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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에 나타난 슬픈 질병, 기면 발작

도로 한복판에서 찾아오는 갑작스런 잠

할리우드의 영화‘아이다호’에는 생소한 정신 질환이 등장한다. 도로 한복판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주인공 리버 피닉스. 바로 기면 발작 때문이었다. 영화 때문에 슬프지만 아름다운 질병으로 기억되는 기면 발작. 도대체 어떤 질병일까.

시도 때도 없이 잠의 나락에 빠지는 청년이 있다. 어려서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그는 돌아갈 집도, 가족도, 변변한 직업도 없이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간다. 그가 술과 마약, 매춘으로 찌든 일상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순간은 ‘기면 발작’으로 인해 깊은 잠에 빠진 상태. 그때마다 그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편히 잠드는 꿈을 꾼다.

만약 당신이 영화 ‘아이다호’를 통해 기면 발작(narcolepsy)을 처음 알게 됐다면, 당신에겐 이 정신질환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질병’으로 반추될 것이다. 절망적인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깊은 잠에 빠지는 청년. 게다가 그가 아름다운 육체와 슬픈 눈망울을 가진 리버 피닉스라면 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실제로 기면 발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황폐한 것은 바로 그 질병 때문이다. 수업시간마다 매번 졸았던 사람들은 깊은 잠에 잠깐씩 빠지는 것이 뭐 그리 큰 병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만화가 미국의 과학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실린 적이 있다. 제목은 ‘무엇이 기면 발작일까?’두장의 그림이 있다. 첫번째 그림에선 강사가 TV에서 강연을 하고, 그것을 보던 시청자가 소파에 앉아 잠을 잔다. 이 그림 밑에는 ‘이것은 기면 발작이 아니다’라고 써있다. 그러나 소파에 앉은 시청자는 TV를 쳐다보고 있는데, TV 속의 연사가 졸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기면 발작이라는 것이다.


길에서 의식을 잃는 장면^아이다호의 주인공 마이크는 길을 가다가 의식을 잃고 잠에 빠지곤 한다. 바로 기면 발작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갑작스런 잠은 기면 발작의 주요 증세다.


주위 사람들의 삶까지 파괴

절대로 자면 안되는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의 근육이 풀리고, 참을 수 없는 잠의 세계에 빠져드는 상황은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한참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심지어 길을 건너다 도로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이내 마비상태가 되고 만다.

그들은 때론 주위 사람들의 삶까지 파괴할 수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거나 산업 현장에서 중장비를 몰다가 잠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아찔한 장면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기면 발작증 환자가 운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다.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질환은 아니니 이런 환자가 얼마나 될까 싶겠지만, 생각 외로 많다. 보통 청소년기에 발생하는 기면 발작은 미국의 경우 성인 1천5백명당 한명 꼴, 일본의 경우 5백명당 한명 꼴로 발병한다. 미국에만 약 2십만명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다.

기면 발작 환자의 증세는 아이다호의 첫장면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황량한 도로 한복판에 선 리버 피닉스가 갑자기 경련과 함께 의식을 잃고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꾼다. 이처럼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잠에 빠져들어, 수 분에서 15분 가까이 골아 떨어지다가 다시 또랑또랑해져서 깨어나는 것이 기면 발작의 첫 번째 증세다. 우리가 이틀쯤 밤을 샜을 때 오후 내내 깜빡깜빡 졸음이 몰려오는 상태가 그들에겐 일상처럼 찾아온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밤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몸이 거의 마비되는 수면 마비도 기면 발작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잠이 들 때나 깰 즈음 환각을 보기도 한다. 실제로 경험한 사건과 착시가 얽혀, 꿈을 꾸듯 환상에 젖어드는 것이다.

기면 발작의 또다른 증세는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팔다리 근육이 풀리면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탈력 발작’이라고 하는데, 특히 크게 웃거나, 심한 분노 상태가 됐을 때, 또는 섹스를 하는 도중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리버 피닉스가 거리에서 만난 중년의 여인과 성 관계를 가지려 하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

깨어있는 깊은 수면 상태

‘기면 발작 환자는 기면 상태에 빠졌을 때 곧바로 REM 수면 상태가 된다’는 사실은 기면 발작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단서가 됐다.

