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말 대한민국 우주개발 역사의 새장이 열렸다. 한국 최초의 액체로켓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던 것. 이로써 2005년 우리 위성을 지구 궤도에 쏘아올릴 국산 우주발사체 개발에 성큼 다가섰다.
2002년 11월 28일 14시 52분 26초 서해안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진제 과학로켓 KSR-Ⅲ(Korea Sounding Rocket, 과학관측로켓)가 발사됐다. 이날 새벽 4시부터 시작된 카운트다운이 0이 되자 KSR-Ⅲ는 불을 뿜으며 서서히 발사대를 벗어났다. 액체추진제 로켓이라 그런지 하늘로 올라가는 속도가 고체추진제를 사용했던 KSR-Ⅰ이나 KSR-Ⅱ보다 훨씬 느렸다.
발사 후 30초가 지나자 로켓 엔진에서 만들어지는 굉음이 하늘로부터 울려퍼졌다. 발사장 근처의 관람석에서는 수십명이 추위도 잊은 채 상기된 표정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하늘로 치솟는 로켓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름 사이를 몇번인가 뚫고 올라가던 로켓은 연소가 끝나자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달 전부터 섬에 들어와 추위와 싸우며 발사 시험을 준비했던 60여명의 연구원들과 기술자들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액체로켓 KSR-Ⅲ는 처녀 비행인데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예정된 궤도를 따라 비행했다. 토종 액체로켓은 고도 42km까지 상승하며 80km의 거리를 성공적으로 비행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로켓과학기술자들이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도전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개발 예산이 충분치 못해 비행용 로켓을 단 한기만 제작했고 이 로켓을 계획에 따라 성공적으로 비행시킨 예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에서 로켓기술이나 부품을 사올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과학자들이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3천여개 이상의 부품을 100% 국내에서 만든 액체로켓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국산 액체로켓이 정상적으로 비행하는 동안 느낀 점은 우리 과학기술자들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고 지독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액체추진제가 유리한 이유
1989년부터 천문우주과학연구소(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 1989년 10월 한국항공우주연구소로, 2001년 1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바뀜)에서 고체추진제 과학로켓인 KSR-Ⅰ을 개발하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과연 우리나라도 우주발사체를 개발할 수 있을까?’라는. 또 어떤 조건의 우주발사체를 개발해야 유리할까라는 고민도 들었다.
로켓은 추진제에 따라 고체추진제 로켓과 액체추진제 로켓으로 나뉜다. 먼저 고체추진제 로켓은 화약 같은 고체 연료를 이용한다. 공장에서 추진제를 넣으면 10년은 보관이 가능하며 이 기간 동안에는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국내에서도 1972년부터 고체추진제를 이용한 로켓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러나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대형 고체로켓은 대형 미사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탓에 외국으로부터 기술이전도 어렵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거부감을 보여왔다. 때문에 국내에서 고체추진제로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데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반면 액체추진제 로켓은 고체추진제 로켓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비행방향과 속도를 조정하기 쉬워 우주개발을 위해서 여러모로 유리했다.
여러가지를 종합해볼 때 우리나라에서 우주발사체로 개발이 가능한 로켓은 액체추진제 로켓이라는 생각을 필자는 갖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항공우주연구소에서 1990년대 초부터 액체추진제 로켓 개발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작은 인공위성 자세제어용 소형로켓인 추력기부터 연구하면서 하나하나씩 액체추진제 로켓 엔진의 기초부터 배워나갔다. 추력기 국산화에 대한 연구는 한국통신에서 한국항공우주연구소에 지원해준 방송통신위성 관련 연구과제의 일부였다. 몇년의 고생 끝에 만들어진 첫 추력기는 추력이 2.3kg급(질량에 중력가속도를 곱하면 실제추력이 됨)으로 아주 작은 것이었다.
