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 내 수많은 화합물 중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해 반응을 일으키는 효소.최근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가진 효소를 모방한 인공효소가 각광 받고 있다.여러가지 화합물이 뒤섞인 환경에서 활약할 미래의 주인공, 인공효소를 만나본다.
생체에는 수천 종류가 넘는 화합물들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체 내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화합물 중에 필요한 화합물만 골라져 반응이 일어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자연이 고안해낸 물질이 바로 효소(enzyme)다.
선택적인 생체의 효소를 모방하는 화학·생물학적 기술이 20세기 말에 시작됐다. 인공효소라 불리는 이 분야는 21세기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인공효소는 우리가 원하는 반응을 골라 촉진하므로 여러가지 화합물이 뒤섞인 환경에서도 정확하게 그 반응 물질을 찾아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까지의 화합물 합성법의 개념을 바꿀만한 얘기다.
모양·성질 구분하는 똑똑한 효소
인공효소를 이해하기 전에 우선 화학반응에 대해 알아보자. 산소분자와 수소분자가 만나 물이 되는 것과 같은 변화를 화학반응이라 부른다. 화학반응을 통해 산소분자나 수소분자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완전히 바뀌어서 물분자라는 새로운 화합물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생체 내에서는 이와 같은 화학반응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음식물에 들어 있는 여러 물질을 잘게 분해하는 반응, 그리고 작은 화합물로부터 우리 몸을 유지하는 복잡한 기능의 소분자화합물(분자량 1천 이하)을 만들거나, 이보다 큰 고분자화합물(예를 들어 단백질, DNA 등)을 만들어내는 반응 등이다. 또 기능하지 않는 단백질을 기능하도록 활성화하는 반응도 생체 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화학반응이다.
이와 같은 반응이 가능한 이유는 생체 내 구석구석에 화학반응을 도와주는 효소라는 단백질이 있기 때문이다. 효소의 가장 큰 특징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데 자기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기질(화학반응으로 변하는 화합물)만을 새로운 물질로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더욱이 독특한 모양이나 성질을 가진 분자만을 골라 선택적으로 반응을 촉진시킨다.
일반적으로 화학자가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반응에서는 기질의 모양과 성질, 크기에 관계없이 같은 작용기(functional group, 화합물 내에서 화학반응에 쉽게 참여하는 민감한 부분)는 같은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생체 내에서 효소는 같은 종류의 작용기를 가진 기질이라 하더라도 이들의 모양과 성질을 구분해 선택적으로 반응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차이는 반응이 일어나는 공간 때문이다. 생체 바깥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기체나 액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면에, 생체 내의 반응은 효소 내의 조그마한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는 활성부위(active site)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활성 부위는 대체로 좁고 깊숙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선택적으로 그 모양에 맞는 화합물만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 입맛에 맞는 대상 찾기
인공효소를 만들기 위해 화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서부터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효소의 활성부위를 모방해, 즉 기질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주머니 형태의 화합물을 만들고 한쪽 끝에 작용기를 달아 주머니에 들어온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제조한 주머니 모양의 화합물은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기질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화학자들은 생명과학자들이 사용해 왔던 여러 종류의 생물학적 라이브러리(도서관처럼 다양한 종류를 모은 집합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항체(이물질인 항원에 대응하는 면역단백질), 펩티드(단백질보다 작은 유기물질), 뉴클레오티드(DNA와 같은 핵산의 구성 성분) 라이브러리 등이 있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어떤 유기화합물 집합보다 더 다양하다고 생각된다.
항체와 펩티드 그리고 뉴클레오티드를 3차원으로 구성하면, 효소와 같은 반응 활성 부위와 유사한 주머니 모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머니의 모양은 아미노산 또는 뉴클레오티드의 배열 순서로 결정나게 되므로 그 다양성은 아미노산서열이나 염기서열 만큼 풍부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인공효소는 이와 같은 거의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우리 입맛에 맞는 효소역할을 할 수 있는 항체, DNA, 펩티드를 찾으면 된다.
