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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노벨생리, 의학상 플레밍, 폴로리, 체인

기적의 특효약 페니실린

20세기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구한 '마법의 탄환' 페니실린. 이 기적의 약은 우연한 발견을 예리한 안목으로 놓치지 않은 플레밍, 그리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페니실린을 정제하는데 성공한 플로리와 체인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임상에서 쓰이고 있는 치료약은 족히 몇만가지를 헤아릴 것이다. 또 한때 쓰였던 약을 포함하면 그 몇배가 될 터이다. 이 약들은 대부분 20세기에 개발, 제조된 것이다. 20세기는 실로 ‘제약업의 시대’라고 할 만큼 수많은 약이 개발돼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고, 그 희망이 더 큰 실망으로 바뀐 역사가 되풀이된 시대였다.

20세기인이 만들어낸 약 가운데 으뜸은 단연 페니실린이다. 현대의학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마법의 탄환’(magic bullet), 즉 ‘특효약’의 범주에 진정으로 걸맞은 최초의 약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염병을 치료함으로써 20세기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구하고 이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 약이 바로 페니실린이기 때문이다.

세균은 억제, 인체는 무해

페니실린이 여러 가지 전염병에 특효가 있는 약으로 개발된 과정에서 첫번째 주춧돌을 쌓은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이 영국의 병리학자이자 세균학자인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다. 런던의 세인트메리병원 의과대학에서 연구를 하던 플레밍은 1928년 어느날 포도상구균 계통의 화농균을 배양하고 있던 도중 한개의 유리그릇에서 세균의 무리가 죽어버린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재수없는 일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플레밍은 그렇게 된 원인을 꼼꼼히 살펴보아, 세균이 그 주변의 곰팡이 때문에 배양이 되지 못한 채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세균의 발육을 저지하는 물질, 즉 항생물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플레밍이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플레밍이 처음부터 곰팡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부예맹과 웨슬링 등이 곰팡이의 항생작용에 대해 보고한 바가 있었지만 별로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던 터였다. 플레밍도 그때까지는 눈물이나 침에 들어 있는 효소인 라이소자임(lysozyme)에 대해 주로 연구했지 곰팡이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플레밍은 종래의 연구에 집착하지 않았다.

플레밍은 문제의 곰팡이를 배양했다. 그리고 배양된 곰팡이를 새로운 액체배지에 옮기고 다시 1주일이 지난 뒤 남은 배양액을 1천분의 1까지 희석시켰다. 그런데 이 액체에 포도상구균을 넣자 그 발육이 억제됐다. 이로써 곰팡이 자체가 아니라 곰팡이가 생산해내는 어떤 물질이 강력한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그 곰팡이는 페니실리움(Penicillium)속(屬)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남은 배양액을, 뒤에는 곰팡이가 생산하는 물질 자체를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부르게 됐다. 계속된 연구를 통해 플레밍은 페니실리움속에 속하는 곰팡이의 대부분은 페니실린을 만들지 않고 특정한 종, 즉 단지 자신의 포도상구균의 배양을 억제했던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만이 페니실린을 생산한다는 점도 알게 됐다.

플레밍은 이어서 페니실린이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특히 폐렴균, 수막염균, 디프테리아균, 탄저균, 가스괴저균 등 인간과 가축들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에 효과가 크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반면 결핵균, 대장균, 인플루엔자균 등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이 다른 약물들에는 대체로 취약한 백혈구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과, 또 페니실린을 생쥐에 주사해도 거의 해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동안 학자들이 개발한 여러 항생물질은 세균의 성장과 발육에 억제효과를 가지는 동시에 생쥐와 같은 고등동물의 세포에 대해서도 비슷한 작용을 나타낸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점을 극복했다는 사실이 페니실린의 발견이 갖는 의의다. 진정한 의미의 ‘마법의 탄환’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페니실린 개발 역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몸 안에 병균이 침입하면 면역세포들(파란색)이 접근해 병균을 공격한다.


