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에 침입한 해로운 병원체는 명백히 우리의 적이다. 생명체들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하면서 온갖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면역체계를 발달시켜 왔다. 만일 적을 동지와 혼동해 면역체계가 작동하면 어떻게 될까. '멀쩡한' 세포나 조직이 파괴될 것이다. 다행히도 정상인이라면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현명하게 적과 동지를 구분해내는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도어티와 친커나겔은 바로 이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기반이 될 수 있는 면역체계를 밝힌 학자들이다.
T세포가 노리는 두가지 타깃
면역체계를 구성하는 세포 수준의 기동타격대는 백혈구다. 백혈구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장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T세포와 B세포다. 침입자 역시 두종류로 나눌 수 있다.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 자체와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의 세포다.
면역체계는 이 두 종류의 침입자를 제거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당연하게도 자기 몸의 조직을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면역체계는 백혈구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미생물 자체와 감염된 세포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세포와 적들을 구별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백혈구가 어느 순간에 적을 살상할 것인지를 결정할 줄 알아야 한다.
1973-75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 위치한 국립대학 존커틴 의대에서 도어티와 친커나겔의 흥미진진한 실험이 진행됐다. 둘다 30대 중반 안팎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당시 면역학에서는 백혈구의 기능이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고 있었다. 먼저 미생물 자체를 제거하는 일은 B세포가 담당했다. 병원체가 침입하면 이를 인식한 B세포가 항체를 만들어 병원체(항원)와 반응을 일으켜 적을 소멸시킨다. 이에 비해 T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 세포를 제거하는 일을 담당한다. 하지만 T세포가 어떻게 이 세포를 인지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생명이식술' 분야에서 T세포의 또다른 기능이 밝혀지고 있었다. 외부 조직을 이식할 때 크게 두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거부반응과 적합반응이다. 그런데 T세포가 '어떤 단백질 분자'를 인식하고 나면 이식된 외부 조직을 죽이는, 즉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추측이 제기된 것이다.
도어티와 친커나겔은 쥐에게 뇌막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연구 소재로 잡았다. 먼저 감염된 쥐에서 T세포를 뽑아 냈다. 또 바이러스에 감염된 쥐의 세포를 시험관에 담았다. 이들을 반응시키자 T세포는 감염세포를 죽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실이 발견됐다. 다른 종의 쥐에게 같은 실험을 하자 T세포는 전혀 힘을 못쓰는 것이 아닌가. 감염된 당사자의 몸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도어티와 친커나겔은 T세포가 어떤 세포를 파괴할지 결정하는 것이 그 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즉 감염된 세포를 가진 생물이 조직적으로 적합한 항원(주조직적합항원, major histocompatibility antigen)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T세포가 그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할 때 적에 대한 공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들은 두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T세포가 감염된 세포를 인지하고 죽이기 위해서는 T세포 표면(수용체)과 감염세포 표면(항원)의 요철 부위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한가지 모델은 감염된 세포 표면에서 주조직적합항원이 바이러스로부터 파생된 단백질(항원)과 결합해 모양이 변한 뒤 다시 분리되고, T세포 수용체가 이들을 각각 인식한다는 내용이었다(그림). 또다른 모델은 주조직적합항원과 바이러스 항원이 결합해 모양이 바뀐 덩어리를 수용체가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면역학자들은 두번째 모델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
도어티와 친커나겔의 발견은 1974년 '네이처'에 게재됐다. 몸의 면역체계는 외부 침입자와 함께 '주조직적합항원'이라는 자신의 단백질 분자를 동시에 인식해야 제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이 공인된 순간이었다. 또한 주조직적합항원이 단지 생명이식술, 즉 조직을 이식할 때만 적용되는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면역 반응에 관여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도어티와 친커나겔의 업적은 이후의 면역학 연구에 근간이 됐다. 비단 바이러스뿐 아니라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체들을 T세포가 인식하는 메커니즘이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계속 제기됐다. 1980년대 연구계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정상 세포의 주조직적합항원은 바이러스 항원이 없다고 해서 그냥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든 단백질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 밝혀져 있었다. 그렇다면 T세포는 왜 이것을 인지하고 파괴시키지 않는가. 즉 왜 면역체계는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는가.
보통 T세포는 자신에서 만들어진 단백질과는 매우 강하게 결합한다. 많은 실험 결과 T세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상대와 강하게 결합하는 T세포는 분화 초기에 파괴되거나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자신에게 해를 주는 면역체계가 처음부터 효율적으로 제거된 셈이다.
도어티와 친커나겔의 업적은 각종 감염성 질환의 치료와 예방에 이론적 발판을 마련했다. 20년이 지난 연구에 대해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면역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다. 이들의 연구로 인해 면역학 분야에서 한 축을 이루는 '특이성' 문제, 즉 어떻게 면역세포가 정확하게 적을 인지하는지가 밝혀졌다. 이제 근본 원리로서 남은 문제는 면역학 탄생 이후 계속 수수께끼로 인식되는 '기억'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의 병이 회복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같은 병원체가 새로 침투했을 때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짧은 글이 과학도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면역학적 기억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