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인류는 지구 모양이 ‘둥근 구(球)’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험난한 육로를 피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항로는 해안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길 잃을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범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목적지로 향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 위에 위도(latitude)와 경도(longitude)를 그린 지도다. 위도는 적도에서 남북으로 잰 각거리로 북반구에서 북극성의 고도가 곧 관측 지점의 위도와 같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상의 동서 위치를 정하는 경도를 구하는 것은 당대에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1 시간 차이는 경도 15°
동서 방향의 위치를 결정하는 경도는 기준점이 되는 본초자오선으로부터 떨어진 거리각인데 동시에 두 장소에서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면 알 수 있다. 즉 두 지점의 시간차가 1시간이면 경도는 15° 차이가 나는 셈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태양이 가장 높이 솟았을 때 현지 시각을 낮 12시로 잡고 출발한 항구의 시각과 비교해 1시간 차이가 난다면 그 배는 경도 15°만큼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적도로부터 남쪽이나 북쪽으로 갈수록 경도 15°에 해당하는 거리는 일정하지 않다.
경도 1°는 세계 어디에서든 4분이라는 시간 차이를 나타내지만 거리로 환산하면 적도에서는 109.4km이고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0km가 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지점의 시각을 동시에 알면 정확한 경도를 구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두 개의 시계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진자시계를 사용하던 당시로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1567년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를 비롯해 유럽 각국은 경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커다란 상금을 걸었다. 1616년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이 문제에 도전했다. 그는 막대한 종신 연금을 약속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게 해결책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갈릴레이가 제안한 방법은 목성의 뒤쪽으로 위성들이 가려지는 위성식을 이용해 두 장소 사이의 경도차를 구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위성들이 관측자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위성식은 지구상의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할 수 있다. 만약 한 지점에 있는 관찰자가 다른 지점에서 발생할 위성식의 시간과 위치를 기록한 위치표를 갖고 있다면 자신이 관찰한 위성식의 시각과 비교해 경도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1610년부터 1612년까지 목성의 위성식을 같은 위치에서 연간 1000회 넘게 기록했다. 이 위치표를 이용하면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위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으로부터 가택 연금을 당한 상태였다. 결국 상금위원회 위원들은 갈릴레이를 만나 경도의 정확성을 검증할 수 없었고 상금도 전달하지 못했다.
목성 위성 관측으로 한계에 부딪힌 프랑스
166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장 바티스트 콜베르의 제안대로 왕립과학원을 설립했으며 이듬해는 파리 천문대 건설을 승인했다. 그리고 중세부터 남북으로 황동선을 깔아 태양광선의 변화로 지구움직임을 파악하던 생 쉴피스 성당의 본초자오선을 인근의 파리 천문대로 옮겨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관측을 지시했다.
반면 1668년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던 천문학자 지오반니 도메니코 카시니는 16년 동안 모은 목성 위성의 운행표를 출판했다. 그는 목성 위성의 운동을 이용하면 절대시간을 결정할 수 있고 경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닌 타원형으로 관측지점에 따라 목성을 도는 위성들의 위치가 달라지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전제가 필요했던 셈이다.
1669년 장 피카르는 지구의 모양과 크기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가 계산한 지구의 지름은 1만2554km로 현재 지구의 지름인 1만2756km에 매우 근사한 값이다. 카시니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고 절대시간을 구하는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카시니의 꼼꼼한 기록은 육지에서는 매우 정확했지만 바다에서는 오차가 컸다. 해상의 흔들리는 배에서 이뤄진 천체 관측 결과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존 플램스티드는 달의 운행을 이용하면 경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달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절대시간과 관측지점의 지방시 차이로 경도를 구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시계 제작으로 승부한 영국
그는 왕에게 프랑스가 경도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보고하고 영국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1675년 그리니치에 왕립천문대가 들어서고 그는 초대 천문대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달이나 태양, 별이 가장 높이 뜨는 남중 시간을 이용해 시간 측정의 정확도를 높여갔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정확하던 시간 측정이 정작 바다에서는 실패를 거듭했다. 항구에서 출발한 배가 되돌아올 때까지 정확한 시간 계산을 하고 있는지 검증할 기술이 당시로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1707년 이탈리아 시실리섬 근처에서 영국 해군의 배 4척이 안개 속에서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2000명 이상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뒤 경도 문제에 관한 대책을 촉구하는 상인과 뱃사람의 탄원서가 웨스터민스터 궁전에 빗발쳤다.
의회는 서둘러 아이작 뉴턴과 에드먼드 핼리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뉴턴은 경도 문제에 대한 해법들은 이론상 모두 옳지만 현실적인 적용이 어렵다고 얘기했다. 대신 오차가 적은 시계를 만드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도 측정에 기여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경도법(Longitude Act)이 통과되던 1715년 시골의 가난한 목수였던 존 해리슨과 동생 제임스 해리슨은 탈진기를 개발해 오차가 적은 시계를 만들었다. 탈진기는 동력을 전달하고 시간을 표시하는 톱니바퀴와 시계의 작동 속도를 조절하는 진동기를 연결해 주는 부품이다. 이 탈진기는 교회 종치기였던 형제의 삶을 시계공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1730년 존 해리슨은 런던의 경도심사국을 찾아가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를 만나면서 간편하고 정밀한 시계의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이윽고 1735년 그는 해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시계인 ‘해리슨 1호’(H1)를 제작했다.
‘H1’은 포츠머스항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영국 군함 센추리언 호에 실려 정확성을 검증받았다. 갈 때는 일주일 걸리던 항해가 돌아올 때는 돌풍을 만나 4주가 걸렸지만 마침내 육지에 다다랐다. 선장 로저 윌스는 그곳이 영국 남해안의 스타트 곶(Start Point)이라고 생각했지만 해리슨은 H1을 근거로 스타트 곶에서 100km가량 떨어진 리저드 곶(Lizard Point)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육지에 상륙하자 그곳은 리저드 곶이었다. 그의 해상시계가 합격점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리슨은 시간의 오차와 시계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 2년 뒤인 1739년 H2를 개발하고 그 뒤 H3, H4까지 개발했다.
H4는 지름이 12cm 정도로 대단히 작고 정교해 경도위원회는 이 공로를 인정해 해리슨에게 3000파운드의 상금을 수여했다. 이 시계는 영국에서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자메이카까지 여행하는 동안 5초의 오차만 보였다.
논쟁의 종지부 찍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경도를 측정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경도는 국가간 문제로 확대돼 논란을 일으켰다. 16세기 후반 지리탐사가 시작된 유럽에서는 항해용 지도가 많이 제작됐다. 그런데 각기 자기 나라를 기준으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경도가 달랐다. 이 때문에 통일된 자오선 기준이 필요했다.
1870년대에 들어 어느 곳을 세계 경도의 기준으로 삼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1871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그리고 187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세계의 표준자오선인 본초자오선을 정하기 위한 국제지리학회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마침내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경도대회에 참석한 25개국 중 22개국의 찬성으로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천문 관측으로 지도상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던 프랑스의 노력은 흔들리는 배에서 물거품이 됐지만 영국의 해리슨이 만든 시계는 육지든 바다든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영국은 그리니치 천문대가 오래전부터 자오선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했다고 각국의 대표들을 설득했다. 당시 ‘해가 지지 않던 나라’였던 영국의 막강한 힘도 본초자오선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