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와 똑같이 서명할 수 있다면 백만장자처럼 행세할 수 있을까. 미국의 여성 추리소설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1921-1995)의 소설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백만장자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하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한 젊은이의 파멸을 그린 이 작품은 프랑스 출신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태양은 가득히’(1960)란 제목으로 영화화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최근에는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 의해 다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청년 톰 리플리와 샌프란시스코의 방탕한 부잣집 외아들 필립 그린리프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리플리는 필립의 아버지로부터 공부는 하지 않고 빈둥대고 놀면서 귀국하지 않는 아들을 데려오면 5천달러를 받기로 하고 로마로 떠난다. 리플리는 학창시절부터 자신을 멸시해온 그린리프를 만나 그의 돈과 지위에 굴종하며 하인 취급을 당한다. 그러면서 로마의 화려한 생활에 젖어든 그는 그린리프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갖고 싶어진다.
리플리는 요트에서 그린리프를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우의에 싼 다음 와이어에 묶어 바다 속에 처넣는다. 육지로 올라온 리플리는 그린리프의 신분증명서와 그의 서명을 위조하고 목소리까지 똑같이 흉내내면서 그의 돈을 인출하고 새 아파트를 얻는다. 리플리는 자신의 완전 범죄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세상을 비웃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지만, 마지막 반전이 그를 기다린다.
‘태양은 가득히’가 지중해의 환상적인 바다와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주인공 알랑 드롱의 절망적인 눈빛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마지막 반전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라면, 최근 리메이크된 ‘리플리’는 좀더 원작에 충실한 영화로 매트 데이먼, 주드 로, 기네스 팰트로우의 개성적인 연기 매력이 한껏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리플리가 그린리프의 서명을 열심히 연습하는 장면인데, 부단한 연습으로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서명을 하게 되는 리플리의 모습을 보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서명 위조 판단하는 필적 감정
문서 위조는 수백년 전부터 있어오던 사기로서 그 중 가장 흔한 형태가 바로 서명 위조다. 서명 위조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가장 손쉬운 형태가 제멋대로 위조하는 경우다. 그러니까 진짜와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남의 서명을 만들어내는 경우다. 이런 막무가내식 위조는 위조 여부를 알아내기도 쉬울 뿐 아니라, 나중에 용의자를 잡았을 때 필체 조사를 통해 범인 여부를 판단하는 증거자료로도 활용된다. 반면 눌러 만든 위조 서명은 다른 서명 위에 힘을 가해서 그 밑에 생기는 자국을 따라 글씨를 써서 똑같은 서명을 만드는 경우다. 이 어설픈 사기형의 경우에는 서명 모양은 비슷하지만, 펜이 지나가는 속도가 다르고 눌린 자국이 표시되기 때문에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 가장 정교한 형태가 바로 리플리처럼 원본 서명과 똑같을 때까지 계속 연습해 서명을 그대로 흉내내는 유형이다. 이런 용의주도형 위조의 경우에는 종종 원본 서명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서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명 위조를 포함해서 문서 위조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필적 감정은 과학수사의 가장 오랜 업무다.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범, 협박편지를 보내는 공갈범, 서명을 위조하거나 가짜 유언장을 만들어내는 사기범. 이들이 남긴 문서의 필체를 분석해 범인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문서 감정관이 하는 일이다. 문서의 위조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두 문서가 동일인의 것인지를 판별해야 하고, 유괴범이나 협박범의 용의자가 잡힐 경우에는 몸값 요구서나 협박 편지에 남긴 글씨가 그들의 필적과 같은 것인지 조사해야 한다. 결국 문서 감정관이 하는 일은 두 글씨가 동일인의 것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세기의 유괴사건 1천5백개 샘플로 해결
1932년 미국 FBI에 범죄과학연구실이 처음 문을 연 것도 ‘세기의 범죄’라 불리는 린드버그 사건의 유괴범이 남긴 몸값 요구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1932년 3월 두살이 채 안된 한 어린아이가 유괴됐다. 유괴범은 몸값으로 5만달러를 요구했고, 아버지는 돈에 비밀표시를 한 채 넘겨주었으나 아기는 집에서 8km도 안되는 곳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 사건이 세기의 범죄라 불릴 만큼 유명한 이유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였기 때문이다.
