기 관련 사업을 추진해본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이뤄진 원자력중장기사업은 6MeV의 소형 양성자 가속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대형 양성자 가속기 개발을 위한 국내 기술의 벤치마킹이 이뤄졌다고 최 단장은 말한다.
이때 양성자 가속기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양성자 입사기를 비롯해 고주파 4중주 가속장치 등을 이미 우리 손으로 개발했다. 최 단장은 앞으로 개발될 양성자 가속기가 선형이기 때문에 이미 개발한 가속장치를 점점 늘려나가면 더 높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서 기술적 측면에서 이미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문제는 양성자 가속기를 짓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투자하기로 결정된 1천2백86억원(민간 투자 1백29억원)으로 수천억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전망이다. 하지만 양성자 가속기가 본격 가동될 경우 활용도가 전과학기술분야를 망라하기 때문에 이보다 훨씬 큰 부가가치가 산출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위해 사업단에서는 양성자 가속기의 개발뿐 아니라 이로부터 얻어지는 양성자 빔을 활용하는데도 역점을 두고 있다. 사업이 추진되면서 각 단계별로 건설되는 양성자 가속기를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주요 목표다. 예를 들어 2005년 1단계가 완료되면 20MeV의 양성자 가속기가 건설되는데, 건설과 함께 1단계 사업으로 이 정도의 양성자 가속기를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이 동시에 연구·개발된다. 기능성 신소재 개발이나 SOI 반도체 웨이퍼 생산 기술이 그렇다.
선정 부지에 과학기술단지 조성 계획
아직은 초창기인 사업단에서 지금 한창 부산하게 진행중인 일은 약 20만평 규모의 부지를 선정하는 작업이다. 1백MeV급의 양성자 가속기를 짓는데는 고작 4만평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처럼 넓은 부지를 마련하려는 첫번째 이유는 1GeV급의 고에너지급 양성자 가속기를 건설한다는 최 단장의 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양성자 가속기를 활용하는 각종 산업기술센터와 암치료 등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을 비롯해 이와 관련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센터도 함께 지어질 계획이다. 양성자 가속기를 기반으로 하는 첨단과학기술단지가 조성되는 것이다.
현재 양성자 가속기를 유치하기 위해 공모에 응한 기관은 5곳. 강원도 철원군, 춘천시, 전남 영광군, 전북 익산시, 대구시(경북대)가 참여했다. 조만간 이들 5곳 중에서 양성자 가속기 단지가 들어설 곳이 선정될 계획이다. 이들 지역은 양성자 가속기를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부지 선정이 한창 난항을 겪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부지는 이미 결정이 났어야했다. 하지만 지난 4월 1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을 받아들이는 지역이 양성자 가속기 사업을 유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산업자원부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양성자 가속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과학기술부의 부지 선정 작업을 3개월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을 유치, 신청하는 지역에 대해 특별가산점을 부여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양성자 가속기 사업을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을 유치하는 지역에 반대 급부로 주겠다는 의미다.
당초 과학기술부가 공개적으로 양성자 가속기 부지 선정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산업자원부가 양성자 가속기와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을 연계할 것을 주장했다. 최 단장은 이 두 시설을 연계시키려고 하는 산업자원부의 주장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산업자원부는 양성자 가속기가 방사성 폐기물 처리에 이용되는 기술적 측면을 강조해왔다.
방사성 폐기물에는 반감기(방사성 원소가 붕괴되면서 원래 수의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가 수십만년이나 걸리는 물질이 포함돼 있다. 이 물질을 양성자 가속기를 통해 얻은 고에너지의 양성자 빔을 이용해서 반감기가 수십년에 불과한 원소로 변환시킬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산업자원부가 양성자 가속기와 방사성 폐기물 처리시설을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 단장은 “사업단이 건설할 양성자 가속기와 방사성 폐기물 처리에 쓰일 양성자 가속기는 용도 면에서 다르다”며 “산업자원부의 주장이 논리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방사성 폐기물 처리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양성자 가속기가 이 전용으로밖에 쓰일 수 없다.
하지만 양성자기반공학기술개발사업이 추진하는 양성자 가속기는 산업전반에 걸쳐 쓰이기 위해 양성자 빔을 시간적으로 쪼개 10군데 이상에 보내 사용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별개의 양성자 가속기가 필요하며 두 시설이 함께 있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최 단장은 "이런 기술적 문제를 떠나 정부가 원칙을 흔들어 사업의 신뢰성에 타격을 입힌 점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양성자 기반공학기술개발사업은 33개의 기업체와 기관이 참여하는 대단위 규모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이들 참여기관과의 신뢰가 깨저 사업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