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뇌질환 난치병으로 불리는 파킨슨병의 획기적 치료법이 국내의 두 연구자에 의해 동시에 발표됐다. 이번 발표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 결과여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성체 줄기세포와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한 두 연구를 알아보자.
지난 10월 21일 캐나다 토론토의 풋불 리그경기장은 관중들의 함성으로 떠들썩했다.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서 한 흑인이 일어나 유창하지도 힘이 있지도 않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관중들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복서로불리는 무하마드 알리였다. 한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로 세계인 지금은 두손을 덜덜 떨며 불안정한 자세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알리는 자신이 앓고 있는 파킨슨병 연구기금 마련을 위해 2만5천명의 관객 앞에 섰다. 그는 파킨슨병은 신이 부여한 시련이지만 쇠약해지더라도 약 먹는 것을 결코 포기해선 안된다며 환자들을 격려했다.
운동기능 조절하는 도파민 상실
파킨슨병은 중뇌의 흑색질에 위치한 도파민성 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사멸돼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부족해짐에 따라 생기는 신경질환이다. 1817년 영국인 의사 제임스 파킨슨이 최초로 보고했다고 해 파킨슨병이라고 부른다. 치매나 중풍과 유사한 인지기능 장애를 보이며 무엇보다 몸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증상이 특징이다. 손을 심하게 떤다거나 멈춘 상태에서 잘 움직이지 못한다.
파킨슨병은 아주 서서히 발생하는 퇴행성 질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가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보통 중뇌에 있는 흑색질 신경세포의 약 80% 이상이 파괴됐을 때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신경세포는 이미 대부분 사멸했다는 말이다.
최근 아주대 의대 뇌질환 연구센터 진병관 교수팀은 혈액응고에 관여하는 트롬빈이 뇌와 척수에 존재하는 소신경교세포라는 염증세포를 활성화, 도파민 신경세포를 사멸시킴으로써 파킨슨병이 발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국내 연구자 두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주대 뇌질환연구센터의 김승업 소장과 마리아병원 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모두 줄기세포를 이용해 기존 치료방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흑색질의 신경세포는 뇌의 기저핵과 연결돼 있는데, 기저핵은 뇌의 운동 피질과 다시 연결돼 있어 인체의 운동을 부드럽고 조화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이런 기저핵의 기능을 조절하기 위해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 바로 도파민이다. 따라서 도파민 부족은 운동기능의 장애를 초래하며, 파킨슨병의 주요 증상인 손떨림, 경직, 느린 행동, 불안정한 자세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파킨슨병의 원인은 한마디로 도파민의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치료방법은 어떻게 하면 부족한 도파민을 공급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도파민을 생산하는 건강한 신경세포의 이식이다.
뇌세포 배양이 열쇠
뇌세포는 다른 세포와는 달리 한번 만들어지면 절대 분열하지 않는다. 사람의 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식 세포를 낳아볼 기회도 없이 죽어가는 운명인 것이다. 따라서 뇌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하기는 무척 까다롭다. 따라서 세계의 신경과학자들은 뇌세포를 배양할 수 있는 조건과 시험관 내에서 뇌세포를 분열시킬 수 있는 조건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국내 연구자 가운데서도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 업적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학자가 있다. 지난 1998년부터 아주대 뇌질환연구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는 김승업 박사다. 그는 거의 반평생을 신경과학 분야에 매달렸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1년 일본 교토대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45년간 미국, 캐나다, 스웨덴을 돌며 신경세포 배양 연구에 매달렸다. 김 박사는 그동안 이 분야에서 ‘사이언스’와 ‘네이처’ 등의 세계적 학술지에 3백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 과학기술한림원은 이런 그의 업적을 높이 사 지난 11월 21일 올해 처음제정된 ‘GSI 의약학상’을 김박사에게 수여했다. 한림원상 역사상 의학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오기는 김 박사가 처음이다.
김 박사는 가장 먼저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살리는 방법’에 몰두했다. 김 박사가 신경과학 분야에 매진하던 1970년대에는 시험관 배양의 대상이 신생아의 뇌조직이었다. 성인 뇌세포에 비해 키우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킨슨병은 중년이 넘어서야 모습을 나타내므로 성인의 뇌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김 박사는 펜실베이니아대 신경병리학 교실로 자리를 옮긴지 6년만에 성인의 뇌조직을 시험관에서 배양하는데 성공했다.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배양할 때 여러 영양분과 함께 효소를 처리하는데, 그동안 학자들이 사용한 효소는 성인의 뇌조직에는 맞지 않아 번번히 실패하고 있었다. 김 박사는 이 효소가 성인 뇌세포의 세포막을 녹일 정도로 독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전혀 다른 효소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뇌세포를 시험관 내에서 살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파킨슨병 치료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건강한 사람의 뇌세포를 이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식할 뇌세포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불과 2-3cm크기의 태아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뇌세포의 양은 한정돼 있어, 보통 파킨슨병 환자 한명을 치료하는데 낙태된 태아 10명 정도의 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어떻게 하면 신경세포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체 줄기세포에 암 유전자 끼워 넣어
해결의 열쇠는 줄기세포에 있었다. 줄기세포는 인체 내의 2백10여가지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만능세포를 말한다. 크게 배아에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와 성체에서 얻을 수 있는 성체 줄기세포가 있다. 이 중 성체 줄기세포는 사람의 뇌 속에도 존재한다. 사람의 뇌 안쪽에는 뇌실이라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신경세포로 완전히 분화가 덜된 성체 줄기세포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 박사는 1998년 국내로 귀국하면서 아주대 의대에 뇌질환연구센터를 만들어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뇌실의 신경줄기세포를 이용하면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배양하던 예전 수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건강한 뇌세포를 직접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양이 문제였다. 신경줄기세포도 일종의 세포이기 때문에 이것이 분화해 완전한 신경세포로 되고 나면 더이상 분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체 신경줄기세포 자체도 합법적으로 낙태된 태아에서 구하기 때문에 그 양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김 박사는 어떻게 하면 신경세포를 대량으로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신경줄기세포가 암처럼 무한히 분열하면 좋을 텐데’하는 아이디어가 머리속을 스쳐갔다. 신경줄기세포 속에 암 유전자를 삽입해 이를 무한히 분열시킬 수 있다면, 낙태된 태아의 뇌를 더이상 이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88년, 김 박사는 쥐와 닭, 원숭이의 유전자를 이용해 줄기세포에 세 종류의 동물 유전자를 끼워 넣는데 성공했다. 쥐의 유전자(네트로 유전자)는 줄기세포 유전자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역할을, 원숭이 유전자(SV40p)는 쥐 유전자가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프로모터 기능을, 닭 유전자(V-myc)는 줄기세포를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암 유전자의 기능을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줄기세포에 외래 유전자를 삽입하는 시도는 없었기 때문에 이 성과는 그해 세계적 과학전문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 표지 논문으로 게재됐다.