불순물 제거가 관건

플레밍은 이듬해인 1929년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발표했다. 페니실리움 노타툼의 항균작용, 즉 그 곰팡이가 몇가지 세균의 성장을 억압하며 따라서 세균의 배양과 분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였다. 그런데 플레밍은 의아스럽게도 페니실린의 의학적 활용에 대해서는 이후에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설사 플레밍 자신이 페니실린을 임상적으로 사용하려 했더라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우선 페니실린을 순수하게 분리해내야 했다. 페니실리움 노타툼의 배양액 속에 페니실린이라고 이름 붙인 물질이 들어 있더라도 환자에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을 정제해야 한다.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이 개발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밴팅과 베스트가 인슐린을 발견하고 추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제임스 콜립이 그 추출물을 정제해내지 못했다면 인슐린은 임상적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98년 7월 노벨상 따라잡기 참조).

페니실린을 치료약으로 개발해내는 과정에서 콜립의 역할을 한 사람은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자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1968)와 생화학자 체인(Ernst Boris Chain, 1906-1979)이었다.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과 직접 함께 일한 적은 없었지만 학문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플레밍의 업적을 계승했다. 1935년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교수로 발령을 받은 플로리는 곧 체인을 화학병리학 실험강사로 채용했다. 결과적으로 보아 플로리는 자신의 연구 파트너를 선택하는데 놀라운 안목을 과시한 것이다.

플로리는 일찍부터 염증반응의 기초적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점액에 대해 연구했다. 특히 눈물과 침 등 점액에 들어있다는 라이소자임에 관한 플레밍의 논문에 관심을 가졌다. 플로리는 1937년 체인과 공동으로 라이소자임을 정제하는데 성공했으며 1940년에는 이 효소의 작용을 받는 기질의 구조도 규명했다. 이들은 라이소자임을 연구하는 동안 항균물질에 관한 논문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앞에서 언급한 플레밍의 1929년 논문에 주목했다.

1939년 플로리와 체인은 미국의 록펠러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페니실린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반년 동안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의 정제된 결정(結晶)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몇차례의 동물실험을 거듭한 끝에 1940년 8월 24일 ‘랜싯’(Lancet)지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전염병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렇듯 1년 남짓 되는 연구를 통해 그들은 플레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었다. 이듬해인 1941년 2월 12일 패혈증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에게 최초로 페니실린 투여 실험이 행해졌다. 기대와 예상대로 환자의 병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한가지 더 남아 있었다. 플로리와 체인은 충분한 양의 정제된 페니실린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이 최초의 환자는 완쾌에 이르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거듭된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통해 페니실린이 진정한 ‘마법의 탄환’이라는 점이 입증됐지만, 이와 더불어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최종적으로 해결돼야 할 과제라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이 점에 대해 플레밍은 다음과 같이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이 밀집한 전선에서 극심한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를 막기 위한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페니실린이 대량으로 공급됐다.


전쟁터에서 효력 발휘

“페니실린 발견의 제1막은 순전히 우연의 소산이다. … 세상에는 몇천가지의 곰팡이가 있고 세균도 몇천종이 될 것이다. … 우선은 모든 조작을 시험관에서 수행했다. … 커다란 수조에서 곰팡이를 배양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전에는 훌륭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곰팡이는 수조의 표면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배양 성적이 신통할 수 없는 것이다. 곰팡이들이 자라려면 공기가 많이 필요한데 따라서 공기를 수조 속으로 불어넣으면서 수조액을 휘저어 주어야 한다. 이때 세균이 섞여 들어가면 좋지 않은데 그렇게 조작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 그것이 기술상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었는데, 마침내 그 문제가 해결됐다. 이런 대량생산은 미국인들이 이룬 여러가지 성과 가운데 하나로써 몇t이나 되는 커다란 탱크에서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작업과정도 단순화되고 그만큼 노동력도 덜 들게 됐으며 따라서 생산비도 낮출 수 있었다.”