보통 정상인의 수면 상태는 크게 REM 수면과 REM 수면이 아닌 상태로 나눌 수 있다. REM 수면이 아닌 상태에서는 근육은 이완된 채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호흡은 고르고 대뇌는 높은 전위의 뇌파를 만들어 낸다. 잠이 깊어질수록 뇌파의 주파수는 낮아지고, 뇌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한다.

반면 REM 수면 상태가 되면 호흡과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지고, 뇌파는 빠르고 불규칙한 파형을 만든다.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는 특징이 있어 REM(rapid eye movement) 수면이라고 불리는데, 의식은 없지만 마치 깨어있을 때와 비슷한 신체적 특징을 보인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도 바로 이때인데, 간혹 몸을 뒤척이긴 하지만 근육의 긴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 잠이 들면 약 90분 정도 후부터 규칙적으로 REM 수면 상태가 찾아오는데 반해, 기면 발작 환자들은 기면 발작 상태가 되자마자 REM 수면 상태가 된다. 영화에서 기면 발작을 일으키는 리버 피닉스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의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도 REM 수면을 열심히 연기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기면 발작 환자가 곧바로 REM 수면에 빠지기 때문에 마치 우리들의 REM 수면 상태처럼 ‘꿈’을 꾸듯 환상을 본다거나 근육이 완전히 풀리는 경험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기면 발작이란 깨어있으면서도 REM 수면 상태에 빠져드는 질병이라는 말이다.

1970년대 초, 미국 스탠퍼드 의대 인간수면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면 발작에 관한 연구는 ‘개도 기면 발작에 걸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73년, 몇마리의 도베르만 개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윌리엄 디멘트 박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기면 발작 증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개들과 열심히 뛰어 놀다가도 탈력 발작을 일으켜 맥없이 쓰러지기 일쑤였고,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도 근육이 마비되는 증세를 보였다. 디멘트 박사는 부모 개가 모두 기면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경우, 그들의 새끼들도 같은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후 기면 발작을 앓고 있는 도베르만 종족이 스탠퍼드대 인간수면연구소에서 보존되며 20년 동안 연구대상이됐다.

전원 스위치 역할을 하는 연수

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증세는 ‘탈력 발작’이다. 갑자기 졸음이 온다거나 환상을 보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간혹 일어날 수 있지만, 탈력 발작은 기면 발작 환자에게만 일어나는 특이한 증세이기 때문이다. 개가 탈력 발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탈력 발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 행해졌다.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LA소재의 캘리포니아대(UCLA) 정신과 제롬 시걸 교수는 개가 탈력 발작을 일으키도록 여러 가지 자극을 줬다. 결국 그는 뇌간(brain stem)에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에서 탈력 발작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이 실험은 1940년대 미국 노스웨스턴대 호리스 매군 교수가 했던 실험에서 힌트를 얻었다. 매군 교수는 뇌간의 한부분인 연수(medial medulla)에 전기 자극을 주면 갑자기 근육이 풀어지면서 사람이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마치 마구 움직이던 로봇의 전원 스위치를 끈 것처럼 말이다. 연수가 근육의 운동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 연구는 1953년 REM 수면이 발견되기 전에 이뤄졌기 때문에 매군 교수는 REM 수면을 직접 연결하진 못했다. 그 후 연수가 REM 수면시 근육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약 연수가 없었다면 도망가는 꿈을 꾸게 되면 REM 수면 내내 침대 위에서 마구 뛰어다니게 되고, 누군가를 때리는 꿈이라도 꾼다면 옆 사람의 신변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평소 움직일 때는 연수가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연수는 조금씩 활동하기 시작한다. REM 수면에 도달하면 연수는 가장 활발히 활동한다.

1991년 시걸 교수는 기면 발작을 앓고 있는 개가 탈력 발작을 일으킬 때 연수의 신경세포들이 마구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깨어있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기면 발작 환자는 REM 수면 상태에서만 활동해야 하는 연수가 깨어있을 때도 활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다.

