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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는 우장춘 아니다

우리는 한국과학사를 잘 모른다. 가장 큰 요인은 이해와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 사학과의 박성래 교수는 한국과학사를 다룬 저서에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만큼 우리들 사이에는 한국과학기술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는 세계과학사에 당당히 내세울 만한 과학인물과 연구성과가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학사는 없는가. 사실 과학의 역사는 바라보는 시각을 약간만 달리하면 아주 다르게 펼쳐진다. 세계최고에 견줄 만한 탁월한 연구성과에 초점을 맞출 경우 우리의 과학기술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과학기술의 크고 작은 진전, 특히 한국의 비약적인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활동으로 시야를 넓힌다면 우리의 과학기술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이 넘쳐난다.

지난 2월 20일 국립서울과학관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이 마련됐다. 14명의 과학기술자가 체계적인 조사 평가과정을 거쳐 초대 헌정대상자로 선정됐다. 모두가 한국의 과학기술을 위해 헌신하고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이다. 이번에 선정된 과학기술자 중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여럿 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더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많이 있는 한국과학사의 내용을 바로 잡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근현대 한국의 뛰어난 과학기술자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도록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종묘업자가 퍼뜨린 오해


명예의 전당에 있는 우장춘 코 너. 우장춘은 씨없는 수박의 개 발자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1930년 겹꽃 피튜니아를 육종 시키는데 성공했던 유전육종학 자였다.


우장춘 하면 누구나 ‘씨없는 수박’의 최초 개발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씨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1943년경 일본의 기하라 히또시에 의해 처음 개발됐다. 반면 우장춘이 한국에서 씨없는 수박을 시험 재배해 선보인 때는 1953년이다.

우장춘이 씨없는 수박을 시험 재배한 것은 원래 육종학의 원리와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는데, 뜻하지 않게 잘못 알려지게 됐다. 특히 종묘업자들이 새로 생산된 채소 씨앗을 많이 팔기 위한 묘책으로 우장춘의 씨없는 수박을 이용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씨없는 수박은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우장춘이 최초로 개발한 업적으로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장춘의 이름은 잘 알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우장춘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인물이다. 일본에 살면서도 끝까지 자기의 성을 고집했고 해방 후에는 가족을 남기고 홀로 조국에 돌아와 봉사할 정도로 뜨거운 민족애를 발휘했다. 그의 검소하고 올곧은 생활은 ‘고무신 박사’라는 별칭을 얻게 했고 후학들에 대한 사랑은 그를 정신적으로 믿고 따르는 많은 ‘장춘교도’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우장춘이 이룬 과학적 업적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씨없는 수박 개발보다도 실제로 더 뛰어난 연구성과를 낸 유전육종학자다. 당시 생물학계에서는 서로 다른 종의 합성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장춘이 최신과학으로 알려지던 염색체이론에 근거해 ‘종의 합성’ 이론을 실험으로 입증함으로써 세계 생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우장춘이 실험재료로 사용한 것은 배추과 작물이다. 배추, 양배추, 흑겨자와 같은 기본종 사이의 상호 교잡으로 복합종인 유채, 갓, 에티오피아겨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염색체 분석을 통해 밝혔던 것이다. 유채(n=19)는 배추(n=10)와 양배추(n=9)의 염색체가 합해져서 생기고 갓과 에티오피아겨자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는 ‘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불리며 지금도 종 합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은 짧은 기간 동안에 선진 육종기술을 한국에 정착시키고 우량종자를 확보해 자급하도록 했다. 꽃가루받이가 아예 안되거나 꽃가루가 나오지 않는 성질을 활용해 우수한 1대 잡종을 만드는 육종방법을 확립·보급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일찍이 1대 잡종 시대로 접어들며 우수한 채소종자의 생산과 자급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강원도 감자와 제주도 감귤도 그에 의해 재배법이 마련돼 오늘날처럼 대표적인 지역 특산물로 부상하게 됐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는?


한국 최초의 이학 박사로 잘못 알 려져 있는 이태규.


다음으로 우리는 과학분야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일부 사람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언론이나 인명사전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린 과학자만 해도 이태규, 최규남, 조응천, 조광하, 이원철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인이 과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시작한 시기는 1920-30년대 무렵부터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의 실력양성에 좀더 관심을 쏟으며 많은 사람들이 해외유학을 가게 됐다. 당시 국내에는 대학이 없던 상황이라 기독교계 학교 출신은 미국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일본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물론 이때만 해도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매우 적어 과학기술 전공자는 소수만이 배출될 뿐이었다.