김 박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줄기세포(불멸화된 신경줄기세포)에 파킨슨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장치를 부가했다. 도파민은 뇌 속에서 타이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여러 효소에 의해 변형돼 생성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효소가 타이로신 하이드록실레이즈(TH)와 GTP 사이클로하이드롤레이즈(GTP-CH)다. 김 박사는 TH를 만드는 유전자와 GTP-CH 유전자를 불멸화된 신경줄기세포에 삽입했다. 도파민을 생성하는 신경세포를 외부에서 대량으로 만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를 뇌 속에 이식하면 파킨슨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 박사는 “이 줄기세포를 당장은 사람에게 적용하기 어렵다. 파킨슨병 모델 쥐에게는 분명히 효과가 있지만 암세포를 포함하고 있는 이 세포가 사람에게 들어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뇌질환연구센터는 서울대 의대와 공동으로 말기 파킨슨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배아 줄기세포 이용한 연구도 성공
한편 마리아병원 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는 파킨슨병 치료법을 또다른 방향에서 연구했다. 그는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줄기세포주에 도파민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삽입해 파킨슨병 치료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줄기세포주는 태아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분화는 억제하고 분열만 하도록 계속 키운 줄기세포 덩어리를 말한다.
지난 10월 31일 박 박사는 이 연구소의 이영재 박사와 함께 “도파민 생성에 관여하는 2개의 유전자를 인간 배아 줄기세포에 삽입해 도파민을 생성하는 신경세포를 만드는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또 이렇게 유전자 조작된 배아 줄기세포를 파킨슨병 모델 쥐 3마리의 뇌에 이식한 결과, 1마리는 운동성이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됐고 나머지 2마리도 증상이 개선됐다는 것이다.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대상으로 한 가장 최근의 연구 업적은 중국의 핑 우 교수가 지난 11월 11일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한 것이다. 이 연구는 아무 조작도 하지 않은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쥐의 척수에 이식해 이것을 신경세포로 분화시키는 실험이었다. 박 박사의 이번 결과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신경세포로 분화시켰을 뿐 아니라, 배아 줄기세포에 세계 최초로 유전자 조작을 했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에 열린 오송 국제바이오엑스포에서 줄기세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들이 모여 줄기세포 연구의 미래에 대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여기서 세계적 연구자들이 입을 모은 것은 줄기세포 외부의 특정 분화조건을 찾을 것이 아니라, 특정 세포로 분화할 수 있도록 줄기세포 자체에 유전자 조작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박 박사는 도파민 생성에 관여하는 TH 유전자와 GTP-CH 유전자를 배아 줄기세포에 삽입했고, 이를 파킨슨병 모델 쥐에 삽입해 배아 줄기세포가 도파민을 생성하는 신경세포로 분화됐음을 세계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
파킨슨병이 무서운 이유는 육체적 불편함도 있지만 ‘정신적 사망’이 더욱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수족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으며, 보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노년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현대에는 파킨슨병 등의 퇴행성 질환자수가 크게 증가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1백명 중 한명이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 등의 치매를 앓고 있으며, 파킨슨병 환자는 5만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파킨슨병은 최근에서야 알리와 ‘백 투 더 퓨처’로 유명한 미국 배우 마이클 제이 폭스 덕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특히 폭스는 미 의회 증언을 통해 파킨슨병 연구를 위한 자금 지원을 늘려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이 덕분에 파킨슨병 연구를 위한 기금은 지난 5년 동안 미 행정부가 요청한 것보다 20억 달러나 초과 책정됐다.
김 박사는 성체 줄기세포를, 박 박사는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해 도파민을 생성하는 건강한 신경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많은 전문가들은 파킨슨병 정복이 머지 않은 미래에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두 실험 모두 쥐를 대상으로한 결과다. 현재로서는 이 세포를 사람에게 직접 이식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생명공학 발전사를 볼 때, 많은 획기적 방법들이‘쥐’에서‘사람’으로 넘어가는데 큰 좌절을 겪고 말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번만은 무사히 이 관문을 통과하길 바란다. 파킨슨병 치료법은 무하마드 알리가 걸린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전세계 수백만 환자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