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디스커버리’지는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하던 로켓 과학이 미술품의 복원에 탁월한 효과를 거뒀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술품과 NASA의 로켓 과학.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가지가 과연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과학자들은 가끔 아주 우연한 발상에서 탁월한 결과를 끌어낸다. 또 어떤 목적으로 연구하던 분야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쓰임새로 이용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면, 레이더의 연구가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의 발명을 가져오는 경우처럼 말이다. 최근 ‘디스커버리’지가 보도한 사례야말로 이러한 예가 될 것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하던 로켓 과학이 엉뚱하게도 미술품의 복원에서 탁월한 효과를 거둔 것이다.
우주선 표면 녹이는 강력한 반응
‘산소’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대기 중에 포함된 산소 분자(O2)만을 연상한다. 하지만 산소는 산소 분자 외에 산소 원자(O)로, 그리고 원자 세개가 모인 오존(O3) 형태로도 존재한다. 산소 분자와 오존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산소 원자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산소는 분자 상태로 형성돼 있을 때 가장 안정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대기 중의 산소는 항상 분자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높은 고도에서는 자외선에 의해 산소 분자가 원자 상태의 산소로 분해된다. 안정된 분자 상태에서 불안정한 원자 상태로 변한 산소는 다른 물질과 만나 반응하기 위해 대기권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우주선의 표면에 부딪치면 강력한 반응성으로 우주선 표면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결과적으로 우주선의 표면은 산소 원자에 의해 손상을 입는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이같은 산소 원자의 작용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우주선, 특히 장시간 동안 사용해야 하는 인공위성의 수명이 산소 원자의 화학 반응으로 인해서 현저하게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우주선의 태양열 전지판이 산소 원자에 의해 손상돼 우주선의 연료 공급이 차단될 위험도 있다. 우주선 표면에 고분자로 된 보호막을 씌워 봤지만 산소 원자의 강한 반응성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NASA 글렌 연구센터의 여러 연구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이 산소 원자의 반응성을 연구하는 전기물리학(electro-physics)이다. 전기물리학 연구실의 브루스 뱅크스와 샤론 밀러는 자신들의 연구 내용을 뒤집어 생각해봤다. 산소 원자는 우주왕복선의 표면 보호막을 분해시킬 정도로 강력한 반응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강한 능력을 반대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은 궁리 끝에 표면이 심하게 손상된 예술품, 예를 들면 화재로 망가진 미술 작품을 복원하는 데에 산소 원자의 분해 능력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내기에 이르렀다.
화학 반응이 불러일으킨 기적
예나 지금이나 미술품은 화재에 속수무책이다. 1992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거주하는 윈저성에 불이 났을 때도 영국 왕실은 오랜 시간 동안 수집해온 많은 미술품들을 화마에 속수무책으로 잃었다.
불길이 그림의 표면을 살짝 그을리기만 해도 현재의 기술로는 완전한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다. 불에 그을린 물건에서 그을음을 벗겨내는 보편적인 방법은 벤젠이나 알코올 같은 유기용매로 표면을 닦아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림, 더구나 그려진지 오래된 그림의 표면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부스러지기 쉽다. 솜 등에 용매를 묻혀 손상된 부분을 문지르면 그림의 표면은 부풀어오르거나 탈색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술관은 그림 위에 보호용 코팅을 한겹 씌운다. 코팅은 습기나 관람객들의 손때 등에서 그림을 어느 정도 보호해주는 작용을 한다. 이 코팅이 상할 정도로 불에 그을린 경우는 그림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NASA 연구진이 생각해낸 산소 원자를 이용한 복원법은 기존의 복원법에 비하면 혁신적인 신기술이었다. 우선 기존 복원법은 필연적으로 그림 표면과 어떠한 방법으로든 접촉하게 된다. 이미 손상된 그림은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손상을 입는다. 이에 비해 산소원자 복원법에서 그림과 접촉하는 것은 기체 상태인 산소 원자다. 물리적인 접촉이나 마찰이 없기 때문에 그림의 표면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다. 표면이 부스러지기 직전의 아주 약한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두번째로 산소원자 복원법은 용매를 사용하지 않는 건식법이다. 용매에 의해 캔버스 천이 부풀어오르거나 색상이 번질 염려도 없는 셈이다. 그을음과 산소원자 사이의 반응은 그림의 표면에서만 일어나게 된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몇가지의 화학식을 떠올려보자. 원작 그림의 성분은 산화금속이다. 산화금속은 이미 충분한 수의 산소 원자와 결합돼 있기 때문에 산소 원자와 더 이상의 화학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에 묻은 그을음은 탄화수소이다. 탄화수소는 말 그대로 탄소(C)와 수소(H)로 이뤄진 화합물이다. 탄소는 산소 원자와 반응해 이산화탄소(CO2) 또는 일산화탄소(CO)로 변하며, 수소는 물(H2O)로 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을음 위에 산소 원자를 쐐주면 그을음은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 그리고 수증기가 돼 ‘마법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이 간단한 화학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미술계는 더럽혀지거나 그을음이 묻은 많은 그림들을 창고 속에다 썩혀 온 셈이다.
NASA에 가장 먼저 예술품의 복원을 의뢰한 곳은 NASA 글렌 연구센터와 가까이 있는 클리블랜드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의 지하 창고에는 화재로 그을린 두점의 19세기 유화가 잠들어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확실했지만 그림에 직접 적용해본 사례가 전무한 만큼, NASA 연구진들과 클리블랜드 미술관 측은 클리블랜드 소방국의 입회 하에 대규모의 모의 실험을 실시했다. 임시로 만들어진 거실의 벽면에 싸구려 유화를 걸고 일단 불을 붙인 후 이 그림을 복원해본 것이다.
