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19세기 유럽의 도시들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환경이 더욱 불결해져 갔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영양상태는 매우 불량했다. 이런 조건은 결핵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이 여러 부패물질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독기’ 같은 것에 노출되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대해 루이 파스퇴르나 로버트 코흐같은 과학자는 탄저병균이나 결핵균을 발견함으로써, 전염병은 독기가 아니라 병원균에 의해 발생되는 것임을 증명했다. 이런 ‘세균감염설’은 급속도로 학계의 지지를 얻고 확고하게 위치를 굳혀나갔다.

하지만 어디에나 시대의 흐름에 맞서서 과거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때도 이런 ‘반대자’로 뮌헨대학의 의화학 교수이자 사회위생학 분야를 이끌던 막스 폰 페텐코퍼가 있었다. 페텐코퍼는 세균감염설을 믿지 못하고 감염설의 허구를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892년 함부르크에서 콜레라가 크게 유행할 때 공개 행사를 열고 세균감염설에 대해 비판하다가 비커에 가득 담긴 콜레라균을 마시는 ‘임상실험’을 강행했다. 모인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으나 천만 다행으로 페텐코퍼는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고 무사했다.

콜레라균을 마셨음에도 무사했으니 이는 세균감염설에 대한 강력한 반대 증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텐코퍼의 한 제자가 똑같은 실험을 하다가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후대에 사람들은 페텐코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화를 내며 흥분한 상태에서 위액이 많이 분비되는 바람에 콜레라균이 다 죽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페텐코퍼는 1901년 83세의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치열하게 세균감염설을 반대했다.

그렇다고 페텐코퍼의 주장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페텐코퍼가 ‘몸소 보여주었듯이’ 전염병은 병원균만 있다고 걸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균이 발생하는 환경과 확산경로, 감염되는 환자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진로 추천

    • 의학
    • 환경학·환경공학
    • 역사·고고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