1927년 5월 21일 린드버그는 33시간 반만에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25살의 린드버그는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오티그라는 이름의 상과 함께 2만5천달러의 상금을 받으면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런 그의 아들이 유괴되자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고, 이 사건은 연일 신문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유괴를 뜻하는 ‘kidnapping’이란 단어가 생긴 것도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다. 또 유명인 가족을 납치해 주목받으려는 범죄자 심리를 일컬어 ‘린드버그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사건에서 연유된 것이다.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경찰은 독일계 목수인 브루노 하웁트먼을 린드버그 아들의 유괴범으로 체포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다가 1936년 전기의자로 처형당했다. 그가 실제 범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1차 대전 직후 반독일 정서가 고조됐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식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처음에는 종신형 정도의 형량이었으나 어린이 유괴 살인은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린드버그법’을 제정해 사형 선고를 내리고 전기의자에 앉힌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특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무기징역으로 감형될 수도 있었지만 그가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의 판결은 더욱 의심을 받았다.
하웁트먼을 범인으로 몰고 간 몇가지 증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의 필적이었다. 그는 문서 감정관에게 자신의 필체를 스스로 제공해주었고, FBI 연구실 창립자인 찰스 아펠은 그 필체를 몸값 요구서의 필체와 면밀히 비교했다. 1천5백개의 필적 샘플을 조사한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두 필체가 매우 유사하다는 증거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또 다른 감정관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웁트먼의 변호사였던 제임스 렐리는 두 필체가 다르다는 소견을 다른 감정관들을 통해 제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아펠의 증언은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결국 하웁트먼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됐던 판결 가운데 하나지만, 아펠의 필적 감정은 그 방법이 너무도 정교해 지금까지도 문서 분석자들이 훈련용 교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너무 똑같아도 위조 가능성
필적 감정은 사실 과학적 엄밀성과 객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조사방법이다. 사람들의 필체는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고, 자신도 똑같은 글씨를 되풀이하기 어렵다. 그래서 두 서명이 너무 똑같아도 위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서명이라도 정확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만일 두 서명의 형태가 정확히 일치한다면, 분명 그 중 하나는 위조된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글씨체에는 지문만큼이나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조차 글씨체가 다르며, 병에 걸린 경우를 제외하면 평생 변하지도 않는다.
우선 정확한 비교 분석을 위해서는 감정관들은 동일한 사람이 쓴 여러 샘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필체 범위를 지니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신용카드 영수증에 서명할 때와 집을 산 후 계약서에 서명할 때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서명하지 않는다. 또 필기도구, 바닥 상태, 종이의 재질에 따라서도 글씨체는 달라진다.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문서 감정관은 약 2백여명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들마다의 글씨 쓰는 스타일, 각 글씨의 경사도와 크기, 그것이 쓰여있는 문서상의 위치, 글씨들이 연결돼 있는 방식, 각 단어들간의 거리, 종이 위에 가해진 압력의 정도, 처음 단어를 쓰기 시작할 때나 나중에 끝낼 때의 필기 습관과 필기 도구의 흔적, 점을 찍을 때와 줄을 그을 때의 습관 등을 세밀하게 조사한다. 이같은 조사 방법에는 일반적인 규칙 같은 없으며, 얼마나 많은 특성이 일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특별히 없다. 모든 것은 감정관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있기 때문에 각 감정관들은 나름대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준을 정해 판단한다.
옛날 문서 가려내는 잉크의 화학꼬리표
역사적인 문서들의 경우 비교 분석할 수 있는 글씨 샘플이 부족해 감정이 어렵기 때문에 종이 재질이나 잉크까지도 검사한다. 종이는 기본적으로 섬유와 물, 그리고 각종 화학성분으로 이뤄져 있어서 만들어진 시기와 장소에 따라 종이의 성질이 매우 다르다.
1981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여겨지는 일기장이 발견된 적이 있다. 27권에 이르는 이 일기장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베를린에 밀반입됐다가 운반 도중 비행기 사고로 분실돼 결국 ‘나치 서류’ 소장가의 손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무려 2백만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판별된 이 일기장이 과연 진품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과학수사팀이 동원됐다.
