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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교수 사장 탄생.' '국내 바이오벤처 최초로 외국 자본 유치에 성공.'서울대학교의 작은 실험실에서 둥지를 튼 생명공학 벤처사 바이로메드가 창립된지 4년도 안돼 숱한 화제와 굵직한 업적을 쏟아내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모식도.현재 바이러스는 유전자 치료에서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의 바이러스학연구실.안에 들어서면 하얀 가운을 입은 10여명의 연구원들이 실험에 열중하고 있다.실험실을 가득 채운 각종 시약과 검사장비,그리고 그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연구원들.겉으로 봐서는 일반 자연대학 실험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연구원들의 소속을 알고나면 평범한 실험실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이들은 단순히 서울대학교의 대학원생이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바이오벤처사의 하나인 '바이로메드' 직원이기도 하다.

바이로메드는 영어로 바이러스를 뜻하는 'virus'와 의학을 의미하는 'medicine'을 결합ㅂ해 만든 용어다.그런데 바이러스는 각종 난치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다.그렇다면 이 회사의 주요 목표는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오히려 바이러스를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하는 상품을 개발하는 곳이다.바이러스는 '유전자치료'(gene therapy)라고 불리는 첨단 의학기술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유전자 이상으로 병이 발생했을 경우 질병 부위에 정상 유전자를 투입해 질환을 호전시키는 것이 유전자치료다.이때 바이러스는 정상 유전자를 품고 질병 부위로 이동하는 운반책 역할을 한다.

물론 바이러스의 독성을 제거하고 안전하게 정상 유전자를 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하지만 아직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섰다는 미국조차 변변한 제품을 개발하지 못했다.바이로메드는 미국에 맞서 보다 안전하고 효과가 높은 바이러스 운반체 개발을 실현하고 있는 벤처사다.

서울대 교수가 일으킨 작은 반란

바이로메드의 대표는 유전공학연구소의 김선영 교수(44)다.서울대학교 교수와 벤처기엄 사장.잘 연결이 되지 않는 명함이다.

전통적으로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의 자연과학 분야는 순수와 기초를 미덕으로 여겨왔다.당장은 돈이 되지 않거나 실용화되지 못해도 그 저변을 이루는 기초과학을 탄탄히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에 비해 벤처기엄의 주된 관심은 철저하게 실용성과 상업성이다.기초과학보다 상품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응용과학의 성과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 전제조건이다.

김선영교수는 이 어울리지 않는 두가지 풍토를 성공적으로 조화시켜 1996년 11월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내에서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물론 반대 압력이 적지 않았다.

국내에서 정보통신 분야를 중심으로 벤처 붐이 일기 시작한 시기는 1997년 봄이다.그 이전에 그것도 생명공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벤처회사를 차리겠다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튀어도 너무 튄다'는 반응을 일으켰다.무엇보다 '보수성'이 강한 국립대학 내에서 상업성을 표방한 회사를 차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특이했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자연과학계에서 비즈니스 마인드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그래서 마치 지하운동가처럼 은밀하게 창업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김교수의 회고담이다.

창업 당시의 임직원수는 불과7명.'연구직원'은 대학원생 4명뿐이었고,특허를 맡아준 변호사와 (주)녹십자가 함께 참여 했다.자본규모는 총 2억원.

이런 작은 규모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 여러 압력을 무릅쓰고 굳이 '지하운동가'처럼 활동한 이유는 무엇일까.그가 눈길을 돌린 곳은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 세계시장이었고,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1992년 10여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서울대학교에 온 김교수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에이스바이러스(HIV)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당시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인의 경우 서구인에 비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비교적 강한 이유를 밝히는데 있었다(실제로 그는 1997년부터 한국인 환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형질의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했다는 연구결과를 계속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환자로부터 혈액샘플을 구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웠다.실험 기술은 있지만 재료가 갖춰지지 못하자 제대로 된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당연히 세계에서 생명공학 분야가 가장 앞선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바쁜 연구 일정 속에서 1년여 동안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해 소재 탐색에 나섰다.

