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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의 대가로 생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대통령은 존슨대통령으로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설립을 선물로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1917-1979) 소장은 그해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를 재건한다”는 혁명공약을 하루빨리 지켜 국민들로부터 쿠데타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한일회담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두가지 카드가 있었다.

해방후 수없이 결렬됐던 한일회담은 1961년 10월에 재개됐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황에서 자본도입이 시급했던 한국은 저자세로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마사요시 회담에 따라 굴욕적으로 마무리됐다. 35년 동안 식민통치에 대한 청구권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란 명목으로 3억달러를 10년에 걸쳐 받고, 경제협력이란 명목으로 2억달러의 정부차관을, 그리고 1억달러를 무역차관으로 들여오는 조건이었다. 이때 독도의 소유문제도 국제사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하지만 박정희 의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쨌든 이 결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탄생했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난 것은 박정희 의장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군사정부에 대한 존재 기반을 다져주었고, 경제개발에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은 군사쿠데타를 인정받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가 지닌 협상카드가 베트남전쟁 참전이었다.

베트남전쟁은 1960년 친미정권인 고 딘 디엠의 남베트남과, 이에 반대하는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베트콩)이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연합해 벌인 전쟁이다. 당시 민주국가의 대부 노릇을 자임하던 미국으로서는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눈엣가시였는데, 박정희 의장이 그 심중을 헤아렸던 것이다.

1964년 8월 미국은 해군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는 통킹만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킴으로써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했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요청이란 형식으로 한국군을 파견했다. 한국은 1964년 9월 참전한 이후 1973년 휴전을 맺을 때까지 연인원 31만2천8백53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사망자는 4천9백60명, 부상자는 1만9백62명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베트남 특수로 경제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만났다. 한국이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데에 대한 보답의 자리였다. 여기서 존슨 대통령은 국군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안을 제시했다.

웬 연구소인가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과학기술연구소는 박 대통령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꿈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될 무렵 경제개발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했고 그래서 농업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농업진흥책이 경제발전에 아무런 효과가 없자 박 대통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용하자”는 생각과 공업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1964년 어느날 대통령은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최형섭박사를 조용히 불렀다. “최박사,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때 최박사는 기업과 학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기업이 필요한 생산기술을 연구하는 곳은 한곳도 없을 때였다. 이 말을 귀담아 들었는지 대통령은 이듬해 5월 존슨 대통령을 만났을 때 공과대학을 지어주겠다는 제의를 과학기술연구소를 짓는 쪽으로 돌렸다. 이런 연유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1966년 2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을 설립자로 세워졌다. 초대 소장으로는 최형섭씨가 임명됐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 위에 설립됐다. 연구원의 월급은 국립서울대 교수의 3배에 이르렀고, 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국내에 있지도 않은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주었다. 또 연구소의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해 회계감사와 사업계획 승인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도 육성법안에 못박았다. 물론 반발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

연구소 부지 설립도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좌우했다. 원래 서울 망우리 동구능 근처에 마련하려고 했으나, 대통령이 서울시장과 농림부장관을 불러 홍릉 근처의 임업시험장 38만평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결국 임업시험장과 타협해 15만평을 얻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다. 이후 박 대통령은 자주 연구소에 들러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금일봉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소가 기업으로부터 연구과제를 받아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그런데 과학기술연구소에도 시련이 다가왔다. 박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198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만든 것이다. 이 와중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원설립자인 박정희의 이름도 지워졌다. 대신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이 새로운 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자로 새겨졌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다시 분리된 것은 1989년 노태우정권 때였다. 이때의 정관을 보면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승계한다고 명시돼 있다. 8년 동안 외유하고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이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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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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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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