플로리와 체인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학자들과 제약업자들에게 호소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초기부터 참전한 미국의 정부와 군부는 전투에서 사상당하는 것보다 병사들이 밀집한 전선에 창궐하는 전염병의 치료와 예방이 더욱 큰 문제라는 사실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소액이지만 미국 정부는 플로리와 체인의 호소에 부응하는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대량생산에 성공한 페니실린은 1943년부터 전선에서, 1944년부터는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돼 수많은 전염병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노벨상위원회는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개발한 업적을 평가해 플레밍, 플로리, 체인 3명을 1945년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지금껏 개발된 모든 치료약 가운데 페니실린만큼 놀라운 효과를 거둔 약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페니실린의 처지는 어떤가?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제 세상은 페니실린 내성균으로 득시글거리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힐 법한 페니실린을 그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거의 무용지물로 만든 데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페니실린은 그 발견과 개발의 역사뿐 아니라 쇠퇴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20세기에 등장한 마법의 탄환 - 이제 만병통치약은 없다.

고대 이래 동과 서를 막론하고 질병은 대체로 몸 전체의 균형과 조화와 관련된 문제였다. 한의학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 여부가, 고대 그리스부터 서양의학에서는 몸에 존재하는 4체액의 균형 여부가 건강과 질병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환자의 치료도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약은 부족한 것을 보(補)한다는 보약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질병관과 치료술, 그리고 약물학 모두 전인적(全人的)이고 전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의학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8세기 서양사회에서였다. '실체론(實體論)'적인 질병관이 싹트게 된 것이다. 즉 병은 인간(의 신체)을 구성하는 4가지 체액 사이의 균형이 깨어진 전신적인 상태가 아니라 신체의 어떤 특정한 국소(局所) 부위에 생긴 해부병리학적인 변화(병변, 病變)라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해부병리학과 더불어 현대의학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세균학이다. 인류는 탄생이래 수많은 질병에 시달림을 받아왔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인류를 가장 크게 괴롭혀 온 것은 각종 전염병이다. 19세기까지도 인간의 평균수명이 선진국이더라도 40이 채 안됐고 '반타작이면 다행'(태어난 아기들 가운데 절반이 어른이 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표현으로, 그만큼 영유아사망률이 높았다)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받아들여졌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전염병이었다.

전염병의 정체를 규명함으로써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한 인물들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프랑스의 파스퇴르와 독일의 코흐이다. 파스퇴르는 근대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세균(박테리아)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으 밝혔다. 코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코흐의 공리'를 통해 어떤 세균이 어떤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했다. 파스퇴르와 코흐의 사고방식과 방법으로 무장한 제1세대 세균학자들에 의해 19세기말의 불과 20여년 사이에,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 온 수많은 전염병의 정체와 원인이 연이어 밝혀졌다. 의학사가들이 말하는 '세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6백6회째 실험에 성공한 매독치료제

세균학이 규명한 것은 예컨대 결핵균이라는 '특정한' 원인만이 결핵이라는 '특정한'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특정병인론). 다시 말해 결핵균이라는 '필요조건'이 없다면 결핵은 생기지 않는다. 이전까지 결핵의 원인으로 여겼던 심한 과로상태나 영양결핍에 빠지더라도 결핵균의 침입을 받지 않는 한 결코 결핵에는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1백여년 전 싹트기 시작한 '특정병인론'은 논리적 귀결로 '특효요법'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병은 특정한 원인에 의해 생기는바 그 특정 원인을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시대의 만병 통치약이나 보약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이다. 이런 효과를 가진 약을 당시부터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러 왔다. 병과, 그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적군이라고 할 때, 아군인 우리 몸에는 아무런 해나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특정한 적군들만을 공격하는 고성능 요격 미사일인 셈이다.

'마법의 탄환'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제로 그러한 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은 독일의 에를리히(Paul Erlich, 1854-1915)이다. 에를리히는 인간의 세포에는 손상을 주는 일 없이, 인체에 침입한 세균만을 죽이는 특효약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6백번이 넘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1910년 매독 치료에 특효가 있는 '살바르산 606'(606이라는 숫자는 606번째로 얻은 물질이라는 뜻이다)을 개발했다. 50대 이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 정도는 기억할 이 비소화합물은 페니실린이 보급될 때까지 40년 가까이 신비의 약으로 널리 쓰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되지만 이 약은 당시까지 쓰이던 수은제제에 비해서 약효가 뚜렷하고 독성이나 부작용이 적어 '마법의 탄환'으로 불릴만했다. 에를리히는 살바르산 606을 개발해 수많은 매독 환자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지만, 의학사적으로는 '마법의 탄환'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업적으로 더욱 오래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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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황상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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