작은 로켓, 여행가방에 넣어 중국 방문
당시에는 이렇게 작은 규모의 로켓엔진을 국내에서 시험하기 어려웠다. 연료는 히드라진(인공위성 자세제어용 소형로켓에 쓰이며 촉매를 만나면 화염으로 분사되는 액체연료)이었고 특수촉매가 필요했는데, 촉매가 아주 비쌀 뿐만 아니라 수입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 가서 실험하기로 했다. 촉매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실험방법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1994년 11월 손바닥보다 작은 추력기를 여행용 가방에 넣고 중국 상하이로 갖고 가서 성공적으로 실험했다.
한편에서는 좀더 크고 연료와 산화제를 모두 액체로 사용하는 진짜 액체추진제 로켓엔진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액체 엔진의 제작을 맡을 산업체인 (주)현대기술개발(현 현대 모비스)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설계도 중요하지만 엔진의 제작도 중요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호흡을 맞춰야 했다.
1995년 드디어 추력 1백80kg인 국내 최초의 소형 액체추진제 로켓엔진을 개발해 9월 6일 (주)한화 대전공장에서 지상시험을 하는데 성공했다. 사실상 우리나라 액체 로켓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액체추진제 로켓엔진을 시험할 시설과 장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현대에서 제공한 컨테이너에 시험시설을 설치한 후 공터에 운반해 시험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시험할 장소도 쉽게 얻지 못하다가 겨우 (주)한화 대전공장의 빈터에서 첫 시험을 할 수 있었다.
두번째 엔진시험은 다음해 연구소의 공터에서 했다. 첫번째 시험을 해보니 연구소에서 해도 될 만했다. 연구소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난 뒤 문제가 생겼다. 밸브가 잘 닫히지 않았는지 추진제 중 하나가 새고 있었다. 당시 액체 엔진 시험에는 질산 산화제와 암모니아 계통의 연료로 구성된 추진제가 사용됐다. 질산은 강산의 일종으로 매우 위험했다. 시험의 책임을 맡았던 연구원이 목숨을 걸고 컨테이너 속으로 뛰어들어가더니 밸브를 닫고 뛰어나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연구원들은 한가지 일에 집념을 갖고 몰두하다보니 알면서도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물론 연소 시험할 때 옆에서 사진을 찍던 연구원이 엔진 소리에 놀라 뒤로 나자빠지는 일도 있었다.
개발계획 앞당긴 북한 대포동 쇼크
KSR-Ⅲ 액체추진제 과학로켓 개발사업은 국제금융기구(IMF)의 손길이 온나라의 겨울 하늘을 짓누르기 시작하던 1997년 12월 24일 총사업비 5백80억원으로 시작됐다. 2단형 중형과학로켓(KSR-Ⅱ) 개발사업에 이어 한국항공우주연구소에서 추진하는 국내 최초의 액체추진제 과학로켓 개발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목표는 국가가 21세기 초에 필요로 하는 우주수송체, 즉 우주발사체 개발에 필요한 필수적인 액체추진제 로켓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발사 목표연도는 2002년 12월이었고 사업책임은 필자가 맡았다.
연구개발 예산은 첫해와 둘째해에는 불과 25억원과 30억원이었다. 과연 2002년까지 5백80억원이 지원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1년 간 연구비가 30-40억원이라면 10년 이상 걸려야 5백80억원의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직과 인원도 너무 적었다. 연구의 초창기에는 연구원들도 액체로켓의 개발에 자신이 없었다. 국내에서 처음 연구·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항이 있어도 외국에서 배울 수가 없었다.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할 일은 태산처럼 늘어났는데, 예산은 턱없이 모자랐다.
우리나라가 장래에 우주개발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액체추진제 로켓기술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경험이 없다고 개발을 시도하지 않으면 영원히 갖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책임자인 필자는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이 바탕이 돼서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1호 로켓으로 인공위성 광명성 1호의 발사를 시도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KSR-Ⅲ 사업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우리로켓으로 우리의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계획이 2010년에서 2005년으로 5년 앞당겨졌다. 인공위성 발사체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액체로켓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KSR-Ⅲ의 중요성이 드디어 인정받았던 것이다. 1999년 KSR-Ⅲ 개발예산은 당초 30억원에서 1백97억원으로 증액됐다. 총개발예산도 당초 5백80억원에서 8백억원으로 증액됐다.