이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분야가 유전자치료였다.당시 이 분야에서 가장 큰 난관의 하나는 유전자 운반책으로 사용된던 바이러스(레트로바이러스)의 독성을 줄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김교수가 주로 다루던 에이즈 바이러스는 레트로바이러스 가운데 가장 기능이 복잡하다고 알려진 종류였다. '고수'의 입장에서 유전자 운반책 정도의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레트로바이러스는 각종 난치병 환자를 상대로 한 전세계 임상시험의 50%에서 사용되고 있다.이 가운데 70%는 암환자,그리고 13%는 에이즈환자다.만일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된 레트로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면 난치병 극복의 길이 성큼 앞당겨질 것이다.그만큼 상품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생명공학회사들이 운반책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하지만 현재까지 임상시험을 완전히 거쳐 제품으로 탄생한 경우는 하나도 없다.

1994년 김교수의 연구제안서가 과학기술처(현재 과학기술부)가 주관하는 G7프로젝트에 채택돼 본격적인 유전자 운반책 연구가 시작됐다.물론"미국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한국에서 개발하느냐"며 난색을 표하는 관계자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 바이러스학연구실의 연구원들.겉보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명함이 색다르다.김선영 교수(앞줄 가운데)는 벤처기업 사장,그리고 연구원들은 세계시장을 향해 뛰고 있는 '잘나가는'직원들이다.


외국회사가 적극 투자

2년 동안 불철주야로 실험이 진행됐고,기대대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그리고 1996년 김교수가 벤처창업을 결심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됐다.그가 미국의 한 유전자 치료학회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자 세계의 여러 제약회사가 예상보다 큰 관심을 보인것이다.이때 그의 가슴에 남겨진 말이 있다. "한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보다 한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더 좋다."난치병 치료를 위한 수많은 기초연구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제품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실용적인 연구가 훨씬 의미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같은해 9월 영국 굴지의 생명공학회사 바이오메디카가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해왔다.3년간 1백60만달러를 지원할테니 개발된 바이러스 운반책에 대한 사용권을 달라는 '후한'조건이었다.물론 대답은 'OK'였다.

상품성 있는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김교수에세 대학교 연구실은 다소 답답한 공간으로 느껴졌다.무엇보다 연구원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문제였다.'학위만 마치면 그만'이라는 기존의 실험실 분위기로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란 무리였다.'함께 죽고 함께 살자'는 벤처 정신으로 무장되지 않는다면 평범한 연구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유전공학연구소는 그를 밀어주는 분위기였다.강의부담이 거의 없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인데다 9명의 교수 모두 미국의 벤처열풍을 눈으론 본 젊은층이었기 때문에,김교수의 열정과 추진력에 쉽게 손을 들어줬다.서울대학교 전체의 입장에서는 분명 '이단'이었지만,유전공학연구소는 훌륭한 벱ㄴ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준 셈이다.

연구원의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몇명에 불과해도 좋은 아이디어와 실력만 있으면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도 석·박사급 연구원 10여명이 연구인원의 전부다).

창업 이후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1997년과 98년IMF한파로 국내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바이로메드는 오히려 신장세를 나타냈다.외국의 지원금으로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한계가 있었다.당시의 행정법상 국립대학 교수가 민간회사의 대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김교수는 그저 형식적인 고문 정도로만 이름을 올려야 했다.그래서 김교수 자신이 직접 나서 외국 자본을 유치할 수 없었다.

1998년 12월 또다른 전기가 마련됐다.국립대학 교수의 벤처기업 사장 겸임을 허용하도록 규정한 '벤처기업 창어 및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효된 것이다.1999년 6월1일 김교수는 대학에 겸직신청서를 제출한 후 허가를 받아 사장으로 취임했다.그는 곧 비즈니스맨으로서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 첫작품은 1999년 9월 영국 바이오메디카와 바이로메드가50:50공동 투자로 국제합작벤처회사인 바이로테크를 설립한 일이다.바이오메디카는 총자산 규모 5천만불(약 6백억원)에,유전자치료 연구개발만 연간 70억원을 투자하는 유럽굴지의 바이오벤처회사다.특히 바이오메디카가 가진 약 3백억원 상당의 특허기술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점이 큰 성과였다.