가슴 아픈 영화적 장치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기면 발작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에게 남겨진 가장 어려운 숙제인데, 지난 몇년 사이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가장 중요한 유전적인 요인들이 그 실마리를 제공했다. 1877년 베스트팔에 의해 기면 발작과 탈력 발작이 직계 가족들에게 발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이래, 현재는 기면 발작을 ‘가족병’으로 생각하고 있다. 크라베와 매그누슨 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기면 발작 환자의 친척들은 뚱뚱하고 카드를 하면서 졸거나 테이블에서 고개를 떨구기도 하며, 도중에 심하게 코를 곤다고 한다. 기면 발작 환자의 가까운 친족이 기민 발작에 걸릴 위험도는 1-2%라는 조사가 있는데, 일반인에 비해 10-40배나 높은 수치다.

1983년에는 유달리 기면 발작 발병률이 높은 일본에서 획기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인간 백혈구 항원인 HLA(human leukocyte antigen) DR2 유전자와 기면 발작이 큰 상관관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기면 발작 환자의 90% 이상이 HLA DR2와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 다시 말해 유전적인 이상이 기면 발작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하이포크레틴’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돌연변이가 기면 발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기면 발작의 유전 연구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이포크레틴이란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신경물질이다. 이 물질에 관여하는 수용체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킬 경우, 기면 발작에 걸린다는 결과가 개를 이용한 실험에서 나왔다. 앞으로 이 물질이 수면각성조절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낸다면 기면 발작의 원인규명과 치료에 커다란 진전이 예상된다.

영화 아이다호는 기면 발작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가 발작을 일으키며 잠에 빠져드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는 왜 기면 발작에 걸린 것일까?

이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종종 어머니를 연상하는 이미지를 만나게 되면 발작을 일으킨다. 길을 걷다가 어머니를 닮은 여인을 보면 이내 현기증을 느낀다. 또 영화는 그가 과도한 스트레스와 절망적인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어김없이 잠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기면 발작이 제공하는 꿈(환각)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함께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연어가 본능을 나침반 삼아 강물을 거슬러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향하듯, 어머니를 찾아 아이다호로 행한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떼의 이미지가 종종 등장하는 것도, 그의 성이 워터스(Waters, 수원지)인 것도 혹시 이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아이다호에도, 로마에도, 꿈이 아닌 현실 어디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기면 발작의 순간이 그나마 행복의 시간이었을 만큼, 가족애에 목말라했던 리버 피닉스에게 현실은 혹독한 ‘청춘의 통과제의’ 였다. 결국 기면 발작은 그의 삶이 슬프도록 절망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아주 가슴 아픈 ‘영화적 장치’였던 것이다.

작품해설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1991)


|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1991) | 미국 독립 영화의 기수였던 구스 반 산트가 감독하고, 리버 피닉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았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아 아이다호로 떠나는 두 청년의 방황을 그린 로드 무비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한 리버 피닉스의 슬프도록 절망적인 연기가 압권이다.

어머니가 정부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버려진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고향 아이다호를 떠나 포틀랜드 뒷거리에서 몸을 팔며 거리의 부랑아로 지낸다. 때때로 기면 발작을 보이는 그를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 스코트(키에누 리브스)는 포틀랜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가출한 후 마이크와 함께 지낸다. 마이크는 어려서 그를 버리고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스코트와 함께 아이다호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복형과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행적을 쫓아 로마까지 가지만, 어머니는 오래 전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한편 스코트는 그곳에서 카멜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인생의 구원을 얻는다. 혼자 포틀랜드로 돌아온 마이크는 여전히 거리를 떠돌고, 반면 스코트는 집으로 돌아와 카멜라와 결혼하고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다. 공교롭게도 스코트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한쪽에서는 부랑자들의 대부 밥의 초라한 장례식이 치러진다. 위선과 거짓된 사랑으로 가득 찬 스코트 아버지의 장례식과 난장판이지만 진실한 애도의 정이 드러나는 밥의 장례식. 판이하게 대비되는 장례식 장면은 삶의 끝인 죽음까지도 거짓으로 치장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청년이 앞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영화는 현재 '마이크와 동성애 장면'이 상당부분 삭제된 채 비디오(미성년자 관람불가)로 출시돼 있다. 이 영화에서 '동성애'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여성의 상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제목인 아이다호는 마이크의 고향이자 '어머니가 계신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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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사이언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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