연구진들은 일부러 그을린 그림을 NASA에서 보유하고 있는 가로 1.5m, 세로 2.1m의 저압 용기에 집어넣었다. 캔버스의 앞면에 산소 원자의 폭격(?)이 계속되면서 검댕이 서서히, 이윽고 깨끗하게 사라졌다. 산소 원자는 캔버스 뒷면에 석탄(역시 탄화수소이다)으로 쓰여진 서명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직 산소 원자가 닿는 쪽의 표면에서만 청소 작용이 일어났다.
모의 실험의 결과에 자신감을 가진 NASA의 과학자들은 진짜 그림을 용기에 집어넣었다. 연구진이 손상된 그림 위에 레이저처럼 산소 원자를 쏘아주자 색상이 서서히 살아나면서 검댕으로 뭉개졌던 머리타래, 섬세한 눈썹, 꽃이 수놓아진 소매, 염주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화학 반응이 불러일으킨 기적 아닌 기적이었다. 더구나 검댕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묵은 때마저 벗겨지면서 화재 전에 볼 수 없었던 보석 장신구나 막달라 마리아의 망토처럼 세밀한 부분까지 드러났다. 반신반의하던 미술관 측이 대만족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NASA의 복원 작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욕조’에 찍힌 립스틱 제거
NASA는 이 새로운 연구 성과를 미국 미술품 보존 협회의 연례 회의에서 발표했다. 대부분의 미술관 관계자들은 ‘그럴 리가?’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산소원자 복원법을 두 번째로 실험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앤디 워홀(1930-1987)은 ‘팝 아트’(Pop Art) 장르를 개척한 미국의 화가이다. 배우 마릴린 먼로의 웃는 얼굴이 포장지 무늬처럼 반복적으로 그려진 워홀의 작품 ‘마릴린’은 현대 미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낯익다. 유럽에 비해 미술의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워홀은 미국 미술의 자존심을 세워준 위대한 화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앤디 워홀의 작품만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을 정도라면 미국에서 이 화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미술관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미술관 직원인 엘렌 박스터가 워홀의 작품인 ‘욕조’(Bathtub)의 한구석에 찍힌 붉은색의 립스틱 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사인이라도 한 듯 선명한 입술 자국이었다. 어느 관람객이 경비원의 눈을 피해 고의로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미술관 전체에 곧 비상이 걸렸다. 이 그림에 보호용 코팅이 씌워져 있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욕조’에는 아직 코팅이 씌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알코올이나 벤젠 등의 유기용매를 사용해 립스틱 자국을 녹이는 기존의 복원법으로는 그림을 완전히 복원할 수 없다. 녹은 립스틱이 다공성의 캔버스 천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해 보기 흉한 핑크빛 자국이 남을 것이 뻔했다. 앤디 워홀 미술관은 궁리 끝에 산소 원자 복원법 사례를 기억해내고 NASA에 도움을 요청했다.
NASA는 ‘욕조’의 경우도 복원을 확신했다. 립스틱의 성분 역시 화재의 검댕과 마찬가지로 탄화수소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몇번의 모의실험을 거친 후에야 립스틱 자국이 찍힌 ‘욕조’가 NASA 연구진들의 손에 넘어왔다. 캔버스 천 한올 한올에 산소 원자총을 쏘는 작업이 하루 종일 계속됐다.
미술관의 관계자들은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빨간 립스틱 자국이 사라져갔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처럼….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워홀의 ‘욕조’는 폐기 처분의 운명에서 벗어나 다시금 미술관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최근 빈에서 열린 순회 전시회 도중 누군가가 앤디 워홀이 그린 ‘라이자 미넬리’에 마커로 자국을 내는 사고가 일어났다. 또다시 산소 원자총과 NASA의 연구진이 출동했고, 영화배우 라이자 미넬리를 모델로 한 이 그림 역시 무사히 복원됐다.
몇번의 성공 사례에 자신을 얻은 NASA의 연구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양초와 횃불에 오랜 기간 그을린 고대 이집트 유적들에서 검댕을 제거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또 1958년 뉴욕 미술관의 화재로 손상된 인상파 화가 모네의 대작 ‘수련’의 복원 연구도 진행중이다. 이 그림은 완전히 불타버려 현재 몇조각의 검게 그을린 조각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수련’의 잔해를 통해 그림을 완전하게 복원하는 NASA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미술품 복원의 역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 틀림없다.
최근 NASA는 소행성 ‘에로스’에 무인 우주탐사선 슈메이커를 착륙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인류기술이 달, 화성, 금성에 이어 네번째의 천체에 발을 디딘 셈이다. 문제는 NASA의 이러한 성과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큰둥한 반응이다. 반세기를 맞은 NASA의 우주 탐사는 현재까지는 엄청난 예산에 비해 아무런 경제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NASA의 운영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NASA가 개발한 산소 원자 복원법은 우주 탐사를 위한 연구가 꼭 우주에서만 사용되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주 탐사를 위한 연구 중에도 현대 과학은 통신장비, 재료공학, 전자공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진보를 이뤄내고 있으며 개중에는 산소 원자 복원법처럼 과학과 예술의 멋진‘랑데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