올해 3월에는 일본 교토에 있는 다카라 슈조사가 바이로메드에 연구개발 자금으로 6백만달러(66억3천여만원)를 투자한다는 계약이 이뤄졌다.바이로메드가 발생한 3억9천만원상당의 주식을 액면가의 17배로 판 것이다.이 계약으로 바이로메드에 대한 다카라 슈조의 지분이 50%사 됐지만 대표이사는 김교수가 맡았기 때문에 경영권은 계속 유지될 전망이다.

다카라 슈조는 지난 20여년간 일본 생명공학 시장의 60%를 차지해 왔으며,최근 유전자치료 기반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회사다.물론 다카라 슈조가 보유한 특허기술 이용권을 확보한 상태다.원래 다카라 슈조는 정상 유전자를 품은 바이러스가 보다 많은 세포에 전달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면 바이로메드와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해 '안전성'과 '효율성'을 두루 갖춘 신제품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현재 김교수는 "유전자 치료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평가한다.올해에는 바이로메드가 개발한 '후보 약제'가 본격적인 임상시험에 들어선다.물론 성과가 좋으면 2-3년내에 완성된 제품으로 생산될 예정이다.

이제 국내에서 생명공학벤처라는 말은 더이상 낯설지 않다.중소기업청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벤처넷(http://venture.smba.go.kr)에 등록된 생명공학 벤처기업만 80여개사다.관계 전문가들은 올해에는 그 수가 두배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정부 역시 바이오벤처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과학기술부는 대전 생명공학연구소 내에 벤처창업지원센터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바이오벤처 지원에 나섰다.또 산업자원부는 2010년까지 한국을 세계 6위권의 바이오 선진국으로 도약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묻지마 투자'주의해야
 

바이로메드 연구진은 결코 코스닥시장에 진입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일반인이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낼 때까지 연구에 전념하겠다는 신중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바이오벤처의 존재를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은 마크로젠이다.1997년 6월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쥐 생산과 DNA칩 개발을 표명하며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가 세운 회사다.올해 2월22일 대학내 벤처로서는 처음으로 주식장외시장(코스닥시장)에 등록한 후 주가가 정보통신분야 벤처 못지 않은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일례로 이 회사 주가는 3월23일 현재 10만원을 넘었다.코스닥시장에 등록한 날 1만50원에 첫 거래된 뒤 한달 사이에 무려 10여배로 뛴 셈이다.국내에서 바이오 벤처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바이오벤처산업 수준은 전반적으로 자본이나 기술면에서 초기 단계다.80여개에 달하는 회사 가운데 세계 시장에 내놓을 정도로 저력을 확보한 곳은 아직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평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의 주식시장은 현재 바이오칩(생명공학 주식)열풍으로 달아오르고 있다.올해 들어 제약,화학,의료기기 등 생명공학 관련주들은 상승세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현재의 바이오칩의 인기 추세에 대해 우리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김선영 교수 역시 이런 신중파의 한사람이다.

그는 최근의 생명공학 투자 현황을 한마니도 '묻지마 투자'라고 정의한다.언론과 방송에서 선진국과 한국의 바이오칩 성장 가능성을 지나치게 보도한 나머지 일반인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떼돈을 벌 헛된 꿈을 꾼다는 의미다.이런 광행은 지난 2년여에 걸쳐 정보통신 분야의 벤처사들에 투자해 단숨에 수억원에서 수백억원을 벌었다는 사례들이 등장하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바이오벤처와 디지털벤처는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투자가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투자한 돈이 더 큰돈으로 불어날 때까지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물론 회사 사업이 성공했을 경우에 한한다).따라서 무엇보다 바이오벤처의 연구 성과가 언제 가시화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하지만 최근 일반인들은 마치 정보통신 벤처사의 경우처럼 1-2년 내에 커다란 경제적 이득을 취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더욱이 회사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단지 설립자의 명성이나 소문에 의지해 투자하는 일이 흔하다.

​바이로메드는 앞으로 2년후 정도에나 코스닥시장에 등록할 예정이다.자사에서 개발한 제품의 임상시험이 마쳐지는 시기다.물론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왔을 때 한해서의 얘기다.그의 희망은 "일반인이 볼 때에도 눈에 잡히는 성과가 있는 바이오벤처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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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지재만 기자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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