폴링의 말에서 힌트를 얻다
항체 라이브러리는 인공효소를 제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로 생각된다. 두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라이너스 폴링은 1940년대에 자연효소와 항체의 유사점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효소는 수천만년 동안 촉진하는 화학반응의 전이상태(화학반응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고개)에 상응하도록 진화돼 왔다. 그 결과 효소의 활성부위는 전이상태의 물질과 반응하면서 에너지를 낮춰 화학반응을 촉진한다. 이에 반해 생물이 가지고 있는 항체는 화학반응의 초기 상태에 있는 안정한 화합물에 상응하는 배열을 가지도록 진화됐다.”
머리가 좋은 화학자들이 이 짤막한 말의 뜻을 이해하고 항체로 인공효소를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만약 전이상태의 물질에 대한 항체를 만든다면, 효소의 활성부위와 똑같은 모양을 갖기 때문에 인공효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이상태는 매우 불안하고 일시적이다. 이에 대한 항체를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다. 따라서 기능과 형태가 전이상태와 비슷한 모방분자를 만들어 냈다. 모방분자는 전이상태와 비슷하지만 안정한 화합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항체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든 항체도 전이상태의 에너지를 낮춰 효소처럼 반응을 촉진시킬 수 있다.
단백질이 없던 시절의 효소, RNA
1986년 최초로 등장한 인공효소는 바로 앞에서 말한 촉매항체(catalytic antibody)였다. 이 촉매항체는 에스테르가수분해반응(물(H₂O)을 사용해 에스테르(-COO-)를 카르복시산(-COOH)과 알코올(-OH)로 분해하는 반응)의 전이상태 모방분자에 대한 항체를 제조했는데, 에스테르가수분해를 약 1만배 정도 빠르게 촉진시켰다. 이 성공이 있은 후에 약 50-60여종의 특이적 유기화학 반응이 촉매항체를 통해 촉진된다는 사실이 발견됐으며, 실제로 체내에 쓰일 수 있는 촉매항체도 곧 등장할 예정이다.
RNA는 DNA와 유사하면서도 그 형태는 다르다. DNA는 염기서열끼리의 짝짓기에 의해 이중나선구조를 하고 있지만, RNA는 이중나선의 일부에다 이중나선을 이루지 못하는 염기서열들이 루프(loop, 고리모양)를 이루고 있다. RNA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3차원적 주머니는 효소의 활성 주머니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원래 RNA는 DNA가 가지고 있는 유전인자를 단백질로 연결하는 중요한 분자이지만, 원시지구(단백질, 즉 효소가 없던 시절의 지구)에서는 효소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자다. 실제로 이들 RNA가 스스로를 분해하고 붙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일찌감치 발견됐다. 이 외에도 RNA는 펩티드 결합, 당 결합 등을 만들기도 하고, 펩티드, 에스테르 결합을 분해하기도 하는 여러가지 성질을 갖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이들의 특징을 극대화한 인공효소가 가능할 전망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성과와 연계
인공효소는 원하는 반응만을 촉진하는 도구이므로 매우 많은 분야에 사용될 수 있다. 생체 밖에서는 우리가 의도하는 촉매로 작용해 원하는 산물을 얻는데 공헌을 하게 된다. 우리 몸에 쓰이는 약과 같은 특수한 화합물을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공효소의 진가는 생체 내와 같이 여러개의 기질들이 섞인 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촉진하는 화학반응이 매우 선택적이기 때문이다. 인간게놈의 염기서열이 밝혀지면서, 표적단백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서 10-20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들 표적 단백질을 분해할 수 있는 촉매항체야 말로 새천년에 걸맞은 새로운 치료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치료제는 표적 단백질을 인식해 이것의 기능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 치료제는 약효를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투여했는데, 치료제가 다른 단백질과 결합해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촉매가 약으로 쓰인다면, 소량을 사용하게 되므로 약의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현재 인공효소의 개발 수준을 사람의 성장기에 비유하면 아직 어린이 수준에 불과하다. 물리, 화학, 생물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소화한 창조적인 과학자만이 어린이 수준의 인공촉매를 성숙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