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분야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나노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안되기 때문이죠.”
첨단 산업에 대한 기대감 속에 나노 열풍이 강하게 불어닥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테라급나노소자 개발사업단을 이끌고 있는 이조원 단장(49)을 만나기 위해 KIST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예상을 뒤집은 이박사의 첫인상. 날카롭고 조금은 까다로울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편안한 인상에 웃음마저 소탈해 친근한 옆집 아저씨의 모습이 금새 떠올랐다. 하지만 사업단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눈빛과 말투엔 예리함이 서려있었다.
나노 아니면 길이 없다
나노 분야가 지금처럼 주목받게 된 것은 그다지 길지 않다. 특히 1992년 삼성종합기술원 신소재연구실에서 일을 하던 시절, 나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나노 연구를 추진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단장은 실장이라는 직위가 아니었다면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정도라고까지 표현했다.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간단하고 명쾌한 답변만큼이나 그의 머리 속엔 나노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명확히 꽂혀 있는 듯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노 아니면 길이 없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초창기에는 과연 이 일을 계속 진행해야 할 것인지 회의도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저와 함께 일했던 훌륭한 동료들이 명예로나 경제적 면으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죠.”
당장 떨어지는 단감을 먹기보다는 좀더 먼 미래를 내다보려는 노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단장. 그의 이력엔 독특한 점이 있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전공을 바꿔왔다는 것. 학부 땐 금속공학을 전공했다가 석사 때의 세부전공은 전기화학, 박사 때는 물리금속을 전공했다. 새로운 분야, 그리고 앞서 나갈 분야에 대한 그의 도전 정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르바이트생의 성실함이 인상적
이단장은 1992년 귀국해 당시 불모지였던 나노 테크놀로지를 어렵사리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나노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나노가 자신의 종교와 다름없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이런 그의 삶에 작게, 혹은 크게 영향을 미쳤던 주변 인물들은 누가 있을까. 어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함께 한 여러 동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고동락했던 여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일하면서도 몇날 며칠 함께 밤을 지샐 정도로 욕심이 많았으며,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똑똑했다고 한다.
“김미영씨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던 여학생입니다. 계속 함께 일하고 싶었는데 대학원에 진학했죠. 그런 좋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힘차게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단장은 동료들의 격려와 공감대를 통해 그 당시에 겪었던 갈등과 불이익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야기의 중심이 사람들로 맞춰지자 미국 유학 시절 겪었던 사람들, 특히 학문하는 자세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유학하는 동안 귀감이 됐던 대표적 인물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그는 카네기멜론대 화학공학과의 전명식 교수를 언급했다. 박사후 연구생 과정을 밟는 동안 지켜볼 수 있었던 전교수는 아침 9시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젊은 사람들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춰 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힘들 때면 전교수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고 말했다.
“전교수님은 제게 ‘이게 바로 경쟁력이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해준 분입니다. 그 분을 만난 덕에 제 자신의 경쟁력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미국의 토론문화 본받고 싶어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미국 학생들의 토론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했다. 어떤 한가지 주제에 대해 4-5명이 둘러앉아 장시간 동안 토론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려가는 자세는 지금도 하나의 단체에 속한 사람으로서 명심하는 요건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토론문화였죠. 학문적인 문제로 심하게 충돌하더라도 토론이 끝나고 나면 전혀 뒤끝이 없었으니까요.”
의견이 다를 경우 충돌하는 과정이 생겨나면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관계도 좋지 않아지는 우리의 토론문화를 반성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혼자서 연구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서구의 좋은 토론문화를 받아들여 학문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단장이 사업단과 관련한 업무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때는 다름 아닌 산에 오르는 시간이다. 그는 등산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운다. 중요한 결정에 도움을 주면서도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 이박사의 모습이 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반도체기술의 패권 장악
테라급나노소자 사업단(테라급은 메모리 집적도와 속도가 현재보다 1천배 이상이라는 의미)은 2000년 6월 결성, 나노분야의 기술확보를 통해 반도체기술의 패권을 장악한다는 사업 비전을 갖고 있다. 향후 5-10년 내에 겪을 반도체 소자들의 기술적·제조상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계획으로, 초고속·초고집적·초저소비전력 나노기능 소자를 개발하려는 것이 사업단의 목표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 집단과 사업화 집단의 양대 축을 구성해 산업전략과 기술개발전략을 연계하고, 이를 위해 국제공동연구 등 개방형 산학연 협력을 추진할 방침이다. 또한 과제관리시스템 등 과학적 방법론을 적극 도입해 활용하고, 기업 현장을 개방해 새로운 산학연 협동체계의 틀을 구축할 계획이다.
사업단의 과제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각 과제의 명칭은 테라급 나노일렉트로닉스(1천배 이상 메모리 집적도와 속도를 갖는 소자 개발), 스핀트로닉스(전자의 스핀을 이용한 메모리 응용 개발), 분자전자소자(분자를 이용한 소자 개발), 나노요소기술이며, 소과제와 최종 목표도 구체적으로 세분화돼 있다. 이번 사업은 3단계로 짜여져 있으며, 1단계와 2단계는 3년, 3단계는 4년 진행으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