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례의 방문, 수차례의 전화, 마지막으로 e메일까지. 국내 최대 프로젝트를 이끄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박종오 단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는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야 했다. 약속시간을 정해서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은 후 박단장과 연결이 돼서 인사를 나누고 얘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려치면 그와의 시간은 이미 끝이 나고 있었다.
하긴 박단장의 바쁜 일정은 당연하다. 신규 거대시장을 창출할 목표로 기술경쟁이 치열한 마이크로시스템 분야에서 1천2백억이라는 거대 자본을 들여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이크로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 그의 어깨에 짊어져 있으니 말이다.
일단 마이크로시스템개발사업단의 단장이 어떤 역할을 갖는지를 물었다. 그는 “21세기 프론티어사업은 모든 책임이 단장에게 있다”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사업단의 최종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과제들을 정하며, 이를 추진시키는 일이 단장으로서 첫번째 역할이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시장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서 변동상황을 곧바로 사업에 반영시켜야 한다. 따라서 단장의 운영철학과 판단력이 사업단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진행된 국내의 어떤 프로젝트도 책임자가 이처럼 막대한 임무를 갖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단장은 어떤 원칙을 갖고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을까.
‘가급적 제한요건을 없앤다’는 것. “원칙적으로 국내 연구진보다 외국 연구진이 우수하고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외국 연구진을 활용하자는 의미다”라고 이 원칙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국가 연구개발 프로그램에서 외국 연구기관에 직접 연구개발 경비를 지원하는 첫사례가 됐다. 여기에서 최전선 선두지위자로서 그의 진취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과감한 판단력 발휘
그러나 국내 연구진에게도 부족한 돈을 해외의 연구진에게 지원한다는 것이 왠지 아깝게 느껴졌다. 이에 대해 “우리의 국부 창출이 본 사업의 목표다. 따라서 외국 연구진에게 연구개발 경비를 지원할 경우 받을 수 있는 결과와 특허 확보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갖는다”고 박단장은 말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과감하게 과제 지원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실례로 1차년도에 참여했던 유럽의 한 연구기관이 2차년도 협약시 지적 재산권 문제로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업단에서 기술협의를 위해 방문 요청을 해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박단장은 고심 끝에 과감히 지원을 중단시켰다.
여타의 국가 프로젝트 운영 방식에서는 과제가 중단될 경우 중단사유나 운영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사업단에 문제제기가 될 수 있다. 때문에 그냥 마음에 안들지만 지원을 계속할 수도 있다. 결국 국가경비가 외국으로 계속 유출돼 더 큰 낭비가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사업단 운영의 결정권이 보장되는 프론티어사업의 특징을 엿볼 수 있었다.
사업단 운영에서 그의 과감한 점은 또다른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급격히 발전하는 MEMS 분야에서 10년 후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박단장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갖고 있다.
‘유기적으로 계획을 꾸준히 조정한다’는 것. 10년 후 목표를 정해 연구개발해야 할 기술을 선정·개발하되 세계적인 경쟁구도에서 우리의 경쟁상대의 상황을 파악해서 끊임없이 사업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기술로 생각해 개발계획을 짜고 연구개발을 시작했는데, 세계적인 대기업이 그 분야에서 우리 사업단보다 우월한 제품을 출시할 경우 즉각적으로 대응방안을 결정해야 한다. 계속 개발할 것인지, 계획을 수정할 것인지, 아니면 경쟁상대로부터 기술을 도입할 것인지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제를 중단시킨 예가 있었다. 외국 경쟁상대와 비교해, 굳이 투자해 효율성이 없으면 과감히 판단을 내려야 한다.
선진국에서 중요한 기술이거나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기술의 경우, 박단장은 ‘경합과제’ 방식을 동원한다. 즉 여러 경쟁팀이 동시에 과제를 수행해 결과를 보는 방법으로 진행시킨다. "경쟁과제의 경우 연구성과가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합과제에 참여하는 연구진에게는 피 말리는 일이긴 하지만.
사업단 운영에 대한 박단장의 이같은 원칙을 듣고, 우리나라가 마이크로시스템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당당히 앞서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풀어오른다. 박단장은 앞으로 8년 동안 하나하나씩 구체적인 성과를 대중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일반인들도 그 과정을 관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