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는 플랑크가 양자가설을 주창한 다음해인 1901년 12월 5일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김나지움의 교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고전어 담당 김나지움 교사를 거쳐 뮌헨대학 교수를 지냈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23세라는 약관의 나이로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의 건설에 발을 내딛은지 불과 2년만에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세상에 내놓은 천재 과학자였다. 1927년 26세에 라이프니츠 대학의 교수가 됐고, 1932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41년 베를린 대학의 교수, 1946년 게친겐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 1958년 뮌헨의 막스-플랑크 물리학 천체물리학연구소 소장을 거쳐 1970년에 은퇴했다. 그리고 6년 후 1976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하이젠베르크 주위에는 항상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그는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물리학적·철학적·종교적 사고를 발전시키고 넓혀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플랑크, 보어, 아인슈타인, 파울리, 한, 페르미, 파울리, 쉬뢰딩거, 디락 등)과의 대화를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나치의 지배하에서 우라늄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었으면서도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꿈꾸던 하이젠베르크는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목격했다. 종전 이후 독일 과학계의 재건에 몰두하던 그는 핵폭탄의 개발을 추진하던 당시 아데나워 수상에 반대해, 1957년 18명의 독일인 핵물리학자들과 함께 핵무장을 반대하는 ‘괴팅겐 선언’을 주도하는 평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부분과 전체’는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1969년 양자역학(이 책에서는 원자물리학으로 지칭한다)의 발전과정에 대해 자전적 스타일로 집필한 책이다. 원제는 ‘Der Teil und das Ganze, Gespr che in Umkreis der Atomphysik’이며, 1982년 김용준 교수(현 고려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번역·출판된지 벌써 2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교양과학 분야의 10위권에 포함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번역자 김용준 교수는 유신과 전두환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두차례나 해직된 바 있는 과학자 겸 과학사상가이며, 이 책은 그의 두번째 해직기간 중 집중적으로 번역됐다.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활동했던 1920-1960년대에 걸친 50년 간의 원자물리학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총 20개의 짧은 장으로 이뤄졌으며, 각 장은 저자의 대학시절부터 물리학자로서 삶의 궤적에 대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서술한다. 각 장의 내용은 시기별로 저자가 과학적·사상적 교류를 경험했던 인물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윤리
만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특히 뮌헨의 좀머펠트로부터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괴팅겐의 보른으로부터 수학을, 그리고 코펜하겐의 보어로부터 철학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보어다. 이는 그가 보어로부터 가장 많은 지적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 깊은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의 자택을 자주 방문하거나 도보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원자물리학의 미해결 문제, 철학과 인식론, 정치와 과학자 윤리 등에 걸친 폭넓은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1924년 어느날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 함께 스웨덴의 해변에 있는 16세기의 성에 들렀다. 그 성은 세익스피어 소설의 주인공인 햄릿이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보어는 “바로 이 성에 햄릿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 성이 달리 보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성은 완전히 다른 성이 됩니다. 갑자기 이 성의 담과 돌벽이 우리에게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걸어옵니다” 라고 말한다.
한편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1926년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 대학의 토론회 후 아인슈타인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관찰할 수 있는 양만 갖고 이론을 세우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라고 그에게 충고한다. 관찰과 이해에 대한 이런 논의는 1950년대 핸슨이 제기했던 관찰의 이론 의존성 문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쿤과 라카토스 이후의 현대 과학철학과 구성주의적 인식론의 기초가 된다.
보어는 자그마한 왕국 덴마크 출신으로 그가 바라보는 물리학과 세계의 모습은 독특한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러한 그의 시각을 신뢰했다. “우리 덴마크에는 산이라곤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산의 높이가 1백60m며, 우리에게 매우 높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산을 ‘하늘의 산’이라 부릅니다.”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는 객관적 기준과 엄밀한 검증만이 강조됐던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었다. 관찰자와 관찰의 맥락,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보어(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당시 양자역학의 현상들을 탈뉴턴적 입장에서 조망해야 했던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에게 중요한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또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는 어떤 화가가 붓과 물감을 사용하듯이 고전역학이나 양자이론을 이용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붓과 물감은 그림이 아니며, 그림 물감이 결코 실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와 같이 심안(心眼)에 미리 어떤 추상을 갖고 있다면 붓과 물감을 통해 불완전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을 그리게 된다”며 보어의 탈실증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대화
한편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자연의 비결정론적 본질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즐겨 쓰던 표현이었으며, 보어는 이런 아인슈타인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될 수 없다”라고 응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번역자 김용준 교수가 책의 후기에서 밝히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같은 동맹국 출신으로서 미국으로 탈출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페르미와 독일에 남기로 결심한 하이젠베르크 사이의 대화였다. 결코 승산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전쟁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나치 정권 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페르미는 극구 만류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어릴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성장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조국 독일을 향해 돌아갔다.물론 핵무기의 개발이 가져올 엄청난 파괴력을 미리 예상했던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양심적인 동료 과학자들이 나치에게 핵무기를 안겨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그 때문에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해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는지는 아직도 과학사학자들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