그 결과 히틀러의 것으로 여겨지던 일기장의 종이에 1954년 이후 처음 사용하게 된 표백제 성분이 포함돼 있으며, 그 종이를 묶은 실이 세계대전 이후 사용된 인조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글씨도 1940년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잉크로 쓰여져 있었으며, 잉크에 포함된 염화화합물이 얼마나 증발했는가를 통해 작성 시기를 유추한 결과 겨우 1년밖에 안된 일기장이라는 사실이 들통나 버렸다. 거액의 돈을 노린 사기극임이 드러난 것이다.
1969년 이래 몇몇 잉크 제조업체들은 제품 속에 특정한 화학꼬리표를 붙여왔다. 감정관들은 그 화학물질의 존재 여부를 보고, 문서의 제작 시기를 알아낸다. 또 잉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성질이 있다. 바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며 색깔이 변하기도 하고 종이 속에 있는 화학물질과 반응하기도 한다. 이같은 모든 변화가 문서의 위조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위조범들은 종종 어떤 문서에 잉크를 이용해 숫자를 하나 덧붙인다거나 지우기도 한다. 하지만 잉크를 세밀히 조사해보면 이같은 속임수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잉크는 기본적으로 색깔을 내기 위한 색소와 그 색소를 담기 위한 용해제로 구성된다. 종이에 글씨를 쓰면 색소는 종이 표면에 남지만, 용해제는 섬유질 속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색소는 제거되거나 바래질 수 있지만, 용해제는 섬유질 속에 계속 남는다. 잉크로 글씨를 쓴 종이에 7백nm(나노미터, 1nm=10-9m) 이상의 적외선이나 4백nm 이하의 자외선과 X선을 이용하면 섬유질 속에 남아있는 용해제를 관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눈으로 식별하지 못하는 용해제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어 위조 여부를 판별한다.
비스듬한 빛이 진실 드러내
종이 위에 글씨를 쓰거나 인쇄하면 그 종이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종이에도 자국이 생길 수 있다. TV 드라마 ‘형사 콜롬보’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콜롬보가 흰 종이 위에 눌린 글씨를 알아보기 위해 연필로 가볍게 칠하면 그곳에 있던 자국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받은 형사라면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눌린 글씨가 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지기 때문.
추리소설 작가이자 과학수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피셔의 과학수사 지침서 ‘확실한 증거’(1996)에 따르면, 과학수사에 사용되는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어떤 물체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때는 빛을 비추는 각도를 바꿈으로써 그것이 보이게 하라는 것이다. 거실 바닥이나 가구의 표면을 전등으로 비스듬히 비춰보라. 그러면 온갖 종류의 체모와 섬유, 그리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따라서 콜롬보 형사는 종이 위를 연필로 칠하기보다는 비스듬한 불빛을 비춰봐야 했다.
최근에는 눌린 글씨를 밖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정전기 검출장치’를 사용한다. 이 장치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눌린 글씨가 있다고 여겨지는 종이를 유리판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마일라 필름을 펼쳐 놓는다. 다시 유리판 밑에 구리판 한장을 깔아 놓고 종이 위에는 복사기의 토너 같은 정전기 물질을 뿌려놓은 다음, 전압을 가하면 그 작은 토너 알갱이들은 구리판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눌린 글씨 쪽으로 이동한다. 결국 그 알갱이들이 눌린 글씨를 채워서 종이에 새겨진 글씨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눌린 글씨는 종이뿐만 아니라 필름에도 나타난다. 이처럼 최근에는 형사 콜롬보를 도와주는 장치들이 많이 개발돼 있다.
요즘에는 컴퓨터의 등장으로 협박 편지나 몸값 요구서도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해 프린트하기 때문에 필적 감정의 유용성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카드 사용의 증가로 서명 감정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컬러프린터를 이용한 지폐 복사나 문서 위조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다행히 리플리가 서명을 위조할 때나 콜롬보가 수사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교한 과학수사 장치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지문처럼 사람의 개성적인 필체를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 오늘도 과학수사연구소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연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