3천개 부품의 정상 작동 확인
설계된 KSR-Ⅲ 액체 과학로켓은 길이 13.5m 직경 1m이고 추진제를 채웠을 경우 로켓 전체의 무게는 6.1t 정도이다. 엔진에서 발생하는 추력은 12.5t이며, 엔진을 55초 동안 작동시킬 경우 42km까지 올라가서 80km를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지닌다.
로켓추진제는 산화제로 액체산소, 연료로는 등유를 선택했다. 저렴하고 환경친화적인 고성능 액체추진제다. 또 헬륨가스를 고압으로 압축해 연료통 속의 연료와 산화제통 속의 산화제를 엔진에 보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로써 로켓의 구조를 간단히 했으며 신뢰성을 높였다.
KSR-III의 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추력 12.5t의 힘을 60초 동안 발생시키는 액체추진제 엔진과 추진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엔진의 개발도 3단계로 나눠 실시됐다. 처음에는 추진제를 분사해 혼합시켜주는 분사기 개발용 시험 엔진을 만들어 수십회에 걸친 실험 끝에 분사기를 결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추력 1t급의 소형 엔진을 개발했다. 소형 엔진은 분사기의 배열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연구결과를 이용해 최종적으로 12.5t급 엔진의 개발에 들어갔다.
첫 12.5t급 엔진은 2001년 5월쯤 제작됐다. 이때는 엔진의 성능시험 시설이 건설중이었다. 이 엔진은 비행기에 싣고 러시아 모스크바 근처의 엔진 시험연구소로 가서 처음 시험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MTCR(미사일 기술이전 통제체제) 비회원국이었기 때문에 8초까지만 시험이 가능했다. 8초 연소시험에서도 엔진의 분사기 표면이 부분적으로 타들어가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후 수십회에 걸쳐 엔진을 수정하고 연소시험을 했다. 2002년 봄부터는 연구원의 시험장에서 시험이 가능했다. 2002년 5월 14일 드디어 60초까지 성공적으로 연소시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6월 27일에는 각종 밸브를 포함한 액체추진기관 전체, 8월 29일에는 로켓 전체에 대한 지상 성능시험에 성공했다. 이런 시험을 통해 3천여개의 액체추진제 로켓 부품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로써 최종 발사시험만 남겨놓은 상태가 됐다.
우리 발사체로 우리 땅에서
연구원들은 9월초 실제로 발사할 액체 로켓을 들고 섬에 마련된 발사장으로 들어갔다. 석달에 걸쳐 추운 바닷가에서 발사대를 세우고 로켓을 조립하면서 차근차근 발사준비를 진행했다. 5년 동안 액체로켓을 개발하는데 너무 고생스러워 이번 발사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연구원들은 이를 꼭 다물고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혹자는 연구개발은 실패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실패했을 때와 성공했을 때 연구원이 받는 대접은 천지차이다. 1997년 KSR-Ⅱ의 1호기 발사시험에서 실패했을 때 국정감사까지 받아야 했던 기억을 연구원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 손으로 만든 국내 최초의 액체추진제 로켓 KSR-Ⅲ는 성공적으로 비행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우주발사체의 독자개발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또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연구원들과 관련 산업체의 과학기술자들은 2005년 국산 우주발사체 개발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온국민에게 보여주었다.
2005년에 발사될 우주발사체는 60-70t으로 이번에 발사된 KSR - III의 10배나 되는 규모(1백kg급 인공위성을 저궤도에 올릴 수 있는 규모)다. 우주개발 중장기계획에 따르면 2005년까지 우주발사체와 과학기술위성 2호를 개발하고 전남 외나로도에 미국의 케네디센터 같은 우주센터를 건설할 예정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의 위성을 우리가 개발한 발사체에 실어 우리 땅에서 발사한다는 꿈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적절한 지원과 국민의 사랑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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