이태규는 이 시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였다. 1931년 일본의 명문 교토제국대에서 화학을 전공해 3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조선이 낳은 최초의 이학박사’라며 뜨거운 축하를 보냈다. 이 기사는 물론 잘못된 보도였다. 뒤이어 그는 한국인으로서 꿈도 꾸기 힘든 제국대의 교수 자리에까지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때문에 이태규는 좀더 유명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라는 인식도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이학박사 학위를 처음 받은 사람은 이태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소한 이원철이다. 이원철은 1926년 미국 미시간대를 마쳐 이태규보다 5년 일찍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희전문학교 수리과 1회 졸업생인 그는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천문학을 전공해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이학박사가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태규는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자 화학부문의 1호 박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원철은 식민지시기에 ‘조선학계의 자랑’ 이태규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이태규에 비해 이원철은 일제 총독부가 차별하던 외국유학 출신인데다가 경력도 덜 화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신문들의 보도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학분야에서는 아주 드물게 박사학위자가 나오고 있어 정확한 조사를 하지 않으면 최초의 이학박사가 누구인지 알기가 힘든 면이 있었다. 또한 당시만 해도 큰 사회적 관심거리의 하나는 선구적인 인물을 부각시켜 그들의 활동을 눈여겨보는 것이므로 최초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과학분야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은 인물이 누구인지 그 진실을 가리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말았다.

이들 외에 조응천은 1928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학위를 받은 물리학 1호 박사이다. 그러나 그는 학계가 아닌 군대에서 오랫동안 전기통신 분야에 종사한 관계로 과학계에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못했다. 최규남은 몇년 후인 1932년 미시간대를 마쳤으니 물리학 부문에서도 2호 박사가 된다. 그럼에도 실제와 달리 그가 최초의 물리학 박사, 이학박사로 더 많이 알려진 이유는 한국물리학회 초대회장, 서울대 총장, 문교부 장관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덕택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조광하는 이들보다도 늦은 1943년 일본 오오사카제국대에서 화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은 화학부문의 2호 박사다. 한편 여성 중에서 가장 먼저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누굴까. 195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태규 박사는 고국에 돌아 와서도 강의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과학사 혼란에 한몫한 과장 보도

한국의 과학인물과 관련해 빚어지는 또다른 문제는 그들의 업적이 과장돼 엉뚱하게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분야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잘못된 이해가 벌어지기가 쉽다. 우선은 그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전공자가 아니면 제대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은연중에 한국인 과학기술자의 위대성을 보이려 세계적 성취로 내세울 만한 것들을 무리해서라도 찾아내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원철별’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원철은 박사과정에서 별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가 잡은 연구주제는 독수리자리에 있는 에타별에 관한 것이었다. 독수리자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견우성이 속해 있는 여름철의 대표적인 별자리다. 당시는 천문학자들 사이에 섀플리(Shapley)가 주장한 맥동설을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활발히 벌이고 있을 때였다. 맥동설(pulsation theory)이란 변광성 중에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해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화하는 별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원철이 에타별을 연구한 동기도 이 학설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에타별의 운동 특성을 밝히는 연구를 했다.

일부 사람들 중에는 이원철이 별 하나를 발견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그의 이름을 따서 원철별(Won Chul’s star)로 불러왔던 것이다. 때문에 원철별은 실제로 존재하는 별 이름으로 여겨졌고 이원철의 새로운 별 발견은 더욱더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1929년 발간된 잡지 ‘삼천리’의 기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보도된 내용은 “이원철은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개를 발견했고 그 별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원철별로 공칭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추측으로 꾸며진 소설 같은 이야기가 이후 실제 사실로 굳어지게 됐다.

그러나 이원철이 이룩한 성과는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에타별의 연구를 통해 맥동설을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은 7일의 주기로 밝기가 약 3-4등급으로 변하는 맥동변광성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던 것이다. 이는 별을 새로이 발견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첨단 연구분야를 주제로 삼아 이뤄낸 뛰어난 연구성과로 외국 학술잡지에 상세히 발표됐다. 새로운 별의 발견만큼이나 의미있는 과학적 성취를 당시에는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학적 이해와 역사적 안목 필요

우리는 한국의 과학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 당시의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현재의 눈으로 과학기술의 역사를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을 한 과학기술자만을 눈여겨보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한국의 과학인물을 볼 때도 우리는 남다른 성과에 초점을 맞추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세계최고의 발견이나 발명에 견줄만한가, 아니면 적어도 최초로 이뤄낸 성과인가 등을 자주 묻는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자가 일반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며 널리 알려져 있는 과학의 성취와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해서 그들의 탁월성과 뛰어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우장춘이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과학자가 아니고 이태규가 최초의 이학박사가 아니며 이원철이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명성은 퇴색되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뛰어난 과학적 성취를 이룬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기술자들이다. 오히려 피상적으로 알려진 내용보다 더 값진 연구성과를 거둬 과학기술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국의 과학인물은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과학활동을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고찰할 때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가능하다. 즉 과학적 이해와 역사적안목이 함께 녹아든 과학사적 접근방법을 통해 실제의 사실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의 과학기술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의 과학기술과과학인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층 더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200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근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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